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절정을 붓질하듯…초월의 삶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화가 山丁 서세옥
인생의 절정을 붓질하듯…초월의 삶

“한 평생 절대 해방, 절대 자유를 좇은 게 되레 평생의 짐짝이 되는 역설, 이게 나의 예술이고 삶 같아.”

산정(山丁) 서세옥(76). 그는 달성 서(徐)씨 문중으로, 1929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세 때인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꽃장수’로 국무총리상, 55년 26세의 나이로 서울대 교수, 32세에 국전 심사위원이 됐다. 이후 50년 가까이 길러낸 제자만 1,000명은 족히 된다. 그러나 그는 권력 이전에 언제나 전위적 화가였다.

한국화에 형이상학적 추상의 길을 개척한 실험정신 앞에서 그의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옹색하다. 추상, 구상 심지어 동양과 서양의 경계조차 덧없다.

사람 키만한 큰 붓을 잡고 일필휘지로 사람 인(人)자만을 무수히 그려낸 ‘춤추는 사람들’ 같은 대작들을 보노라면 그를 무어라 분질러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1만권의 책을 읽은 해박함 때문인지 평단에선 ‘이 시대의 마지막 문인화가’ 등 숱한 이름을 붙이지만, 그는 그저 ‘화가 서세옥’이 당당하다고 말한다.

지금 그의 50여년 화업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로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터 잡은 지 40여년째인 그의 성북동 집을 12일 찾았다.

객을 압도하는 솟을대문을 밀고 들어가니 마당을 온통 덮은 새파란 이끼가 우선 문 안팎의 풍경을 갈라 놓는다. 돌과 소나무, 대나무 숲으로 벽을 치고 고즈넉이 자리잡은 한옥은 한 폭의 동양화다.

산정의 한옥은 경복궁 경회루 공사에 참가했던 목수가 전통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목수는 이 집을 짓고 인간문화재가 됐다. 뒤뜰로 들어서자 낮선 쇠솟들이며 큰 화분에서 피운 연꽃, 마당에 핀 추국 몇 송이가 반긴다. 주인의 것인 듯 섬돌 위 가지런히 놓인 보라빛 고무신이 정겹다. 쪽마루에 함께 걸 터 앉아 산정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시·전각분야서도 경지에 다다른 대가

“모처럼 전시회를 열었는데…”라며 기자가 말문을 터자 손사래를 치며 웃는다. 개최 중인 전시회를 두고 ‘개인전 4번을 연 게 전부인 베일에 가린 화가’ 등의 보도는 모두 잘못이라는 얘기다.

그는 지금껏 개인전 20여회, 그룹전 1,000여회를 개최했다는 것이다. 대가 운운하면서 그렇게 엉터리 보도를 하는 게 우리 문화의 수준이라고 질타할 땐 물끄러미 딴 곳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산정은 한국 이상으로 외국에 잘 알려진 화가다. 특히 20대와 30대에 그린 ‘괜찮다’ 싶은 작품들은 거의가 당시 바깥으로 팔려갔다. 국내의 미술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우리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산정은 그림뿐 아니라 글(한시)과 전각(篆刻)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에게 또한 이것들은 하나다. 붓으로 그리기와 쓰기, 칼로 새기는 작업은 쾌감의 차이일 뿐 모두 조형의 방법이란 점에서 동격이다.

말년에 전각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좁은 공간에서 문자의 구속을 뛰어넘는 선과 여백의 색다른 경지 때문이다. 또한 화제(畵題ㆍ그림 위에 쓰는 시문)로 쓰는 글 역시 회화의 경지를 보다 넓히는 ‘동양의 지혜’라고 평한다. ‘그리고, 쓰고, 도장을 찍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루는 삼위일체’라는 설명이다.

가벼운 치통 탓에 간간이 말을 끊는 그에게 뜰에 핀 들국화며 연꽃으로 이야기를 돌리자 산정의 얼굴엔 서서히 미소가 감돈다.

그는 “봄기운이 돌 때 아양 떨 듯 피는 꽃들은 좋아하지 않는다”며 소나무, 대나무, 추국 등 좀체 자기 색을 바꾸지 않는 것들이 마당에 자리잡은 연유를 설명한다.

특히 화분에서 피워낸 연꽃은 그만의 특별한 기술이다. 왜 연꽃이냐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꽃 필 때 직접 보면 안다. 왜 좋은지”라고 잘라 말했다. 말로 담을 수 없는 게 많다는 화가의 직관 같다.

정원 가꾸기의 미학에 대해 열강을 하던 산정에게 슬그머니 가족사로 화제를 뭏??표정이며 목소리가 근엄해진다. 그의 부친은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된 개화파 독립운동가 서장환(1970년 작고) 이다.

부친은 달성군 일대의 드넓은 농토를 팔아 독립군의 무장항쟁을 준비하고 자금을 댔다. 산정은 이를 가리켜 ‘장(杖)의 파가(罷家)’라고 했다.

대의를 위해 처자와 집안을 돌보지 않았던 선비 서장환을 기억한다. 그래도 원망은 없다. 그만큼 부친의 곧은 선비 정신은 그에게 바꿀 수 없는 유산이 됐다.

부친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가장 큰 유산

자식들도 웬만큼 키웠다. 구미를 주무대로 한창 각광 받고 있는 조형ㆍ설치 미술가 서도호(43)가 그의 큰아들이다. 또 둘째 을호(41) 역시 미국에서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아들만 둘인 산정은 미술사를 전공한 부인 정민자씨와 함께 예술가족을 이룬 셈이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도 자연스럽게 예술 토론장이 된다며 흡족해 한다.

최근 미술품 진위를 둘러싼 소란에 대해 물었더니 산정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사례를 소개한다. “조선 말 추사 생전에도 그의 작품이라며 시중에 나 돈 것의 70%가 위작이었다”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술품을 돈으로 먼저 생각하는 세태가 판치는 한 위작 시비는 끊이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그는 소리를 제대로 못 듣는 이를 음치라 하듯, 미술품의 위작 여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안치’라고 밖에 할 수 없다고 했다. 무릇 작품을 소장하려면 그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모방된 것은 ‘아우라(진품에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가 없다. 특히 산정이 ‘바람 불고 천둥소리 일어나듯’ 이라고 자평한 휘몰아치는 그의 붓질을 누가 감히 흉내낼 수 있으며, 알아보지 못할 것인가.

그는 말이 나온 김에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 또 하나의 일화를 소개했다. 산정이 20세 때 국전 최고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이자 등단작인 ‘꽃장수’는 현재 원작은 전해지지 않고 도판만 남아있다.

표구를 맡겼는데 표구점 주인이 잊어버렸다고 딱 잡아떼는 바람에 여태 그냥 두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추궁해 본들…” 하며 선생은 웃고 만다. 작품이 살아있으면 됐다는 식이다. 선생의 방식이다.

산정을 잘 아는 한 비평가가 그의 작품세계를 거두절미하고 ‘서세옥적(的)이다’라고 평했다. 그는 이를 최고의 찬사로 받아들인다.

희수(77세)에도 여전히 정정한 목소리와 맑은 눈동자를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임중도원(任重道遠)’(운명의 짐짝은 무거운데 갈 길은 멀다)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늙을 새도 없었다는 뜻일 터이다.


조신차장


입력시간 : 2005-10-18 17:16


조신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