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있는 죽음이 진정한 웰빙의 마무리"가치있는 죽음을 연구하는 '한국죽음학회' 초대회장

[한국 초대석]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
"품위있는 죽음이 진정한 웰빙의 마무리"
가치있는 죽음을 연구하는 '한국죽음학회' 초대회장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임박하면 목적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모리 슈워츠는 ‘모리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치 않는다. 자신에게도 언젠가는 닥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통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다. 그저 막연히 두려울 따름이다. ‘가족 등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하나’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이 끝일까.’ 이따금씩 생각을 해보지만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그냥 거기서 멈춰버린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일까.

"한국인은 삶에만 너무 집착"
얼마 전 ‘한국죽음학회’가 발족하고, 창립 기념 학술대회를 가졌다. 지금까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밝은 죽음을 준비하는 포럼’ 등이 있었지만 학회는 처음이다. 죽음도 연구해야 하는 가치가 있는 것이고, 나아가 학회가 될 수 있는 것일까. 학회 초대 회장을 맡은 이화여대 한국학과 최준식 교수(종교학)는 물론 그렇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서구에 비해 한 세대 정도 늦었다는 것이다. 학회에는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정재현 연세대 교수, 김성례 서강대 교수, 송위지 서울보건대 교수, 윤영호 국립 암센터 삶의 질 연구과장 등 20여명이 참여했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 한국인들은 죽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금기시하면서 외면 일변도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좀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삶이란 죽음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인데 한국인들은 삶에만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최 교수가 설명하는 학회 결성 이유다. 그래서 창립 학술대회의 주제를 ‘죽음, 그 의미와 현실- 한국적 맥락에서’로 정했다. 정진홍 교수는 학술대회 기조연설에서 죽음에 대해 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끝내 불안합니다. 그것은 수용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바로 이 언저리에서 죽음은 금기로 울이 쳐집니다. ‘차마 건드릴 수 없는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공연히 건드려 지레 겁을 먹기보다 닥칠 때 닥치더라도 지금은 피하고 싶어 그 금기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냥 머무를 수만은 없습니다. 가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만나 밝히는 것이 오히려 좋으리라는 생각이 또 다른 마음결입니다. 이 역설을 그대로 안고 죽음은 금기된 주제로, 금기로 치장된 현상으로 아득한 때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바로 여기서 ‘죽음’은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정 교수의 죽음학은 이어진다. “죽음학은 죽음을 분명한 인식의 객체로 정의하려는 것도, 죽음 현상을 의학적으로 기술하려는 것도, 죽음의 사회학을 말하려는 것도,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고백을 다듬어 간직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 경제 과학적인 죽음 담론의 개념과 논리, 그리고 담고있는 규범적인 가치,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울려 있는 우리의 죽음문화에 대한 되물음”이라고 했다.

이쯤 되면 죽음이라는 것이 어려운 이야기가 된다. 평소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유식한 사람만이 사유하는 그런 것이 되기가 쉽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살다가 죽을 것이지, 죽음에 대해 뭘 그렇게 의식하느냐는 면박을 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왜 죽음이 중요한 가,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가에 대해 다시 최 교수에게 물었다.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어 질문 했다. 그랬더니 최 교수는 웃긴다는 반응이었다.

잘 죽는 것이 더 중요
“요즈음 웰 빙(Well-being)이 유행이지요.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웰 다잉(Well-dying)이라는 것을 아나요. 웰 빙은 웰 다잉이 되어야 마침내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닐까요.” 최 교수는 너무 간단히 이야기했다. 한 마디로 잘 죽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기도 이렇게 힘든 데, 잘 죽는 것을 잊지 말라니. 듣는 사람이 약간 놀랄 정도다.

그렇다면 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죽어야 잘 죽었다는 말을 듣는가. 그리고 죽을 때 그런 말을 들었다고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음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죽음학회에서 정의하는 잘 죽는다는 것은 이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가운데 죽는 것이다. 길건 짧았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정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 편안한 마음으로 숨을 거두는 것이다. 좀 고상한 말로 하면 ‘품위 있는 죽음’이다.

최 교수는 병원 중환자실을 이야기했다. 이름있다는 병원은 영안실로 말을 한다고 했듯이, 적지 않은 경우 병원에서 장례를 치른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최 교수의 옥타브가 높아졌다. “병원 중환자실을 보십시오. 전혀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판정을 받아도 삶을 정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무 쓸모없는 치료에만 매달립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라는 마음에서 무턱대고 아무 것이나 붙잡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낭비하다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나름대로 어려운 인생을 잘 살아왔는데, 죽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제대로 이별을 못한다니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마지막에 쏟아 부은 돈은 또 얼마나 됩니까. 살아남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빚이 됩니다.”

이런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기 위해 학회를 만들었다고 최 교수는 재차 강조한다. 그는 ‘근사(近死) 체험’에 대해 여러 차례 말했다. 간단히 말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최 교수가 깊이 빠져있는 분야다. 어쨌든 지금까지 인류가 죽음을 직접적이고 객관적으로 경험한 적은 없다. 종교에 의해 윤색된 사후 세계만을 보아왔을 뿐이다. 근대에 와서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더욱 미신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근사 체험 경험자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말하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정도가 됐다. 증거가 너무 많다는 것이 최 교수의 이야기다.

믿거나 말거나 지만, 보통 근사 체험자들은 죽은 뒤의 세상의 모습이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죽은 뒤의 세상을 묘사하는 것은 3차원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가지고 4차원에 대해 설명하는 것 같다고 했다. 또 저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 이승의 아름다움을 훨씬 능가할 뿐 아니라 지상의 언어로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할 길이 없다고도 한다.

좀 더 최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근사 체험자들은 몇 단계를 거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첫번째는 체외 이탈이다. 어떤 사람의 의식(또는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 자신이나 주위의 사람들을 허공에서 바라보는 체험을 말한다. 두 번째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터널 체험이다. 영혼은 몸을 빠져 나와 아주 어두운 굴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곧 그 굴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체험이다. 그런데 그 터널은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터널의 끝은 아주 환한 빛이다. 영혼은 그 빛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는데 그 빛에 가까이 갈수록 그 빛은 커진다.

영혼이 터널을 통과하면 그 영혼은 매우 밝고 색깔이 영롱한 세계에 도착하는데, 이것이 저승의 문턱이다. 이곳에서 영혼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지극히 편안한 감정을 만끽하면서 자신이 죽어서 저승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은 영적인 안내자로 생각되는 존재, 즉 빛의 존재와의 만남이다. 이 존재는 말할 수 없이 큰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어, 이 존재를 만날 때 영혼들은 조건 없는 큰 사랑을 느낀다.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온 다음에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이런 사랑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을 영상으로 돌아보게 된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자신의 일생이 아주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것을 보면서 모든 일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고 거기에는 항상 의미가 있는데 생전에는 파악하지 못하다가 이때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죽었다 살아나며 배우는 인생의 지혜
근사 체험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다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근사 체험자들은 삶이 즉시 변화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달라진다.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과 그런 사랑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데에는 확실한 의미나 소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 조건 없는 사랑이다. 이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고 최 교수는 설명한다.

잘 살기 위해 잘 죽는 것을 생각하자는 것이 죽음학회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죽음은 무엇인지, 사후 세계가 어떤 것인지는 죽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을, 그것도 웰 다잉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죽음학회는 계속 외치고 있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더욱 너그러워지고, 사랑을 하게 되고, 세속적인 것들에서 좀 더 초연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죽음학회의 존재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최 교수와 인터뷰 하는 동안 내내 에리히 케스트너라는 독일 작가가 생각났다. 그의 ‘두 가지 계율’이라는 짧은 시다.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때가 오면 자랑스럽게 물러나라/ 한번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제 1의 계율이고/ 한번만 살 수 있다/ 그것이 제 2의 계율이다>


이상호 편집위원


입력시간 : 2005-06-30 16:42


이상호 편집위원 s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