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사모펀드 가능성 충분 글로벌 금융으로 키울 것"'잘 나가던' 경제관료의 변신…시장 무궁무진, 해외진출 계획도

[한국 초대석] 보고펀드 변양호 대표
"토종 사모펀드 가능성 충분 글로벌 금융으로 키울 것"
'잘 나가던' 경제관료의 변신…시장 무궁무진, 해외진출 계획도


4개월 가량 전의 일이다. 변양호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현 보고펀드 대표)의 휴대폰이 몇 번 진동했다. 30대 중반의 후배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방금 사임 의사를 밝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앞으로 더 멋있는 일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이 메시지를 본 순간, 변 원장은 가볍게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그것도 멋있게.” 국내 대표적인 토종 펀드인 ‘보고 펀드’가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변 보고펀드 대표를 말할 때 항상 따라붙는 것이 ‘잘 나가는’이라는 수식어다. 미국 북(北)일리노이주립대 경제학 박사인 그는 경제 관료로서 누구보다 앞서 나갔다. 예전 재무부 이재국장에 해당하는, 핵심 중의 핵심인 금융정책국장을 2년 10개월이나 장기 집권했다.

이재국장을 포함해 역대 최장수로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기록이다. 그 하나만을 봐도 그가 얼마나 ‘잘 나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외환위기 직후부터 외채 협상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부실 기업의 구조조정 및 매각 작업에도 참여했다. 금융정책국장 시절 휴가 때 월 스트리트를 방문해 투자자들에게 우리 경제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휴가와 일이 구분이 없을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2001년 월 스트리트저널이 선정한 ‘세계 경제를 이끌 15인’에 꼽히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그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이 같은 평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요란하게 앞장 서 끌고 가기 보다는 조용히 실속을 챙기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돌연 사퇴 의사를 밝혔으니 주위에서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외국 자본이 국내 기업이나 부동산 등을 마구 잡아먹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피땀 흘려 쌓은 부를 헐 값에 넘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공직을 떠났고, 사모펀드를 만들었다. 우선은 외국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잘 나갈 때 그만 둬야 떳떳하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펀드 이름은 '장보고'에서
1997년 말부터 시작한 국제통화기금(IMF) 체제가 우리 경제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치열한 경제 전쟁에서 다국적군을 상대로 처음에는 소대장으로, 점차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으로 싸웠다. 전쟁 초반에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밀렸다. 전혀 싸울 태세가 되어있지 않았던 데다, 변변치 못한 무기도 그나마 무장해제를 당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만해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정신도 차렸고, 실탄도 넉넉히 비축했다. 이제 다시 싸울 만 하다.

“절대로 갑자기 그만둔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검토했습니다. 외국계 자본과의 싸움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까지 외국계 자본이 활개를 친 것은 외환위기 직후 우리에게는 돈도, 사람도,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더구나 당시 우리는 너무 급했다. 한 푼의 외화가 아쉬웠다. 그러다 보니 싸게 팔 수 밖에 없었다. 세일도 대폭 세일을 한 셈이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7년,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아직도 외국계 자본이 큰 힘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의 경쟁력도 만만치 않을 정도로 높아졌다. 한국 시장을 가장 잘 알고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한국 사람이다. 또 시중 유동자금은 수백 조원에 이를 정도로 풍부하다. 경험 역시 일천하지가 않다.

“보고 펀드는 ‘드림 팀’입니다. 사모펀드가 필요로 하는 전문가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변 대표는 자신 있게 말한다. 공동 대표인 이재우 전 리먼브러더스 서울지점 대표는 외환위기 직후 외국계 사모펀드 설립을 주도하는 등 국내에 사모펀드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보고투자자문사 대표인 신재하 모건스탠리 서울지점 전무 겸 투자은행 부분 대표는 국내 최고의 인수ㆍ합병(M&A) 전문가다.

조흥ㆍ외환은행과 한국투자증권 매각 등을 성사시켰다. 전 직장이 이들의 사직서를 한 동안 안 받아줬을 정도다. 보고 펀드의 3인방인 이들을 한데 묶은 것은 IMF다.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로 IMF 체제에 진입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보고 펀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보고 펀드의 ‘보고’는 장보고에서 따왔다. 장보고는 9세기 동아시아를 장악한 해상왕이다. 얼마 전 끝난 TV 드라마 ‘해신’의 주인공이다. 김성훈 전 중앙대 총장 등의 해석에 따르면 ‘보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중국 측은 백의 민족 보호자로, 일본 측은 재물 많은 부자로 봤다.

장보고는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잡혀가 중국에 노예로 팔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해적들을 완전 소탕했으며, 중국과 일본을 잇는 삼각 무역을 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요즘 말로 하면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철저한 개방론자인 것이다. 글로벌한 시각에 열린 마음을 가진 인물이다. 펀드 이름을 ‘보고’라고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영문 표기에 있어서의 에피소드 한 토막. 세계 유명 기업들의 영문 이름은 4글자가 많다. SONY, CITI, FORD 등 그 예는 무수하다. 보고도 마찬가지인데, 처음에는 BOGO라고 했다. 그랬더니 알고 지내는 외국인이 BOGO에는 ‘하나를 사면 하나는 무료로 준다’(Buy One Get One Free)라는 뜻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VOGO로 바꿨다. V는 승리(Victory)를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글로벌 플레이어입니다. 보고 펀드가 토종인 것은 맞습니다. 사람과 돈이 모두 ‘국산’이니까요. 하지만 일은 철저히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를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기업에 비유하자면 삼성전자라고 할 수 있겠죠. 삼성전자를 누가 토종기업이라고 합니까. 말 그대로 글로벌 기업입니다. 보고 펀드는 ‘금융의 삼성전자’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글로벌화 지향, '금융의 삼성전자' 목표
사모펀드는 제한적이지 않을까.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사모펀드의 사업영역도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라고 물었더니 금방 ‘노(No)’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오히려 갈수록 확대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시장에 나온 기업만 대상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좋은 물건을 찾아 싼 가격에 사들이는 것이 진짜 전문가라는 것이다.

경쟁력이 높은 기업도 일시적으로 돈이 부족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은행을 찾기도 곤란하다. 그렇다면 그 기업은 망해야만 하는가. 바로 여기에 사모펀드가 할 일이 있다. 또 일생동안 중소기업을 경영해 훌륭한 회사로 키웠다. 그만 은퇴하고 싶은데, 아들은 회사에 뜻이 없다. 능력이 없거나, 어리거나 해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사모펀드에 회사를 맡기면, 펀드는 일정 기간 회사를 키운 후 경영자에게 다시 넘기거나 높은 가격에 판다.

이런 식으로 사모펀드의 시장은 계속 넓어진다. 1990년 후반부터 미국에서 두드러지고 있는 현상이다. 변 대표는 한 마디로 사모펀드는 거대한 트렌드라고 했다. 10여 년 전의 투자은행이 그랬듯이 최근에는 사모펀드라는 것이다. 주식이나 채권 투자와는 달리 투자대상 자체를 신중하게 선정할 수 있는데다 경영에 직접 참여하면서 투자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경제 민족주의 바람이 불면서 외국계 자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폭 넓게 제기되고 있다. 이들 자본은 우리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과실만을 빼먹고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이른바 국부 유출 논쟁이다.

보고 펀드에 대해 ‘토종’이 강조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토종을 내세우면 그냥 앉아서 이익을 볼 수도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변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외국 자본이나 외국 기업이라고 해서 다르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차별도, 혜택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요구되고 필요한 것은 공정한 경쟁이다.

그래서 외국계 펀드에 대한 세무조사는 그 펀드의 개별 행동이 법에 위반되느냐의 여부를 따지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은 보고펀드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보고펀드도 해외진출을 계획하고 있고, 또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정부를 상대로 로비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가 공직을 떠나면서 한 말이 떠오른다. 그것을 실천하겠다는 강한 결의다.

보고 펀드는 현재 자금을 모으고 있다. 1조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소문이 맞느냐고 묻자 그냥 웃기만 한다. 표정을 봐서는 잘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끝내 대답을 들을 수 없다. 투자 대상에 대해 물어도 마찬가지다. 좋은 물건이 생각보다 많다는 대답 뿐이다. 무슨 비밀이 그렇?많은 것인지, 아마 그것이 사모펀드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몇 번을 물었지만, 끝내 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계 펀드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변 대표는 약간 화가 난 듯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자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 나가던’ 상태에서 그만 두었겠습니까.” 그러면서 덧붙였다. “우리가 실패하면 한국에서 사모펀드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투자를 안 하면 후회할 것입니다.”

<사모펀드>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ㆍ사모투자전문회사)는 개인이나 금융회사,기업과 같은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돈을 모아 실질적으로 기업을 매입한 후 가치를 높여 되팔아 수익을 올린다. 기업 장사인 셈이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뉴브리지, 론스타, 칼라일 등이 국내에 들어온 대표적 외국계 펀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말 국내 자본에 의한 사모펀드 설립이 허용됐다.


이상호 편집위원


입력시간 : 2005-06-08 17:09


이상호 편집위원 s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