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 하는 무대 뒤의 정치 원로

“요즘 노 대통령을 보면 안쓰러워요. 뭘 좀 제안하면 다짜고짜 사방에서 공격부터 합니다. 당장 좀 시끄러운 문제라도 대통령으로서 나라의 장래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식자층에서 대통령을 불신하고 폄하하는 듯한 분위기가 문제입니다. 이럴 땐 대통령도 설득력을 높여야 하지만 청와대 참모들의 역량이 아쉬워요.”

국회의원 재임기간만 26년 8개월에 달했던 7선 정치인인 신상우(68) 전 국회부의장.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독대하는 몇 안 되는 원로 정치인 중의 한 명이다.

부산상고 선배로, 후원회장으로, 지난 대선 땐 민주당 선대위 상임고문으로, 해양수산부 장관 선임자로 노 대통령과 이런 저런 인연을 맺어 온 때문이다.

사실 그는 노 대통령이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2001년부터 본격적인 조언자 역할을 해 왔다. 그런 탓에 그는 요즘 사면초가 형국의 노 대통령의 변호인 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7일 오전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대통령에 대한 애정어린 걱정부터 털어놓는다.

“히든 카드까지 먼저 다 털어 놓지 말고, 이제 국민에게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는 형식을 취해야 해요. 총리와 나누는 분권형 통치가 아닌 대통령이 끝까지 책임지는 정치를 해야 합니다.”

한참 노 대통령에 대한 지상주문이 이어진 뒤 그의 이야기는 과거로 향한다.

“나나 노 대통령이나 늘 비주류였다는 점에서 공감대가 있었어요. 노 대통령이 해수부 장관할 때 가끔씩 봤는데 ‘선배님도 비주류인데 정치판 비주류 다 모아 한 판하자’고 말하곤 했어요. 그리고 2001년 부산 집회에서 그가 대권 출사표를 던졌어요. 그런데 그때 신문들은 기사 딱 한 줄 써 준 게 전부입니다. 그 집회에서 제가 첫번째 찬조 연설을 했습니다.”

짤막한 기사 한 줄에서 시작된 ‘우리사회 비주류들의 역전의 대선 드라마’ 출발점에서 그도 함께 한 셈이다. 그리고 대선 이후 신 전 부의장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있다가 불법 대선자금에 연루돼 구속 기소된 후 지난 8ㆍ15때 사면 복권됐다.

YS·DJ '병문안 전화' 이끌어

최근 신 전 부의장은 멋진 ‘작품’을 하나 만들어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DJ(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전화로 병문안을 한 일이다. 이 ‘병문안 전화’ 막후에 신 전 부의장이 있었다.

박지원 전 비서실장, 김상현ㆍ정대철 전 의원 등이 함께 나서 성사시킨 일이지만, 특히 신 전 부의장의 공이 컸다는 주변의 평이다.

신 전 부의장은 올 초 동교동에 신년하례를 갔을 때부터 DJ에 ‘YS와의 악수’를 건의하는 등 양측을 오가며 드린 공이 결실을 얻었다는 얘기다.

이번 일로 일각에서 ‘민주개혁세력의 대통합론의 서곡’이라는 등 섣부른 관측도 내놓지만, 영호남 정치세력의 수장이었던 YS와 DJ의 화해를 위한 단초를 제공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신 전 부의장은 “두 분이 이제 친하게 지내면 국민들도 좋아하지 않겠느냐”며 화해를 권유했다고 한다. 여기엔 노 대통령의 지역통합을 위한 대연정 화두도 한몫 했다.

신 전 부의장은 “YS는 개신교, DJ는 천주교 아니냐. 또 민주화 이후 노동자 목소리도 얼마나 높아졌냐”면서 “그러나 아직도 선거만 하면 종교도,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지역구도 앞에선 무색한 게 현실 아니냐”고 반문한다.

결국 지역구도 정치의 심화에 도의적 책임이 있는 두 사람이 이제 화해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신 전 부의장의 고향은 경상남도 양산이다. 그의 가족은 일찍이 부산에 와 터를 잡았다. 그가 기억하는 부친은 평생 술 즐기고 사람 좋아한 소위 ‘한량’으로 50살을 못 채우고 작고했다. 성장기 때 그의 형편이 짐작되는 바다.

그는 정치적으로 ‘YS 사람’이었지만 상도동계 비주류였다. 비서 출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YS와의 인연은 대학시절부터 이어졌다.

YS가 국회의원 지역구를 거제에서 부산으로 옮겨 치른 선거에서 부산출신 젊은 학도로 그를 도왔다. 대학(고려대 정치학과) 다닐 때는 형편도 어렵고 해서 YS 집에서 한 1년 기숙하기도 했다.

옆에서 겪어 본 YS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그는 먼저 “정치인으로서 YS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는 1979년 YS가 국회에서 제명당한 후 당수직도 박탈당했을 때 보여준 결기로 YS를 기억한다.

당시 유신 독재정권으로부터 사과 한마디만 하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하겠다는 제의를 받고 YS는 ‘그건 죽는 거나 매한가지’라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신 전 부의장은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당해보면 참 어려운 이야기”라고 회고한다. YS 특유의 뚝심과 결기가 결국 민주화를 앞당기는 정치적 돌파력이 됐다는 평가다.

신 전 부의장은 1980년대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잠깐 민한당에 몸담았다. 그는 YS의 진영에서 벗어난 그 시절에 대해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그는 또 “정치의 질이 떨어진 건 군사정권 탓”이라고 분질러 말한다. 군사정권 탓에 정치판이 독재 대 반독재,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만 짜여져, 무슨 경제나 정책을 연구하고 내놓을 분위기가 안 됐다는 지적이다.

과거엔 그런 얘기하고 다녔다간 이상한 시선을 받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우리 정치판이 아직도 그 잔재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그는 신문기자 출신이다. 대학 졸업 후 부산일보에서 8년 가량 기자생활을 했다. 당시 월남특파원을 하는 등 부산 사회에서는 꽤나 필명도 날렸다.

그는 “술도 배우고, 정치인들도 두루 접하며 정치인 신상우의 기반을 닦았다”고 기자시절을 회고한다. 무엇보다 그는 그때 같은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있던 부인을 만났다.

적 만들지 않은 평생정치인

그는 40년 가까이 정치 일선을 떠난 적이 없는 평생 정치인이다. 1971년 8대 총선(부산 동래ㆍ양산)에 출마해 첫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이후 9ㆍ10ㆍ11ㆍ13ㆍ14ㆍ15대 국회의원으로 7선의 관록을 얻었다. 그러나 1980년대 YS를 떠나 독자의 길도 모색하다 정치적 위기도 경험했고, 16대엔 공천에서 수모도 겪었다. 이런 풍상과 함께 오늘의 신상우가 됐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대중적인 외모를 가졌다. 179㎝의 훤칠한 키에 풍채가 좋다. 40년 이상 매일 해 온 아침 조깅 덕인지 곧 칠순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눈매와 목소리도 젊다. 아직까지는 술 실력도 여전하다고 했다.

그는 아들만 셋 뒀다. 장남 용주(40)씨는 영화 제작자다. 그가 얼마 전 YS부부,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김정만 전 교육문화수석과 함께 본 영화 ‘종려나무 숲’이 용주씨가 제작한 것이다. 차남 용섭(38)씨는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고, 막내 용민(34)씨는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신 전 부의장은 얼마 전엔 강남에 ‘범중여한실(凡中餘閑室)’이란 개인사무실을 열었다. ‘범중’은 그의 호다. 사무실 이름을 뜯어보면 부담 없이 바둑이나 두며 소일하는 곳이란 뜻이다.

원로 정치인으로서 나름대로 생각하는 역할이 없냐고 묻자 “나라에 빚을 갚는 심정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받는다. 또 “원로라는 분들이 쉽게 무책임한 비판자가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덧붙인다. 얼마 전 원로들이 대거 참여한 보수단체의 시국선언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좌우명은 ‘정직하자’다. 정치라는 게 설득하는 일인데 설득력은 정직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