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근현대사, 평가 받아야"역사의식에 대한 일방적 잣대와 관념, 학문적으로 바로잡기에 나서

[한국 초대석] 교과서 포럼 상임대표 박효종 교수
"미완의 근현대사, 평가 받아야"
역사의식에 대한 일방적 잣대와 관념, 학문적으로 바로잡기에 나서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과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 집권과 권력의 강화를…(276쪽)’, ‘경제 발전의 지속과 국가 안정을 구실로…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다’(286쪽). 일장기 대신 성조기의 지배를 받아, 경제적 수입의 상당 부분을 미국 무기를 사는 데 투여해야 했던 남한의 현대사다. 독점 자본, 정경유착의 재벌 등 경제적 잣대들이 그 짝을 이룬다. ‘문어발’이라느니 ‘유례없다’느니 하는 표현에는 감정마저 개입돼 있다. 좋든 싫든, 객관적 사실인 비약적 경제 성장에 대한 기술은 배제됐다.

‘김정일이 주체 사상에 대한 해석을 독점함으로써 자연히 후계자의 자리를 굳혀 나갔다’(304쪽), ‘사회 간접 시설의 부족과 같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은 군대를 건설 현장에 투입하고 남한에 대해 지속적으로 군비 축소를 제의했다’(305쪽). 세습 체계가 논리화ㆍ합리화되고, 경제적 실패는 남한의 과도한 군비 때문에 비롯됐다는 논리다. 해방 정국을 연상케 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장 속으로 하나의 네이팜탄이 투하됐으니, 지난해 금성출판사가 발행한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가 당긴 불씨였다. 5종의 국사 교과서 중 최대의 점유율인 50%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일러주기에 족하다. 교과서란 세계로 뚫려 있는 공식 통로이므로.

“북한에 대해서는 철저히 ‘내재적 접근법’의 잣대로 접근합니다. 김일성 독재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이념적 명분을 인정하다가, 이승만 독재로 가면 태도가 돌변하는 식이죠. ” 커다란 일감을 떠 맡은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박효종(58) 교수는 마무리 작업을 앞 두고 숨 돌릴 겨를도 없다. 곧 출범할 ‘교과서 포럼’의 마무리 작업을 총괄하는 사람로서, 이번 겨울 방학은 결코 예년 같지 않다.

정치 밖의 4대 쟁점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 분단, 6ㆍ25 전쟁,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와 산업화 등 4대 문제를 두고 금성출판사의 교과서는 대한민국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죠.” 새마을 운동은 관주도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반면, 천리마 운동은 대중의 열정을 끌 내 노동력을 최대로 동원할 수 있었다고 서술하는 것이 그 예다. 사회주의 경제 자체의 문제에 대한 고찰 없이, 국방에의 수요 때문에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고도 한다. “성공한 국가(한국)의 정통성은 전면에서 부정하는 대신, 북한의 세습 체계는 합리화하는 거죠.” 두산, 동아 등 금성 이외의 4개 국사 교과서가 그에 대해 중립적 서술을 택한 것과는 선명히 대비된다.

2004년 10월 한나라당에서 먼저 이 문제를 제기한 뒤, 학문적 대응이 긴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 하는 학자들이 연세대에서 가졌던 준비 모임을 가졌던 게 12월 21일. 박 교수가 추진위원장으로 추대된 자리였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전상인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신지호 자유주의 연대 대표 등 정치ㆍ경제ㆍ역사ㆍ사회 분야를 대표하는 10명의 학자가 동참의 뜻을 밝혔다.

대한민국 폄하 시도 학문적으로 비판
1월 25일 오후 1시 30분 프레스센터에서 열릴 ‘교과서 포럼 출범 및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심포지엄’이 대장정의 서곡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 등 3명이 공동 대표로, 박 교수는 상임 대표로 공식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만날 기회가 생길 겁니다. 그렇게 공론의 장에 띄워 놓고, (문제를) 공개적으로 풀자는 거지요.” 대한민국을 폄하하려는 시도를 학문적으로 비판하자는 것.

“검인정을 거친 국사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이 집에 와서는 한국사를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월드컵 축구 때 가졌던 자부심이 역사로 가서는 자괴감이나 자학이 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는 거다. “월드컵 때 우리가 보여 준 모습은 그렇다면 허위 의식이었나요? 아니죠. 한국사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고 주장하는 게 허위 의식이예요.” 같은 이치를 현대사에 이입해 보자. “박정희 정권하의 산업화 당시, 우리는 열정적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지금 돌아 보니, 그게 모두 잘 못 됐다는 식의 역사 서술은 문제죠.”

박 교수는 1980년대 대학가를 주름 잡았던 ‘해전사의 인식’을 출발점으로 꼽았다. 당시 대학생들이 거듭남의 비전(秘傳)으로 여겼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다. 이제는 역사만이 아니라, 정치ㆍ사회ㆍ문학 등 여타 분야를 종합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지적이다. 해방후 한국내의 모순 때문에 6ㆍ25가 발발했다는 브루스 커밍스류의 접근 방식을 일부 학생이 답습하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공산권 수교 이후 공개된 한국전의 자료 등을 이용, 산업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전상인 교수의 ‘고개 숙인 수정주의’ 등의 연구 성과는 외면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었다. “4월께 출판될 성균관대 김영일 교수의 ‘다시 쓰는 한국사’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거라고 믿습니다.”

박 교수는 최근 불거진 내재적 접근이란 게 못내 답답한 모양이었다. “ 내재적 접근법을 북한에만 (적용)하고 왜 한국에 대해서는 안 하는 겁니까? 이념적 편향성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거죠.” 같은 이치로, 교과서 서술자가 우리의 명분 혹은 정당성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1960~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지나친 허탈감을 안겨 준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3대 미완성이 있어요. 첫 째, 민족주의죠. 그게 제대로 안 돼서 분단된 거고. 둘 째는 산업화, 진행중이고. 셋 째, 민주화죠. 이게 안 돼서 학생들 데리고 국회 견학 못 가는 거죠.” 제 3세계 국가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압축적으로 이뤄 낸 유일한 경우로서의 한국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 한 소이라는 것이다. 휴대폰, 자동차, IT 등에서 이뤄 낸 압축 성장은 도대체 어떤 수로 평가하겠느냐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아름다운 것으로 본다면 대한민국의 미완성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는 거죠.”

이념 대립은 역사학자들의 책임방기 탓
그는 현재의 극심한 이념 대립에는 역사학자들이 책임을 방기한 탓이 크다고 말했다. ‘교과서 포럼’의 실천 강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먼저, 대안 교과서를 만들 생각입니다. 심포지엄, 토론회 등의 작업을 축적하고 검증도 받아 가면서 학문적 콘텐츠를 쌓아야죠. 늦어도 내년 초에는 착수할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우리 근현대사 책을 개발하는 문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박정희 대통령 치하, 차관을 들일 보증금이 없어 독일로 나간 광부들의 월급을 선불 받아 모은 돈으로 충당하고는 모든 관계자들이 부둥켜 울었다는 일화. 또는 정주영, 박태준 씨 등이 산업 현장에 목숨을 걸고 매달린 이야기. 문어발 혹은 정경 유착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시대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역사를 너무 ‘인간주의’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역사는 불변하는 것이죠. 문제는 역사관입니다. 저는 간(間) 주관주의, 혹은 상호 주관주의에 주목합니다.” 그 말을 현재 초미의 관심사인 대북 문제로 치환해 보자. “감성적 반미주의ㆍ친북주의가 젊은 세대에 너무 팽배해 있습니다. 고교 시절, 그들은 반미 사상을 감성적으로 갖게 되죠. 금성 교과서나 전교조 측으로부터 들어 온 말이 원인이 된 듯 합니다.” 그는 한국 청소년들이 ‘인지 부조화’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얼굴에는 태극 무늬를 그리고 응원하면서, 역사로 와서는 자학하고 비판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그는 탈냉전의 시대에 최근 한국의 정치, 언론, 사회가 헤어나지 못 하고 있는 이념 과잉 현상은 시대착오적이라 규정했다.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그 같은 현상이 국가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더욱 이념 과잉을 유발하는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있어요.”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는 아예 보지도 않고, 반대파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데올로기적으로 불신하고 보는 ‘메신저 불신 현상’이 팽배하다는 지적이다. 정치적으로는 이른바 코드 정치, 사회적으로는 이념 혹은 아젠다 과잉 현상이 그래서 비롯된다. 결국 역사를 보는 눈도 그 같은 공리 공론에 귀속되고 말았다는 것.

"대안 교과서 만들어 시장에서 승부할 것"
출범식을 거치면 박 교수는 상임 대표로 승격한다. 어깨는 무거워지겠지만, 운신은 보다 날렵하게 가질 생각이다.박 교수는 “시장에서 승부할 것”이라고 했다. 근ㆍ현대사를 쉽고 재미 있게 다룬 도서를 출판하고, 올 상반기 중으로는 웹 사이트를 “꼭” 띄워 대중과 함께 가는 작업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다짐이다.

그는 공동체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읽고 있다. 문제를 시민 단체와 공유해 1년에 적어도 4회 이상은 정기적 모임을 갖겠다는 계획은 그래서 나온다. 이 일을 추진하면서 맛봤던 즐거움도 그에게는 큰 힘이다. “동료 교수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한 고등학생이 이 메일을 보내왔을 때, 모 출판사가 앞으로 적극적으로 책을 펴내고 싶다는 의견을 밝혀 왔을 때 큰 원군을 얻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여 교수들이 보여 준 첫 반응에 비길까? “제 제안을 듣고 ‘불감청고소원’이라고 한 분도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는 전례 없는 류의 지식인 모임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력이 독특하다면 독특하다. 원래 신부가 되려했던 박 교수는 가톨릭대 출신(66학번)이다. 그러다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제 1회 석사 과정에서 정치학에 관심을 갖게 돼 1986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제 3공화국의 국가 자율성’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그는 1987년 진주 경상대 국민윤리교육과에서 국제관계학 등을 가르치다, 1999년 현재의 대학으로 와 민주시민교육, 정의론, 국가론 등을 강의중이다. 2002년 백상출판대상에서 시민불복종 등을 다룬 ‘국가와 권위’(박영사 刊)로 수상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5-01-21 10:30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