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있어 나는 행복합니다"

1977년이었다. 당시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최고였다. 하루 종일 분주했다. 아침부터 방송국을 돌며 노래를 불렀고, 밤에는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다 쓰러졌다. 의사 이야기는 폐결핵 말기라고 했다. 가망이 없었다.

윤항기 예음음악신학교 총장 이야기다. 그런 그가 지난달 19일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 대공원 내 돔아트홀에서 음악인생 45주년을 결산하는 공연을 가졌다.

“공연은 말 그대로 성황이었어요. 예전의 그 때와 비슷했어요. 공연장이 2,000석 규모였는데, 처음에는 많이 빌 줄 알았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놀랐죠. 전국에서 팬들이 다 모였더군요.”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주 5일제 등으로 관객이 없을 줄 알았지만, 그 반대였다. “무대에 선 것은 17년 만입니다. 그런데도 참 많은 팬들이 왔습니다. 저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17년만에 공연, 수익금 NGO에 기부

그는 인터뷰 내내 ‘행복’과 ‘감사’를 이야기했다. 그의 공연 제목은 ‘나는 행복합니다’다. 뭐가 행복한지를 물었다. “45년 음악 인생 중 30년은 대중음악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 후 15년은 음악 목회자였습니다. 음악의 대상은 다르지만 본질은 맥을 같이 합니다. 음악 속에서 살아온 것이 너무 행복해 그렇게 정했습니다.” 한 마디로 ‘행복한 나의 인생’이 주제였다.

그는 수익금을 이웃을 위해 쓴다고 했다. NGO인 기아대책에 모든 수익을 기부했다. 이 돈은 에티오피아의 기술학교 건립에 사용된다.

그는 기아대책 홍보위원이다. 1993년부터 이 역할을 해 오고 있다. 그것이 이번에 우연히 연결됐다. 올 봄에 한 일간지와 회견을 했다.

그 자리에서 가수 데뷔 45년을 맞아 기념 공연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것을 보고 기아대책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자선 공연을 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그는 흔쾌히 승락했고, 그래서 이번 공연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한 공연이었죠.” 그는 당연한 듯이 말했다.

그의 변신에 대해 또 물었다. 왜 목사가 됐느냐는 것이다. 같은 말이 되풀이 됐다. 그리고 나한테 되물었다.

“사형선고를 받는 적이 있습니까.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당시는 제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렇게 됐습니다. 시한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오래 전부터 독실한 신자였다. 아내가 신자가 된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서 그래요.” 그는 그 말만 했다.

의사의 선고를 받자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내를 따라 교회에 갔다. 거기에서 그는 “병을 고쳐주시면 죽는 날까지 세속적 욕심 등을 버리고 참되게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래서인가 그는 완쾌했다. 그는 “의술로는 고칠 수 없었던 것”이라며 1977년부터 서서히 제2의 인생을 산 것 같다고 했다. 79년에 그는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여러분’이라는 노래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또 고맙다고 했다. 다시 태어났다는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윤 총장은 자신이 무척 방탕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인기가 좋을 때는 하루에 담배 3갑, 소주 5병을 마셨습니다. 집에는 거의 안 들어 가고 친구들하고 지냈죠. ‘팔도 건달’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에 걸렸단다. “벌을 받은 거죠.”

목사 안수는 1990년에 받았다.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미드웨스트신학대에서 교회음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생 음악을 했는데, 목회에서도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일반 목사들은 얼마든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국내에는 그런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음악 목회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간단히 말하면 예배를 음악으로 하는 것이다.

예배시간이 1시간이면 40분 이상을 음악으로 진행한다. 설교는 5분 정도로 짧게 한다. “효과가 더 빨라요.”

미국에서 정식으로 음악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음악이고, 또 그것을 내가 바랍니다.”

그가 예음음악신학교를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에 신학교는 많지만, 음악 목사 양성기관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 했다. “적자는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 적자를 어떻게 보전하느냐 물었다. 그런데 그의 첫 답변이 의외였다. “이미 인기 명예 돈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믿기 어렵죠. 하지만 믿어야 합니다.”

모자라는 돈은 여기저기서 보태 쓴다. 그는 이따끔씩 간증을 한다. 그 자리에서 섹스폰을 분다. 또 노래방에서 나오는 돈도 있다.

“저작권료 등으로 살 만한 돈은 나와요.” 그런 자금을 다 모아서 학교에 넣고 있다.

신앙으로 다시 태어난 삶

그는 줄곧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제가 말을 더듬었어요. 아주 심했죠. 그런데 목사 되고서는 말을 아주 잘하게 됐죠.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몰라요. 친구들이 이런 저를 보고 깜짝 놀라죠.” 그는 이 말을 여러 번했다.

왜 병이 치료됐는지는 계속 궁금했다. 과연 기도를 해서 나았는지를 물었다.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 당시에는 약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어요. 물과 영양주사가 전부였습니다. 두 달 동안 전혀 음식을 못 먹었습니다. 그러다 차츰 회복이 되더라고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랬다. 그는 자신이 180도 바뀌었다고 했다. 어릴 때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깡통을 차고 다니기도 했다.

신경질적이 됐고, 참지를 못하는 성격이 됐다. 급하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삐뚜러지고, 모나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이런 그가 이제는 변했다. 일단 참을 성이 많아졌다. 그리고 부드러워졌다. “무척 큰 변화지요.” 그가 씩 웃었다.

뭐가 가장 아쉬웠냐고 하자 “인기 있을 때, 돈 많이 벌었을 때, 낭비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 때 착실히 모았어야 하는데.” 지금 학교는 가건물이다.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좌우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물론 성경 말씀은 제외하고서다. 금방 답이 왔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자입니다.” 과거가 교훈이 될 수는 있지만, 미래의 지름길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노래는 1968년에 작사 작곡한 ‘별이 빛나는 밤에’다. 그 이유는? 국내 최초의 발라드이기 때문이란다.


이상호 편집위원 s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