"한국 땅에서의 '거듭나기' 스스로 깨우치도록 해야죠"남과 북을 함께 보듬고 추스리는 공동체 운영

[한국초대석] 탈북 청소년 대안 학교 박상영 교장
"한국 땅에서의 '거듭나기' 스스로 깨우치도록 해야죠"
남과 북을 함께 보듬고 추스리는 공동체 운영


11월 24일 아침 10시. 첫 수업 시간이다. 통기타를 품에 안고 아이들 앞에 앉은 박상영(42)씨가 기타를 튕기며 ‘뭉게구름’을 선창하니, 올망졸망 앉은 청소년들이 씩씩한 목소리로 이어 간다. “이 땅이 끝나는 곳에서 뭉게구름이 되어….” 교가다.

저희들끼리 장난에 열중하던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대번에 벌이 주어진다. “야, 너희는 왜 노래 안 부르고 개겨? 너희 둘만 부른다!” 숫제 교관 행세다. 그러나 목소리만 클 뿐 하나도 무섭지 않은 그가 열을 내는 모습에, 정작 아이들은 더 신이 나는 듯. 박씨, 아무래도 위엄 잡기는 아예 틀렸다. 오죽하면 별명이 ‘망채’ 이겠는가. 망둥어의 북한 사투리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산마루에 있는 낙산공원 바로 밑, 대학로 뒷골목에 있는 동파출소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셋넷학교’. 숨을 고르고 자세히 보면 그렇게 적힌 손바닥만한 간판이 하나 빼꼼히 보인다.

망채 선생 못지 않게, 학생들 또한 독특하다면 독특하다. 현재 15명의 탈북자 청소년이 모여 낯선 한국을, 냉정한 자본주의를 그들 나름으로 배워 나가는 곳이다. 박씨는 대표 교사. 이곳서는 다들 교장이라 한다.

• 탈북청소년에게 '한국' 가르치기
현재 233명으로 파악되는 한국내 탈북 청소년들의 숫자로 보자면 10분의 1도 채 안 되는 숫자이지만, 그들의 현재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정보들과 직결돼 있다. 남북 통일 후에 남과 북이 공존해 이뤄낼 수 있는 공동체의 모습, 극단적으로 분리된 두 사회가 어떻게 융화될 수 있는지 등이 이 25평짜리 반 지하에서 실험되고 있다. 아니, ‘실험’이라는 말은 대단히 무례하다. 그들은 서로 보듬고 추스려 가며 한국땅에서 거듭나기를 스스로 깨우쳐 나가고 있을 따름이니.

“중국에서 천신만고끝에 넘어 온 이들에게 남한이란 천국과 동의어죠. 1970년대에 일본으로 밀항했던 당시와 비슷해요. 얘들을 빨리 자본주의에 적응시켜야 해요.” 현재 모두 15명을 헤아리는 이 학교 학생들이 박 씨의 선창을 따라 제 2의 교가 ‘사노라면’을 불렀다. 중간에 흥겨운 고고리듬으로 바뀌니, 학생들은 환호를 올리더니 책상을 쳐 대며 낮은 천정이 무너져라 합창했다.

때 아닌 난장판은 “지금 오고 계셔요”라는 말 한 마디로 금새 가라 앉았다. 11월 24일, ‘자본주의 경제 읽기’ 강의를 3개월간 하기로 한 새 교사 김규성(SK 생명 부장)씨가 온다는 말. 대학 선배인 새 선생님을 기다릴 때까지, 최근 있었던 견학 수업에 대한 소감을 나누도록 그가 유도했다. 어린 탈북자들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경복궁이 인상 깊었던 것은 일제에 의해 왜곡됐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쓰레기산(난지도)에 개구리가 살게 됐다니 신기하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

“9월 10일 개교했어요. 학생수라 해 봤자 20명 남짓이지만, 우리에겐 풍성한 가능성이 있어요. ” 자신을 비롯한 28명의 교사들로부터 갹출한 보증금 500, 월세 50만원이 이뤄낸 현재를 버티고 선 박 교장의 말에서는 신념이 배어 나온다. 탈북 청소년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장 큰 힘이었다. “탈북자 지원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그들을 ‘불쌍한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식의 시각에 머무르는 경우를 자주 보죠. 탈북 청소년들이 서울말씨를 빨리 익히지 못 해 조바심을 내는 것도 그런 시선탓이죠.”

그러나 그는 그들이 참으로 해맑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경복궁, 북촌, 종묘 등지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해 온 현장 학습(서울 견학)은 그래서 그 자신에게 기쁨이다. 이곳보다 물질적으로 빈핍한 사회에서 사회주의적 심성을 교육받은 학생들의 반응이 새삼스럽다. 경복궁에서 그들은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읽었고, 한강에서는 쓰레기산에 이제 개구리가 산다는 사실에 신기해 했다. 그들을 남한 자본주의 체제에 무방비로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는 새삼 깨닫는다.

최근 한국 사회를 풍미했던 말을 빌자면, 박 씨의 접근 방식은 ‘내재적’이다. 같은 눈높이에서 출발해, 대상과 함께 나아 간다. 그것은 마침내 갈라진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길이라는 신념이다. 지금껏 그의 삶이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간 것이었듯.

•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나눔의 실천

고3 학생이 혼자서 사변의 길, 혹은 사유에 빠졌던 게 단초였을까. 친구들은 대입 준비에 여념 없었지만, 그에게는 철학 아니면 이념 서적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결국 한 해 재수를 하고 고려대 철학과에 들어 갔으니, 당시 대학 사회를 풍미하던 이념 서클에 빠진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 그러나 그도 맞지 않았다. “모든 커리큘럼을 짜 놓고 거기에 따를 것을 요구하던 선배들의 강요식 운동 방식에 대해 개겼죠.”

대중의 실상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만 자위(그는 다른 표현을 썼다)하는 행위라고 판단한 그는 대학 후반부를 대단히 독특한 방식으로 보냈다. 밤기차로 혼자 여행하거나, 다니던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식이었다. 니체의 철학에 심취한 때이기도 했다. 니체의 초인 철학에 빠져 독일로 유학갈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뚜렷한 길이 없었던 그는 대학을 마치고는 당시 잘 나간다는 한 증권회사에 취직했다. 고급 룸 살롱에 가서 주지육림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는 밤마다 슬펐다고 기억한다.새벽까지 술을 퍼도 일 하나는 칼 같이 하던 그를 눈여겨 보던 회사는 그를 결국 기획실로까지 발령했으나, 그는 보란 듯 사표로 답했다. 니체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던 것일까. 아내를 설득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한다.

때마침 교육 문제가 사회 운동의 큰 화두로 떠오르던 1990년대 초, 그는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교육ㆍ문화 분야의 간사로 6년 동안 활동했다. 1994년부터는 NGO 활동가, 전교조 출신 교사 등과 함께 대안 교육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해 갔다. 첫 성과물이 1995년의 ‘따로 또 같이 만드는 학교’다. 줄여서 ‘따또학교’라고도 한다. 한국에서 중고등 학생 연령대를 위한 대안학교가 만들어지기는 그것이 최초였다.

6년의 경험은 배움(가르침)이란 곧 나눔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2001년, 하릴없는 중노년층의 소일 장소로 전락한 강북청소년 수련관의 전문위원으로 위촉된 그는 그 곳을 또 다른 대안 학교 ‘나는 나다 학교’로 만들었다. 학교 부적응자들을 모아 공연 예술 전문 교육 기관으로 거듭난 것. 그렇게 3년이 흐르던 어느 날, 그는 대안 교육이란 화두에 몰입하고 책을 들었다. 대학 시절 서너 번 본 ‘서머힐’이 그를 격려했다.

1년 뒤, 그는 수유리에 ‘늘푸른 학교’라는 탈북 청소년 생활 공동체를 만들었다. “1주일에 한 번씩 탈북 청소년들과 놀아 달라. 그들의 닫힌 심성을 열어 달라”는 부탁이 방아쇠였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통일이란 문제에는 무관심했던 그를 움직였던 것은 북한의 아이들에 대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그는 2002년 4월 ‘셋넷 교실’을 세우게 된다. 기존의 탈북자 정착 지원 시설 ‘하나원’을 계승 발전하자는 취지였다. 현재 ‘셋넷학교’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탈북자들과의 인연은 오래 된 것이다. 월남자들이 세운 교회인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내 여해 문화 공간에서의 각종 문화 활동이 그러했다. 또 1997~98년 교회내 중국 용정 동포 돕기 의료 선교단 활동 시절, 조선족 탈북자와 인연이 닿아 남몰래 백두산까지 갔으니, 따지고 보면 허튼 인연이 아니다.

그가 세운 남한 최초의 첫 탈북 청소년 대안 학교가 2003년 성탄절에 10명의 학생으로 교회내에서 문을 연 ‘똘배학교’. 못 생겼지만 맛 좋은 돌배의 정신을 배우자는 뜻이었다. 중국 등지에서 당할대로 당해 위축되고 삐뚤어진 탈북 청소년들의 심리를 잘 아는 그는 신문이나 인터넷 등 공개적 루트는 피했다. 그들이 잘 가는 시장에 가서, 그런 청소년들이 눈에 띄면 떡뽁기 같은 것을 같이 사 먹으며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뿌리 뽑힌 아이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그가 종교 등의 입김에서 벗어나, 진정 그들을 위한 가르침을 베풀자는 마음으로 만든 학교가 바로 이 곳이다.

• "자기를 지키며 살 수있게 도와야"

그는 탈북 청소년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자유와 폭넓은 시야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본인은 기독교 신자이지만. 절에 가서 발우 공양까지 경험하?한다. 자신의 목표는 독일의 예술 대안 학교인 ‘발도로프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은 바로 자유 아니던가. 각자 떼 놓고 본다면 우리 사회에서 어느 것 하나 모자랄 것 없는 교사들에게 그가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 무엇일까? “내가 이 아이들에게 사기 치는 게 아닌가, 항상 자신을 뒤돌아 봐야 합니다.”

바로 그 같은 마음으로 그는 소망한다. 이 학교가 탈북자만을 위한 게 아니라, 남한의 부적응 청소년도 함께 하는 학교가 되기를.

“현재의 남한 방식을 따르면 이들은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어요. 부적응을 체험하자는 거죠.”동시에 두 사회를 균형 있게 보는 눈도 필요하다. 박종철과 이한열 등 지난 시절 이 곳에서 자행된 비극은 물론 심각한 인권 상황 등 북한의 실상도 나란히 보여 준다. 최근 북한이 김정일의 사진을 공식 석상에서 떼낸 것은 국제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라는 해석까지.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을 어떻게 ‘지양’해서 살 것인가가 문제죠.” 그의 경험적 통일론이다. 좀 더 들어가 보자. “남한에 와 있는 탈북 청소년들이 자기를 지키며 살 수 있게 도와야 해요.” 분단 상황을 넘어 선 첫 세대로 기록될 그들의 운명과 직결된 현재의 통일 정책이 너무 돈 이야기로 귀결되고 마는 현실에 대한 뼈 있는 충고다.

셋넷학교 교사와 제자들이 모여 벌이는 사건들의 내용과 얼개는 그들의 홈 페이지에 다 공개돼 있다. 그들의 다시 서기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눈이 밝은 자들은 거기서 현재 남한 사회가 반성해야 할 바도 발견해 낼 수 있으리라. 박씨가 모든 정보를 인터넷으로 공개하는 이유다. 인터넷 주소는 www.34school.net.

12월이 되면 이 학교에는 새 식구가 생긴다. 목포와 포천에 사는 탈북 청소년 셋이 최근 이 학교 소문을 듣고, 새 식구가 되겠다며 강력 희망해 온 것. 맘씨 좋고 걱정도 많은 망채 선생, 더 바빠지게 됐다.

대학로 낙산공원에서 이른 아침, 난데없이 맑은 함성과 함께 곰살궂은 북한 사투리가 와그르르 풀어 헤쳐지더라도 절대 놀라지 마시길. 진짜 통일은 그렇게 오는 것이니.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12-02 14:30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