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알피니즘의 꽃을 피우겠다"창립 43년 만에 첫 산익인 출신 회장산악인 반목·갈등 녹인 친화력의 '산 사나이'

[한국 초대석]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
"진정한 알피니즘의 꽃을 피우겠다"
창립 43년 만에 첫 산익인 출신 회장
산악인 반목·갈등 녹인 친화력의 '산 사나이'


“한국인은 모두 행운아” 왜? “산이 지천이잖아요.”

‘산 사나이’ 이인정(60) 씨가 산악계 수장이 됐다. 대한산악연맹이 3월 9일 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창립 43년 만에 첫 산악인 출신 회장이다. 이 신임 회장은 인왕산 자락의 서울 종로구 누상동에서 해방동이로 태어나 평생을 ‘산꾼’으로 살아 온 이다.

특히 그의 선출은 지금껏 산악연맹 회장에 정치인 등 유력 인사들이 추대되어 온 풍토에 비춰볼 때 산악계에서는 일대의 사건으로 이야기된다. 주한 네팔 명예영사이기도 한 이 회장을 강남 역삼동에 위치한 네팔 명예 영사관에서 만났다.

"이인정은 곧 한국 산악사"
악수를 청하는 그는 첫 인상부터 소탈하다. 산사람답다. “앞으로 바빠 산에 갈 시간이 줄어들 것이 걱정”이라는 말을 회장이 된 소감이랍시고 내놓다니. 등산을 ‘무용(無用)의 정열’과 ‘무상(無賞)의 행위’라고 했던 산악인의 순수함이 느껴진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인정이 곧 한국 산악사”라고 한다. 그의 이력이 증거하는 대로다.

그는 1969년 한국 산악계에 잊지 못할 슬픔을 안겨준 설악산 죽음의 계곡 사고에서 살아남은 장본인이라는 사실로 바깥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당시 그 눈사태로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동계 훈련하던 산악인 18명 중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월간 ‘산(山)’의 창간 기자였고, 1980년에 등반대장으로 히말라야 마나슬루에 태극기를 꽂았다. 그 쾌거는 한국 등반을 세계에 알린 일대 사건이었다. 사실 그의 이름 없는 한국 등반사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 회장은 운명적으로 산악인이다. 태어나 자란 서울 종로구 누상동은 인왕산 기슭의 동네로, 어려서부터 산이 놀이터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함께 바위를 타고 놀던 최선웅(한국산악회 부회장), 한이석(연대 산악부 OB), 김경배(한국등산학교 창설멤버) 씨 등과 고 3시절에 벌써 ‘인왕 클럽’이라는 산악회를 만들었고, 훗날 속칭 ‘누상동파’로 한국 등산계에서 암벽 등반 전위 그룹으로 이름을 날렸다.

자연스레 그는 중ㆍ고교(중동중ㆍ고) 시절에도 산악부였고, 대학(동국대)에 들어가서도 산악부였다. 부인 구혜정 씨와의 인연도 산이 맺어 줬다. 구 씨는 LG그룹 창업자중 한 명인 구태회 회장의 둘째딸로 이화여대 법정대 산악부 주장이었다. 당시 이은상 대한산악회 회장은 이 회장에게 이대 산악부 지도를 명(?)했고, 두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만났다. 결혼은 산이 내린 선물이었다.

그러나 ‘산악인 이인정’의 인생 하이라이트는 베트남 전쟁. 1967년 그는 베트남 전에 용감하게 자원한다. 자유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아니다. 미군 병참 부대에 등산 장비로도 쓸 수 있는 귀한 장비가 수없이 널려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결국 등산 장비 구하러 전장으로 뛰어든 셈. 그는 1년 반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웠다. 등산 장비 욕심에 목숨을 던지다니! 이 회장은 “우습기도 하고, 바보스럽기도 한 젊음이었다”고 당시를 술회하며 자못 겸연쩍어 한다. 어처구니 없는 만큼, 가늠키 어려운 산꾼의 열정이 있었다.

또한 젊은 쳄?그의 혈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한국영화 황금기인 60년대엔 스턴트맨으로 활약했던 것. 고은아가 주연한 ‘처녀성’을 비롯, ‘상해 탈출’ ‘3인의 검객’ 등 4편의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다면 절벽을 날아다니는‘스턴트맨 이인정’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산악 인생만큼이나 인간 관계도 끈끈하고 다채롭다. 특히 동국대 산악부 20년 후배인 스타 산악인 박영석의 오늘이 있기까지 이 회장의 후원은 덕담을 초월한다. 이 회장은 마당발이다. 그의 발은 등산계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고(故)손기정, 황영조가 그의 양아버지, 양아들이다. 또한 양궁 이은경, 스키 유혜민과도 양딸처럼 지낸다. 월간 ‘사람과 산’ 회장, 한국등산학교 교장, 한국산악회 자문위원, 아시아 산악연맹 사무총장 등 굵직한 13개에 이르는 현직 직함만 봐도 그의 마당발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생업은 지난 88년에 창업한 (주)태인이다. 청주에 본사가 있는 (주)태인은 누전 차단기와 반도체 핵심 부품 제조 업체로 매출 규모가 연 150억원에 달하는 기업이다. 사업가로서 성공의 이면에 등산가 이인정이 있었고, 산악인으로서 성공의 이면에는 사업가 이인정이 있는 셈.

사실 이 회장은 여러 직함 중 5년째 교장으로 있는 도봉산 마루의 한국등산학교에 특히나 애착이 깊다. 무엇보다, 떠올리기 괴롭지만 산악인들의 죽음을 숱하게 봐 온 탓이다. 이 회장은 “등반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때론 자기밖에 없는 외로운 스포츠인 까닭에 비상 대처 능력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등산 학교는 무엇보다 산에서 살아 남는 법을 가르친다. 31년째 명맥을 유지해 온 등산 학교는 대학생, 대기업 사장 등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비상 사태 대처, 독도법, 기상학, 암벽 등반 기술 등을 교육한다. 학교는 주말 1박 2일 6주간 코스로 운영, 참가비는 올해부터 30만원.

금강산서 등반교실, 남북 산악인 교류 물꼬
이 회장은 “등반에 꼭 필요한 기술도 배우지만, 산이 인간의 가장 큰 스승임을 깨닫는 기회를 갖는 시간”을 등산학교가 제공하는 값진 보너스라 여긴다. 그는 나아가 “요즘 학교 폭력으로 떠들썩한데, 문제 해결의 길은 자연을 배우고 경외하는 교육에 있다”고 전제한 뒤, 산악연맹이 주도해 등산 교육을 학교 교과 과정 속에 편입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등산학교는 또 지난해 금강산에서 1주일간 설벽, 빙벽 등반 교실을 열어 북한 산악인과의 교류를 위한 물꼬를 텄다. 그를 위해 남북 산악인이 우리 국토의 명산을 두루 등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작정이다.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이 회장으로선 설명하기 껄끄러웠을 ‘산악회 반목’ 이야기를 꺼냈다. 대한산악연맹 수장이 된 이 회장이 그 묵은 갈등을 해소한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골수 한국산악회 출신으로 한국산악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이후 라이벌인 대한산악연맹 부회장, 결국엔 첫 산악인 출신 산악연맹 회장까지 된 이력에서 벌써 감을 잡을 수 있다.

한국 산악회의 양대 산맥인 한국산악회와 대한산악연맹과의 오랜 갈등은 일반인에게도 꽤 알려진 사실이다. 혹자는 두 산악단체의 묵은 감정대립을 한때 영ㆍ호남 지역감정에 비견하곤 했다. 또 두 단체장이 한자리에 앉는 것은 남북정상 회동 만큼이나 어렵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가 대한산악연맹 신임회장으로 취임할 때 그 어려운 자리도 성사됐다. 한국산악회가 축사까지 맡아준 것. 그는 양대 계파를 아우르는 산악 지도자가 됐다. 못 말리는 친화력과 순수한 정성이 정상에 우뚝 선 ‘산악인 이인정’의 로프였다.

이 회장은 산악회 반목 역사에 대해 “양 단체의 갈등의 직접적 계기는 19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 사과와 책임 소재 싸움이었다”고 밝힌다. 사실 태동 단계부터 두 단체를 이끈 인맥들은 꽤 다른 산행 철학을 가졌었다.

형님 뻘인 한국산악회(언론인 홍종인, 시인 이은상, 국어학자 이숭녕 씨가 역대 회장)는 아카데믹한 엘리트주의를 추구하는 순수파였던 반면, 박정희 정권의 탄생과 궤를 같이해 출범한 대한산악연맹은 현실적인 힘의 논리를 수용한 실용파로 평가된다. 또 1966년 정부 산하 법인으로 출발한 대한산악연맹과 달리, 한국산악회는 80년대 초 산림청 산하 법인으로 등록했다.

산악계 양대 산맥 울타리를 허물다
등반계 양대 산맥의 반목은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까지 해외원정대의 여행 허가 추천권을 둘러싸고 더욱 심해졌다. 혹자는 양측의 경쟁 심리 탓에 한국의 등반이 어쩌면 세계인도 깜작 놀란 용감한(?) 등반 성적을 이룬 배경이란 설명도 한다. 하여튼 이러한 대립은 90년대 초반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불렀다.

그러나 이 회장이 1988년 대학산악연맹 회장을 맡고 부터는 변화의 봄바람이 불었다. 그는 산악계 양대 산맥 울타리를 뛰어 넘으며 ‘원로 산악인과 함깹?遮?모임을 주도해 10년의 공을 들였다. 뿌린 만큼 거둔다 했던가. 점차 이 회장의 친화력은 수 십년 묵은 반목과 갈등을 녹였고, 결국 산악계의 오랜 냉전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골수 한국산악회 출신인 그는 지금 대한산악연맹 수장으로 초계파 산악 지도자가 된 것이다.

이 회장 가족에는 또 한명의 유명인이 있다. 지난해 재벌 3세가 비운동권 총학생회장(한양대)이 돼 화제가 된 그의 둘째 아들 상현(28) 씨 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 이야기에 이르자 그의 목소리 톤이 한 옥타브 올라간다. 결론은 아들의 도전도 등산가의 도전을 닮았다는 것.

인터뷰가 끝날 무렵, 으레 등산가가 짊어지는 물음을 던졌다. “왜 산에 오르십니까?”

“우선 습관 탓에 오릅니다, 다녀 오면 앓던 잔병도 사라지고…” 그의 응수는 우선 실용적이다. 평생을 산을 탄 그의 깨달음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정복’이란 단어 보다 ‘등정’이란 말을 굳이 권하는 까닭이다.

요즘처럼 바빠도 휴일이면 어김없이 그의 발은 바위를 딛고, 손은 로프를 잡고 있다. 특히 봄 산의 유혹은 뿌리칠 수 없다나….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4-07 14:23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