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끄트머리에 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 제공해야"노블레스 오블리쥬 몸소 실천하는 '우리시대의 강한 어머니'

[한국 초대석] 사형수들의 대모 김혜원
"생의 끄트머리에 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 제공해야"
노블레스 오블리쥬 몸소 실천하는 '우리시대의 강한 어머니'


‘하루가 소중했던 사람들’(도솔_오두막에디션즈 발행)이라는 책을 발견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신문사에 배달된 신간들을 살피면서 이 책을 봤지만 그냥 지나쳤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내용이겠지’라고 생각했다. 종교를 앞세워, 독실한 신자임을 내세워,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적지 않은 까닭에서였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이들은 ‘남들이 다 보는 공공 장소에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 그런 사람들과 별 다름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문득 책의 띠가 눈에 들어왔다. 띠에는 ‘사형수들과 그들의 큰 누님이 30년 동안 나누었던 사랑의 기록. 가느다란 희망의 줄이 되고자 나섰는데 오히려 그들이 내게 희망의 동아줄이 되어 주었다’라고 쓰여 있다. 정년,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아주 희박해졌기 때문인지 30년이라는 말에 우선 관심이 갔다. ‘참 긴 세월이구나’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희망의 동아줄이 되어 주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왜 저자는 3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사형수들과 사랑을 나눴고, 이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책을 펼쳤다. 습관대로 저자의 약력과 서문, 후기 등을 먼저 읽었다. 저자나 출판사에게는 죄송하지만, 그 정도면 대략 책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후기에 해당하는 ‘글을 끝맺으며’에서 한참을 멈추었다. 저자는 결국 범죄는 사회가 저지르는 것이며, 때문에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를 강조했다. 범죄 예방은 철저한 치안확보는 물론 분배를 보다 공정하게 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촘촘한 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제도적 노력이 우선될 때 가능하다고 했다.

또 범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가정, 시대, 시대적 환경의 산물 뿐이라고 규정했다.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부익부 빈익빈 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나약한 그들을 제도적 희생양이라고 봤다. 이쯤에서 종교계도 거론했다. 종교인들은 교세 확장이 아닌 나눔과 섬김의 문화를 확산하는 일에 치중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을 두는 요즘 종교계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저자가 기독교인이기에 이런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 서다 보니 노블레스 오블리쥬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그 낙오자들을 돕는 일은 자선이 아니라 자구책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두 계층간의 극심한 차이는 사회적 갈등을 불러오고 그 결과는 범죄라는 위험에 우리 모두를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돈이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명예가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날 중산층 사람들은 돈은 물론 배운 것, 재능, 시간, 체력 등 모든 것을 못 가진 이웃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어찌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처세술인 것이다. 책을 기획하고 편집한 곳이 강원 원주에 있다는 점도 알게 모르게 마음을 끌었다. 책을 살피면서 출판사가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상태에서 원주라는 지역이 갖는 선입견에서 그랬을까. 확실히 모르겠지만 여하튼 책에 한 번 더 눈길을 준 건 사실이다.

갑자기 직접 저자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신청했고, 만났다. 처?보는 순간, 김혜원 씨는 말 그대로 70세의 평범한 노인 할머니, 그 자체였다. 151cm의 키에 몸무게 40kg. ‘훅 불면 날라가 버릴 것 같은’ 그런 체구였다.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한 후배는 ‘깡마른 몸에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 벚꽃 잎이 바람에 날리는 듯’하다고 묘사했다. ‘이렇게 연약한 여자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이를 눈치 챈 김 씨는 “얼굴이 길어 대부분 사람들이 사진만 보면 당당한 체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범죄는 사회가 만드는 필연의 결과
김 씨는 책에 있는 말을 그대로 되풀이 했다. 하지만 그냥 외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몸에 밴 것들을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목소리는 낮고 나긋나긋했지만, 거침이 없었고 신념에 가득 차 있었다. “범죄자들이요? 한 마디로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결과일 따름이에요. 사형수들도 마찬가지구요. 좋은 부모 만났으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이 됐겠죠.” 마치 대학 신입생 시절 독서 클럽이나 수련회 등에서 선배들에게서 들었던 말을 다시 듣는 것 같았다. 김 씨의 말은 머리 속에서, 책상 위에서 짜낸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산물이라는 점이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더욱 분명해졌다.

1975년 10월9일. 조간들은 9차례 범행에서 17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범 김대두의 체포 소식을 일제히 1면에 크게 실었다. 이를 본 김 씨는 남편에게 물었다. “나 시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해?” 김대두와 남편은 고향이 같다. “그럼 회개하도록 당신이 전도하면 되잖아.” 남편은 이 말을 던지고 출근했다. 이 한 마디에 ‘아무 희망도 없는 한 생명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값 진 인생이겠느냐”는 어느 목사의 말이 겹쳤다.

“그를 새사람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나도 긴가민가하는 하느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그러자 두려움이 없어졌고, 며칠을 그냥 기도했어요.” 그러다 마침내 어느 겨울 추운 밤 김대두에게 편지를 썼다. 그에게서 응답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10여 일만에 답장이 왔다. 그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다. 죄를 후회하고, 용서를 빌고, 고독을 호소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이 답장이 김 씨를 반평생 교도소에 잡아두는 질기디 질긴 끈이 됐다.

그 후 그는 20 여명의 사형수를 만나고 떠나 보내는 대모 노릇을 해왔다. 그가 만난 사형수들은 그야말로 흉악범 들이다. 김대두를 비롯해 노름 빚을 갚기 위해 어린 제자를 유괴 살해한 교사, 자기 집 앞마당에 시체들을 암매장한 파렴치범, 가정 파괴범, 남편 청부 살인범 등이다. 여기에 간첩도 포함된다.

검사 출신의 변호사인 남편에, 건강한 네 자매를 두고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누리는,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나와 고교 교사를 했던 그가 왜 이 일에 뛰어들었을까가 궁금했다. 스스로 고백하듯 그는 유치원 때부터 대학까지 반듯한 모범생이었고, 사랑 넘치는 어머니라기보다 엄격하고 차가운 어머니였다.

그는 대뜸 이 일을 시작하기 전 자신을 억누르던 질병과 관계있다고 답했다. 셋째를 낳고 육아 부담으로 교사를 그만뒀다. 그러자 ‘주부 우울증’ 같은 것이 엄습했다. “내 인생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남편 뒷바라지가 전부인가…. 그렇게 지독한 허무감에 몸서리쳤던 시절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이를 벗어나고자 성경에 매달렸고, 그때 김대두가 나타났다.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은 시작됐지만, 결과는 엄청나다. 마치 눈덩이 구르듯 교도소 안팎에서 반응이 컸다.

사형수에게 희망을 주어야
그가 사형제 폐지를 부르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흉악한 사형수라도 결국은 회개하면서 속죄의 삶을 갈망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영원히 박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저자와 인연을 맺었던 사형수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김성만 씨 뿐이다. 사형수들이 삶에 대해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살고 싶다는 생존 욕구 때문만은 아니라고 김 씨는 말한다.

“과거를 참회하고 새롭게 눈 뜬 세상이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세상임을 알았기에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을 뿐 입니다.” 그러면서 장발장의 강퍅한 마음을 녹인 것은 가혹한 형별이 아니라 미리엘 신부의 이해와 사랑이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현장에서 얻은 경험의 외침이다.

문득 한 회사 후배가 입사 직후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느냐는 선배들 물음에 지금 이 순간이 불치병 환자가 그렇게 살고 싶어했던 마지막 날의 바로 다음날이라는 심정으로라고 대답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의 말은 아무렇지도 않은 하루의 소중함과,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르였母?생각케 한다.

그는 정신대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건립위원회 공동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정신대는 지도층 잘못으로 인한 역사의 희생자다. 억울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우리들 책임은 없는 것일까. 그들은 우리 할머니 대신 끌려갔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운 좋게 살아 남았거나 뒤 늦게 태어나 화를 면했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를 곰곰 따지니 그냥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인으로서 양성 평등 운동을 펼치는 여신학자 협의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것들도 어찌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다하자는 것일 게다.

그는 자식들이 환갑이라고 모아준 돈을 모두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교육관 건립 기금으로 내놓았다. 칠순에는 책을 냈다. 출판사 측은 그 나이에 그런 책을 출간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집 골목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절로 가는 이정표를 기독교 교인들이 뽑아 버리면 주워서 다시 그 자리에 꽂고 스님들에게 대신 용서를 빈다. 그런 그가 사형수들과의 만남에서 사회적 모순을, 계층간의 극심한 갈등을,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또 앞으로 제대로 할 것 같지도 않은 정부의 무능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멈출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앞으로 그는 사형제 폐지와 ‘범죄 피해자 구출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들어 그 피해에 대해 사회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치유하는 길을 모색하는 일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궁극적으로 그가 바라는 것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 사랑이 들풀처럼 퍼지는 세상이다. 자녀와 손주들을 그런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에서 지금까지 일을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그는 오늘 하루도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며 안락하게 보내고있는 우리들에게 ‘그럴 수만은 없지 않은가’라고 끊임없이 묻고 있다.


이상호 편집위원


입력시간 : 2005-06-22 19:46


이상호 편집위원 s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