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중 미래 숲 가꾸는 영원한 외교관

“우선 차 한잔 하시죠. 이 평범한 찻잔이 중세 동서양을 이어준 하이테크의 상징입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다완(茶碗) 전쟁’,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탐했어요.

임란 때 일본에 잡혀간 조선의 도공들이 만든 찻사발이 바로 일본의 최고 국보로, 관직까지 하사 받은 ‘이도(井戶)다완’ 입니다.

조선에서 건너간 도자기 기술은 나중에 일본국부의 원천이 됐어요. 여기 제 찻잔도 임란 때 도공들이 숱하게 잡혀갔던 하동의 가마에서 지인들과 함께 직접 구워낸 것 입니다.”

굵직한 한국현대사의 막후 주역

자리에 앉자 거두절미하고 차 한잔을 따르며 다완 이야기부터 꺼내는 온화한 미소의 은발의 노신사. 한ㆍ중수교, 남북정상회담 등 굵직한 한국 현대사의 막후 주역이었던 권병현(67) 전 주중대사다. 본론에 앞서 날씨 등 가벼운 화제로 대화를 풀어가는 것이 외교관답다.

그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 한가운데서 37년간 외교 일선을 지켰다. 2일 그가 대표로 있는 ‘한ㆍ중 문화청소년중심(한ㆍ중 미래숲ㆍwww.futureforest.org)’ 센터가 자리잡은 서울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 빌딩 내 사무실을 찾았다.

권 전 대사는 요즘 한ㆍ중 청소년문화ㆍ환경 협력에 푹 빠져있다. 그는 주중대사,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뒤 ‘한국과 중국은 환경 공동운명체’란 기치아래 환경단체를 이끌고 있다.

중국 북부지역의 급격한 사막화를 막기 위한 민간차원의 국제협력 활동이다. 그는 양국 대학생들을 이끌고 매년 중국 서부 사막지역의 시안과 간쑤성의 란저우, 베이징 순으로 옮겨 다니며 나무심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10년, 20년 뒤 양국 학생이 심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을 이룰 때면 각계 지도자가 돼 한ㆍ중 관계를 잘 이끌어가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미래숲 만들기는 그가 1998년 주중대사로 부임했을 때 베이징의 끔찍한 황사가 다음날이면 서울을 덮친다는 사실에 ‘이게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라며 시작한 일이다.

그는 주중대사 시절부터 현지에서 나무심기 캠페인을 벌였다. 중국 정부는 처음 외국의 환경문제 제기를 삐딱하게 보는 면도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권 전 대사의 선구적 활동에 감사한다.

이런 노력으로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방문했을 때 발표한 공동성명에 ‘사막화 방지를 위해 한ㆍ중 양국이 협력한다’는 구절을 넣기도 했다.

2000년 귀국 때는 주룽지(朱鎔基) 당시 총리를 면담한 자리에서 “중국의 사막화를 지금 손쓰지 않으면 멀지 않은 미래에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직설적으로 건의, 이후 중국당국의 환경 정책 수립에 일조했다.

2000년 말 중국 정부가 급속한 사막화를 막으려 내놓은 정책인 산림의 경작지화를 막는 ‘퇴경환림(退耕還林)’, 과도한 가축의 방목이 부르는 초원의 황폐화에 제동을 건 ‘퇴목환초(退牧還草)’ 등이 그 성과다.

권 전 대사의 숲에 대한 애정은 고향 땅 하동에 대한 향수인지도 모른다. 세련된 국제신사 권 전 대사의 이력을 살펴보면 사실 지독한 ‘촌놈’이다.

그의 고향은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진교리다. 뒤로는 지리산이 자리하고 옆으로는 섬진강이 휘돌아 나가는 벽촌이다. 임란 전부터 분청사기를 굽는 사기마을이기도 했다.

그는 거기서 초등학교, 중학교와 아버지가 세운 고등학교(진교농업고등학교)까지 나왔다. 대처(大處)를 구경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다.

그가 농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 것은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또 1962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거의 독학하다시피해서 서울법대에 들어간 것에 비하면 고등고시 수석합격은 별것 아니었다.” 그가 요약한 ‘촌구석 수재의 상경기’다.

사진=김지곤 기자

권 전 대사의 외교활동 주무대는 동아시아 지역이었다. 1975년 외무부 중국과장, 1976~78년 주일대사관 정무과장, 그 후 1981년까지 본부 일본과장을 맡았다.

특히 주일대사관 정무과장을 맡을 당시는 ‘김대중 납치사건’ ‘육영수여사 저격사건’ 등 한ㆍ일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험악했던 시절이었다.

그 때 일본은 한국의 고위직 외교관엔 문을 걸어 잠그고 과장급 수준의 교섭만 고집했다. 그래서 권 정무과장은 당시 일본이 상대해 준 유일한 외교관이었다.

또 외교적 불화를 빌미로 일본은 한국과의 외교에서 자국어만 사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권 전 대사는 당시 일본어를 전혀 못했다. 큰일이었다.

당장 김영선 주일대사로부터 3개월 내 일본어로 협상하라는 특명이 떨어졌고 그는 정말 죽을 고생으로 일본어를 익혔다. 결국 그는 과장으로 있으면서 한ㆍ일 대륙붕협정을 매듭지었고 관계정상화도 이뤘다.

한중수교·남북 정상회담 물꼬

권 전 대사의 외교관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1992년 한ㆍ중 수교 실무교섭 대표단장으로 활동할 때다. 한ㆍ중수교는 극비에 부쳐져 진행됐다. 마치 첩보전 같았다.

작전명은 ‘동해’. 국내 실무작전실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 내자호텔이었다. 한ㆍ중수교 교섭은 당시 외무부 내에서도 이상옥 외무장관과 김석우 아주국장 정도만 알고 있는 정도였다.

팀원으로 스카우트한 신정선 과장 경우는 병원에 입원시킨 후 빼돌려 팀에 합류시킬 만큼 철통보안을 유지했다. 북한은 물론 대만 등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이 큰 극도로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1, 2차 비밀회담은 중국 베이징의 다오위타이(釣漁臺)에서, 3차 비밀회담은 서울 워커힐 VIP룸에서 열렸다. 그렇게 양국을 오가며 밀고 당기기를 수 차례. 결국 그 해 6월 말 권 전 대사는 중국 장시지에(張瑞傑) 외교부 본부대사와 수교 초안을 작성했다.

8월24일 한ㆍ중 수교를 발표하기 한 달쯤 전인 7월15일 중국 첸지천(錢基琛) 외교부장이 북한 김일성 주석에 통보했다. 그 전에 북한에게 ‘한국은 중국 소련과 수교할 테니, 북한은 미국 일본과 하라’는 식의 협의가 있었다는 비사(秘史)도 전한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미국 등과의 수교에 실패했고, 우리는 한ㆍ중수교에 성공했다. 중국과의 수교로 서울 명동에 있던 대만 대사관 부지 5,000평(당시 시가 평당 1억원)을 중국측에 무상으로 넘겼다.

1975년 1월 권병현 전 대사가 외무부 중국과 과장 재직시절의 과원들. 왼쪽부터 이태식 주미대사. 이상면 서울법대 교수, 김재섭 주 러시아대사, 권 전 대사, 김하중 주중대사.

대만과는 단교했다. 우리 외무부는 대만 측에 미안함 마음에 수교 발표 1주일 전에야 대만에 통보했다. 한ㆍ중 수교의 막후 교섭 과정 하나 하나가 그야말로 숨막히는 역사의 순간이었다.

권 전 대사는 한ㆍ중수교의 상징으로 다오위타이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휘날리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는 “수교 당시만 해도 중국이 이처럼 급성장할지, 또 한ㆍ중 양국이 이렇게 가까워질지 짐작 못했다”며 “이는 과거 동양의 중심무대를 함께 누볐던 옛 주역이 다시 뭉친 역사의 복원”이라고 강조한다. 권 전 대사는 요즘 외교통상부의 공식 제의로 ‘한ㆍ중 수교 외교사’를 정리하고 있다.

다음 하이라이트는 밀사로 남북정상회담의 물꼬를 튼 일이다. 권 전 대사는 아직 공개하기엔 시간이 필요한 내용이라며 말을 아꼈지만,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그는 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첫 주중대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곧바로 남북관계정상화를 위한 특명을 받고 사실상 남북관계 전권대사 역할을 맡았다.

그 당시 강원 강릉 잠수함 사건으로 험악해진 남북 당국은 우선 경색을 푸는 게 급선무였고, 남북정상회담까지는 기대하지 못했다.

베이징 한국대사관은 남북대화를 위한 ‘주막집’ 같은 곳이 되었다. 한 동안 통로를 못 찾던 주중 대사관은 우여곡절 끝에 최수진(54) 흑룡강성 민족경제개발총공사 총사장과 선이 닿았다. 결국 최 총사장이 북한 측 메신저가 됐고, 권 대사-최 총사장이라는 남북 핫라인이 생겼다.

이 라인은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2004년 사망) 아태 부위원장과의 담판을 만든 사전 주역이었던 셈이다. ‘통일 소’를 보내며 금강산 관광사업을 따낸 현대그룹이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세간의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는 게 외교가 정설이다.

2002년 한국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유공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권병현의 이름은 여기에 없었다. 권 전 대사와 라인을 이뤘던 최 총사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권병현 대사를 주저앉히고 정상회담 업적을 빼돌렸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6자 회담’ ‘동북아 균형자론’ ‘김치 파동’ 등 근래 시끄러운 외교 논란들에 대해 묻자 그의 해법은 명쾌하다. “외교는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현실이 달라지면 외교는 따라가야 한다”고 정리한다. 무엇보다 이념보다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또 외교는 철저히 현실에 뿌리를 박고 상황마다 벌어지는 ‘전투’ 행위와 같다는 것이다. 그는 “외교에 있어서 중장기적 그랜드 디자인도 있어야 하지만, 작전지도 같은 ‘로드맵’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외교가 초당적이어야 한다는 것 역시 불문가지다.

그는 동북아에서 한국의 역할을 ‘균형자(Balancer)’보다 ‘미들 파워(Middle Power)’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최근 한ㆍ중ㆍ일이 모인 한 세미나에서 국수주의 위험이 있는 영토 문제와 과거사 문제에 대해 ‘모라토리엄 선언’를 제안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미들 파워’의 역할이라는 설명이다.

결국 찻잔의 미학에서 시작해 3시간을 넘긴 그의 이야기는 동북아 평화의 큰 화두로 마무리됐다.

그의 집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 등산로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다. 산이 좋아서다. 그래서 둘째 가라면 아쉬워할 정도로 북한산을 사랑하는 ‘산 지킴이’다. 슬하에 1남1녀를 뒀다. 아들 혁대(35)씨는 중국서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고, 딸 영아(33)씨는 미국에서 박사과정 중이다.

프로필

1963년 서울대 법대 졸업

1962년 고등고시 행정과 수석 합격

1965년 외무부 입부

1987년 버마에서 첫 대사직

1992년 외무부 본부대사

1994년 주 호주대사

1998년 주 중국대사

2000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현재 한ㆍ중문화청소년 미래숲 대표, 동북아연구원 원장,

한중경제발전협회 회장, 국제아동돕기연합 회장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