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색으로 거듭난 닭의 위엄27년의 화력이 녹아있는 민화 닭그림'시대 담은 민화 그릴 것"

[한국 초대석] 민화 작가 서공임
오방색으로 거듭난 닭의 위엄
27년의 화력이 녹아있는 민화 닭그림
'시대 담은 민화 그릴 것"


그 동안 힘들고도 외로운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 돌아 볼 여유가 생겼다. 힘들었던 시간의 기억들로부터 벗어날 때도 됐다. 이제는 진정으로 비상(飛上)을 생각해 본다. 붉게 솟아 오르는 정초의 해를 시샘하듯 홰를 쳐 오르는 장닭 같은 비상(飛翔)을…. ‘민화 닭그림 초대전 – 닭이 울면 을유년 새벽이 밝아 온다’는 바로 그런 것.

닭은 귀신을 쫓고 복을 부르는 영물
전문 전시장으로 새롭게 문을 연 한국일보사 1층 갤러리에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1월 5일 막을 올린 전시회가 닭의 해 초입에 세간의 화제로 떠 오른 덕이다. 지난 시절,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질곡의 시대를 버티게도 했던 희망의 전령사가 그녀의 섬세한 모필을 거쳐 저렇듯 찬란한 생명을 뽐내고 있다.

군계일학(群鷄一鶴). 여기서 닭은 물론 평범한 사물을, 학은 당연히 빼어난 사물을 말한다. 학을 돋보이게 할 양으로 무고한 닭을 애써 폄하시키는 저 사자성구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왔는지를 그의 닭그림 30여점은 웅변하고 있다. 한쪽 벽 전면에는 출품작 중 최대 작품인 ‘화조도’가 9.3m에 달하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 전시장 전체가 아예 거대한 조류원을 방불케 한다. 그의 민화 닭그림을 만나 올해의 주인공 닭은 귀신을 쫓고 복을 부르는(벽사초복) 영물로 거듭난다.

2004년, 두 달 꼬박 작업해 완성했다는, 그가 가장 애착을 느낀다는 ‘황계도(黃鷄圖)’를 보자. 전통적 염색법에 따라 먹물로 한지를 먼저 물들인 다음 노란 물감으로 닭을, 옆으로는 까치들을 그려 넣은 작품이다. 닭에 저런 위엄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관객들이 한참 머물다 가는 작품이다. 그림 그림마다 27년이라는 두터운 화력(畵歷)이 녹아 있다.민화(民畵) 작가 서공임(45).

“1998년 호랑이 그림 그렸던 게 출발점이 된 셈이네요.” 그 해 1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갤러리에서 ‘서공임 민화 호랑이전’을 가졌던 일이다. 빅 히트였다. IMF 외환위기 직후의 침울한 사회 분위기에서 시대의 의표를 찔렀던 것. 한 신문은 ‘호랑이 백 마리를 기르는 여자’라며 큰 제목을 뽑아 반겼고, 한 방송은 그를 출연시켜 그림 설명을 부탁했다. 또 두 달 뒤에는 부산에서 뜨거운 관심속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이어 2000년 용의 해 때는 용 그림으로 서울 – 광주 등지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궁핍한 시대가 그의 그림을 먼저 알아 봤던 것일까?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다. “지금까지의 동물 그림 전시회는 12간지 중 마귀를 쫓는 의미를 가진 동물들로만 했어요. 이제 닭까지 했으니, 완성된 셈이죠.”

그의 그림은 흔히들 관념적이고 비사실적이라고 이해되기 십상인 민화의 개념을 뒤바꾼 것으로 평가된다. 지독스레 대상을 파고드는 천석고황(泉石膏肓) 같은 화풍 덕에 그가 그린 대상들은 금방이리도 화폭을 박차고 나올 것 같다. 아무에게도 팔지 않고 소장중인 8폭 병풍 ‘호피도(虎皮圖)’는 털 하나하나를 세묘하는 바람에 손가락이 휘는 등의 부작용으로 병원 신세까지 져야 했다.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그의 작품 세계에 매료된다는 것은 그가 지닌 최대의 미덕일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옥좌 뒤의 용 그림을 부조로 재현해 낸 작품은 전시회장에 구경 온 독일의 기업가가 즉석에서 구매했던 것은 그 일례다. 2002년 ‘사랑과 꿈’이라는 제목으로 민화속의 에로티시즘을 천착한 합동 전시회에서는 복숭아와 잉어 등을 소재로 성적 상징성을 부각시킨 그의 그림이 유독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 코엑스에서 열렸던 ‘한국 국제 아트 페어’에서 대형 ‘책걸이’ 그림은 어느 기업가의 몫이었다.

1996년 10월 백상기념관에서 ‘민화 전승 작업의 오늘과 내일’이란 제하로 열었던 전시회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가 그린 십장생 등 전통 민화와 해학적 창작 민화가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마침 당시 방한했던 스페인의 카를로스 국왕 내외가 알고는 자신의 인사동 작업실까지 찾아 왔던 것. 급작스레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경호상의 문제(사실은 너무 누추해서)를 내세워 안면을 트고 지내던 한 사찰 음식 전문점으로 부랴부랴 화구를 챙겨 갔다. 6자 길이의 ‘일월도’를 그리는 모습을 소피아 왕비가 무릎 꿇고 지켜 보던 30분 동안의 사건을 어찌 잊으랴.

현실의 벽 넘고 민화작가로 자리매김
그는 공식적으로는 2년째 ‘한국 민화 작가회’의 수석 부회장이다. 동양화 아니면 서양화만이 미술협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던 기존 미술판에서 민화 살리기를 위해서 나날을 보낸다. 그는 부지런한 작가다. 작업도 열심이고, 전시회에서도 자주 그 이름을 보게 된다. 그는 “내가 되도록 전람회를 자주 갖는 것은 힘 약하고 기회 없는 민화를 되도록 널리 알리기 위한 의무감에서”라고 말했다. ‘민화작가 서공임’으로 우뚝 서기까지 그를 지탱시켜 준 것은 힘들었던 시절의 기억이다.

그의 그림 인생 25년은 가난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빈한한 가정 형편으로 그토록 소원했던 미대에의 꿈은 접어야 했다. 착잡한 심정을 달래던 그에게 한 화방의 민화 수강생 모집 광고가 우연히 눈에 띄었다. “시골서 어쩌다 본 병풍 그림 정도로 생각하고, 우울한 심사도 달랠 겸 잠시 해 본다던 게 여기까지 왔다”고 그는 돌이켰다. 우창화실이란 간판을 단 그 곳은 주한 미군을 상대로 민화를 그려다 팔던 곳이었다. 엄격한 전근대적 도제 교육이 그대로 남아 있던 곳이었다.

10여명 원생들의 막내였던 그는 걸레질이며 설거지를 해 가며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세 정거장을 걸어 다녀야 했고, 후배도 가물에 콩 나듯 한 힘들디 힘든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가고 싶었던 대학을 못 갔다는 자괴감, 학연도 지연도 없다는 상황”은 오히려 오기를 발동시켰다. 설상가상으로 부모는 기를 쓰고 반대했다. “악조건이 지금의 나를 존재케 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 7년 세월 동안, 그는 모란도 십장생 장군도 책걸이 산신도 등 민화의 모든 것을 다 익혔다. 아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다. “돈이 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그는 단도직입. 그러나 폭 넓게 공부한 것이기도 했다고 돌이킨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인사동의 개인 작업실에서 점심 굶기를 밥 먹듯 한 세월 7년이 더 남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무서운 실력자로 알음알음 소문이 났다. 그러다 1983년이 됐다.

용인에서 호암미술관이 개관 1주년 기념 ‘전통 민화전’을 준비하면서 그에게 작업에 동참할 것을 부탁한 것이다. 바이어한테 줄 전통화를 그리던 팀(8명)의 일원으로서 였다. “1년 동안, 옛 민화를 보며 모사와 복원 작업에 매달렸어요.” 그러나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라 했던가.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던 걸 익힐 수 있었죠.” 당시 그가 그려 낸 그림들은 지금 세계 유수의 기업가가 귀중히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1985년, 그는 교통사고로 10개월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시간은 헛되지 않아, 훌훌 털고 일어 난 그는 인사동에 작은 작업실을 하나 꾸밀 수 있었다. “보증금 50, 월세 10, 전화 10만원의 4평짜리 공간이었어요. 집(성남)에서 출퇴근 했죠.” 그러나 무명 작가의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눈치밥 먹고 도망 치듯 작업실로 달려 갔던 것은 그래서다.

그러던 중 1986년말, 비슷한 처지의 동년배 민화 작가들이 ‘한국 민화 연우회 (硏友會)’를 만들 때 적극 동참해 1986년 12월 ‘제 1회 한국 민화 연우회전’을 열게 된다. 국내에서 민화를 주제로 열린 첫 전시회였고, 음지의 민화 예술이 살아 온다는 소식에 언론도 크게 반겼다. 한국 민화 연우회는 현재 ‘한국 민화 작가회’로 계승 발전했다. 현재 120명의 회원이 있는 이 모임에서 그는 수석 부회장. 2004년 11월 10주년전을 가져 언론의 관심을 받은 바 있다.

달라진 민화의 위상은 그의 행보에서 선명히 읽힌다. 연세대와 동국대의 사회교육원, 동방대학원 등지의 한국 민화 강좌를 8년째 맡아 오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중년 부인들이 자주 눈에 띄는 연유다. 20~60대에 이르는 수강생들은 전문 작가까지 포함한다. “정보를 교환하거나 친목을 도모하는 기회인 거죠.” EBS의 관련 강좌는 물론 한옥문화연구원 등에서 인기 초빙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세간의 환대가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저한테 현실의 때가 묻어 오는 것 같아요. 기교상으로는 훨씬 능숙해 졌다 쳐도, 정말 이제는 진정으로 갈고 닦아야 할 시점인데….”

고도의 집중력 요구되는 작업
그는 “섬세한 그림은 이제 10년안으로 그려내야 한다”고 말했다.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민화 작업의 특성을 염두에 둔 것. 향후 그릴 민화는 이 시대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고도 다짐했다. “호환이나 마마는 사라지고 에이즈가 가장 무서워진 시대를, 이 시대의 민화는 그려내야 하죠.” 그 동안 전시 의사를 적극 타진해 온 뉴욕, 상하이, 오사카 등지에서 올해 내로 전시회를 가져볼까 생각중인 것도 시대적 의무감이리라.

이번 전시회는 그에게 더욱 각별하다. 출가도 않고 그림 하고만 씨름해 온 딸에게 힘이 돼 온 어머니 홍사남 씨에게 헌정

하는 의미가 그것. 올해 85세인 노모의 간지가 바로 닭띠인 것. “그 동안 어머니의 존재를 못 느껴오며 살다, 한 달 전 입원하시면서 갑자기 큰 공백이 다가왔어요. 꺼지려는 촛불의 모습, 너무 아파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슬럼프에 빠지겠죠. 닭이 가장 힘 있고 잘 생겼다며 전시작 중 ‘부귀공명’을 유독 좋아 하셨어요.” 결혼에 대해 묻는 질문에 “결혼 안 했다”고 답한 그는 “이번 전시회가 인연의 장이 됐으면…”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어제도 오늘도 노가다만 한다고 웃는 그를 잘 생긴 닭들이 흘겨 보고 있었다.

한국적 오방색이 그득한 이번 전시회를 유심히 둘러 본 사람이라면 색 다른 그림 하나와 맞닥뜨리게 된다. 1994년 11월에 그린 ‘벽사초복과 피카소의 닭’ 이 그것이다. 전쟁에 분노하는 심정을 그린 원작이 그의 붓을 만나, 한국적 정서속으로 절묘하게 융해돼 있다. 1월 1일을 전후해 각 TV에서 경쟁적으로 방송한 이번 전시회는 2월 13일까지 한국일보 1층 갤러리에서 계속된다. 틈틈이 지방에서 개최 여부를 묻는 전화가 걸려 오고 있다. 3년째 홈 페이지(www.suhgongim.com)를 운영중이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5-01-12 16:27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