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제사 상차림의 꽃문어살 얇게 도려내 갖가지 문양으로 장식하는 전통 음식 기법

[한국의 장인들] 문어오리기 전문가 황금주
잔치·제사 상차림의 꽃
문어살 얇게 도려내 갖가지 문양으로 장식하는 전통 음식 기법


‘마른 문어발을 꽃 모양, 잎 모양으로 오려서 먹기 좋고 보기 좋게 만든 것. 큰 상을 고일 때 또는 잔치 음식을 차릴 때에는 오린 것을 보기 좋게 구성하여 높이 굄’. 전통 음식 사학자인 윤서석 씨가 펴낸 ‘한국의 음식 용어’에 실려있는 ‘문어조(文魚條)’ 풀이이다.

문어조는 꾸득꾸득하게 말린 문어를 여러 가지 아름다운 모양으로 잘라서 상차림을 장식하는 데 쓰는 전통 음식 기법으로, 요즘은 ‘문어오리기’ 또는 ‘문어오림’이라는 말로 주로 쓰인다. 용어도 한글로 바뀌었지만 재료도 문어보다는 오징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기도 하다.

광주 토박이인 황금주(48) 씨는 문어와 오징어오리기 분야에서 단연 첫 손꼽히는 전문가이다.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이 분은 못 따라간다”고 문어오리기 전문가가 추천하는, 전문가 가운데 전문가이다. 문어오리기는 문어의 살을 얇게 도려 내서 갖가지 문양을 만드는 것으로, 요즘 전문가들은 대부분 가위를 쓰지만 황 씨는 칼을 쓴다. 그만큼 더 섬세하게 모양과 무늬를 낼 수 있다.

그가 쓰는 칼은 손바닥만한 크기인데 낫처럼 속날이 휘어 있어서 문어를 오리기 좋게 되어있다. 원래 아버지가 쓰시던 것인데 돌아가시면서 황 씨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칼 두 개를 다른 사람은 만지지도 못하게 한다. 그의 문어오리는 솜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문어를 오렸다고 한다. “원래 제사상에서 문어오리는 것과 밤 치는 것은 남자가 하는 일이었잖아요. 할아버지가 솜씨가 좋으니까 주변에서 잔치나 제사가 있으면 모셔 가서 문어오리는 일을 부탁했던 모양입니다.”

문어오리기는 가업, 열 살 때부터 칼 잡아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일이 아주 커졌다. 주변에서 주문이 많아졌다. 특히 시제가 열리는 음력 3월과 10월이면 광주 남구 주월동 그의 집에는 자전거 짐수레를 든 장꾼들이 몰려들어 아버지가 오린 문어를 한 수레씩 실어가곤 했다. “그 때는 일이 밀려서 한숨만 붙이고는 또 다시 문어를 오리고 했어요. 짐꾼들이 어서 가져가려고 기다리는데 맘 놓고 쉴 수가 있어야지요.” 번성할 때는 문어를 손질하고 포장하는 일을 돕는 일꾼들만 8명이나 되었다.

주문이 밀리니 집 식구들이 다 나서서 일을 도왔다. 그의 형제는 4남 1녀로 그가 가운데에 들어있는데 어머니는 문어를 놓는 대나무 그릇을 꾸미는 일을 맡았고 큰 오빠는 소품을 장식하는 것을 맡았다. 문어오리기는 줄창 아버지가 하셨는데 일손이 달리니 나중에는 둘째 오빠와, 황씨, 그리고 바로 밑에 동생까지 나서게 됐다.

“처음에는 어리니까 문어 널어놓은 것을 개나 고양이가 물어가지 않도록 지키는 일만 하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 열 살 때부터는 직접 칼을 들었다. 1966년쯤이다. 어렸지만 솜씨가 야무졌던지 그 후로 내처 그는 문어오리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구들과 한참 놀 때인데 문어오리는 일에 잡혀 있으니 일이 좋았을 리는 없었다. 그는 “친구들이 저를 부르면 아버지가 싫어 하시는 걸 알고는 휘파람을 불었어요. 그러면 오공오 세타(505사로 불리던 순모실로 짠 스웨터) 주머니에 문어 오리고 남은 걸 쥐고 나가면 먹을 것이 귀할 때라 인기 짱이었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일한다는 걸 아는 딸로서는 맘껏 노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 곧 일터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눈도 제대로 못 붙이고 일을 하니 딸도 곁에서 잠을 맘껏 자지 못했다. 그는 키가 150㎝를 겨우 넘는데, 아마도 어린 시절에 잠도 못자고 앉아서 문어오리는 일만 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일이 고될 어린 딸을 위해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양반은 뭐든지 참을 줄 알아야 양반”이라는 말도 했고 그의 조상인 장수 황씨 황희 정승에 대한, 책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황희 정승이 돌아가시고 중국 황제가 공작을 우리나라 왕한테 선물했는데 공작이 잘 먹지 않고 죽어가더랍니다. 황제가 준 것을 죽이면 큰일이라서 황희 정승이 살아계셨으면 연유를 알텐데 하다가 신하들이 혹시나 싶어서 황희 정승의 부인을 찾았더니 그 부인이 ‘거미도 공작을 먹고 사는데 산 입에 거미줄을 치겠느냐’는 말을 황희 정승이 늘 하셨더라는 말을 전해서 그 말대로 공작에게 거미를 먹였더니 공작이 살아나더랍니다.”

문어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원래 여염집의 제사에서는 주로 국화꽃이나 학 소나무를 많이 만들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용이며 봉황을 오히려 많이 찾는다고 했다. 폐백용 닭을 만드는 수요도 끊이지 않는다. 납작하게 눌린 문어의 다리에 실낱 같은 칼집을 넣어 둥글게 말면 국화꽃이 된다. 보통 1m짜리 문어면 다리 길이가 70~80㎝쯤인데 그 다리에 국화꽃이 20여 개씩 놓이게 된다.

문어 오리기는 살이 꾸득할 때 하는데 너무 마르면 부서지고 너무 젖으면 늘어져서 일이 안 되기 때문에 적절한 때에 잡고 쉬지 않고 손을 놀려야 한다. 1m짜리 한 마리에 국화꽃을 놓는데 꼬박 5시간이 걸리니 그 사이에도 문어는 계속 말라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을 축여가며 할 수도 없다. 바다 물건은 물이 닿으면 뻐드러지거나 물이 빨리 가서 색이 변형되어 버린다. 이 때문에 서늘하고 바람이 안 통하는 곳에서 서둘러 오리는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부엌이 작업장이었던 황씨네 친정에는 이 때문에 흙바닥에 큰 구덩이를 판 뒤 그 곳에 문어를 둬, 자연의 습기로 문어가 빳빳해지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또 미리 만들어 놓은 국화가 옆 다리를 오리는 동안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에 윗부분의 8개 다리를 쭉 해 놓고 다시 가운데 부분을 오리는 등 오리는 순서에도 요령이 있다.

60년대 후반부터 문어 대신 오징어 활용
원래는 문어만을 썼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는 오징어도 많이 활용하고 있다. 황씨가 기억하기로는 오징어를 문어오림 대신 쓴 것도 그의 집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때 쯤인데, 어머니가 양동시장에서 오징어를 사 와서는 이 걸로 한번 해 보자고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기억을 한다.

문어와 오징어를 비교하면 오징어가 더 부드러워서 작업하기 편하다. 오징어는 또 몸통의 색깔과 귀, 다리의 색깔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림을 만드는 데에도 유리하다. 그의 작업실에는 오징어를 오려 만든 ‘동양화’가 두 점 걸려 있다. 한 점은 소나무에 학이 날아 드는 것이고, 또 다른 한 점은 국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인데 빨판이 달려있는 오징어 다리로 만든 소나무 줄기는 거친 질감이 멀리서 보면 정말 소나무 같을 정도이다.

국화꽃도 줄기는 오징어 다리로, 잎은 오징어귀로, 꽃은 껍질을 벗긴 오징어 살로 만들었는데 각기 다른 질감과 색이 희한하다. 반면 문어는 껍질을 벗긴 분홍에 가까운 미색과 껍질이 붙은 다리쪽의 붉은 색, 두 가지 색밖에 못 내지만 보얀 색깔이 고급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1975년을 고비로 잠시 문어오리기에서 손을 놓았었다. 이후 혼례와 상례가 간소화하면서 문어오림의 수요 자체도 줄었다. 7년 뒤 혼인을 하고는 경리 학원을 열면서 문어오리기와는 완전히 손을 뗐다.

그러다가 다시 시작한 것이 89년부터이다. 다시 찾는 이들이 늘어 갔기 때문이다. 물론 문어오리기 뿐 아니라 폐백 음식 만드는 일도 그는 주업으로 삼고 있다. 문어오리기 자체만으로는 수입이 크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2003년과 2004년에는 낙안읍성에서 열린 남도 음식 문화 축제에서 문어 오징어오림과 전통 폐백 음식을 초청 전시했으며, 지난해 10월에는 광주 롯데 백화점에서 개인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2002년 운현궁에서 열린 왕실 음식 재현 행사 때도 문어오리기와 장식은 그가 맡았다.

문어오리기가 3년째로 접어 드니, 보지 않고도 칼놀림이 수월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더 솜씨가 느는 것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대신 새로운 생활에 맞춰, 끊임없이 새로운 창작 그림을 문어나 오징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해 내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는 현대 생활에 맞게 새로운 그림을 문어와 오징어로 계속 창작해 가고 있다. 장미나 백합 포도송이와 포도 ?같은 작품들이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는 오징어로 줄장미도 만든다. 매화꽃 흐드러지게 피어있는데 학이 날라드는 정경도, 국화가 소담스레 피어있는 데로 봉황이 내려앉는 경치도 그의 손끝에서 창조가 된다.

하지만 그는 재료가 귀해서 오히려 옛날보다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크다고 했다. “옛날 문어는 지금보다 크고 살이 도톰해서 꽃잎이 가늘고 길게 늘어지는 실국화도 만들고 양쪽으로 오려 코스모스 잎 같은 것도 만들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문어가 귀하다”고 안타까워 했다.

▲ 문어로 국화꽃 만들기

말린 문어는 껍질을 벗긴 백문어, 껍질을 그대로 둔 피문어로 나뉜다. 문어오림의 재료는 당연히 백문어. 대체로 크기가 80㎝는 넘어야 문어오리기에 합당한 백문어의 자격이 주어진다.

문어는 일단 말린 상태로 장인에게 온다. 백문어를 말릴 때는 머리의 껍질은 벗겨 버리지만 다리의 껍질은 아래쪽으로 몰아붙여 가늘어 지는 다리 아래를 위쪽만큼 통통하게 만드는 것이 요령. 비록 말려서 왔지만 반듯하게 되지 않은 것은 오리는 장인이 모양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이 때는 반드시 나무 방망이나 나무 망치를 써야 한다. 쇠망치를 쓰면 문어살이 바스러진다.

문어 다리의 옆쪽을 1㎜ 이내의 간격으로 1.7㎝ 정도 깊이의 칼집을 내준다. 간격이 일정하고 칼집의 바닥이 똑 같게 해야 한다. 칼집을 25~30개 정도 낸 후, 칼집 자리를 감싸 안는 느낌으로 크게 공굴려 ㅁ자에 가까운 ㄷ자로 잘라 준다. 잘린 조각을 쫙 펴서 둥글게 굴려 주면 국화꽃이 완성된다.

서화숙 한국일보 대기자


입력시간 : 2005-01-12 15:48


서화숙 한국일보 대기자 hssu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