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불우청소년 돕기 마당발 노릇"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가장 뼈아픈 과거는 ‘반민특위 해체’와 ‘1987년 대선 야당 후보단일화 실패’다. 전자는 국가 정체성과 민족 정기 확립에 큰 상처를 남겼고, 후자는 이 땅을 지역감정의 수렁으로 몰고 갔다. 양김은 차례로 대통령이 됐지만 5ㆍ6공 반민주 세력과 연대해서 집권할 수밖에 없었다.”

후농(後農) 김상현(70) 전 의원은 거침없이 말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그늘 아래 50년 정치인생을 걸어온 그는 할 말도, 숨은 일화도 많다.

지난 17대 총선 때 광주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와 낙선, 야인 생활을 하고 있는 그를 지난달 30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났다.

오전 9시30분에 만나기로 한 호텔 커피숍에 도착하니 그는 벌써 지방에서 올라온 듯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정리하다 보니 3만명이 훌쩍 넘었다는, 소문난 ‘마당발’의 모습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그의 호 ‘후농’은 1980년 감옥에서 만난 고은 시인이 ‘인생 전반에 고생이 많았으니 후반엔 많이 수확하라’며 지어줬다는데, 그는 스스로 “사람농사 많이 지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의 행동반경은 요즘 여간한 현역 의원들과도 비교가 안 된다.

분열에 등 돌린 그만의 정치행보

그는 정치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박정희 유신정권 아래서 타협을 뿌리치고 감옥살이를 선택한 것과 87년 ‘비지파’(비판적 지지파ㆍ김대중 후보의 독자출마를 지지했던 세력)를 따라가지 않고 ‘후단파’(후보단일화파ㆍ야당후보 단일화를 지지했던 세력)를 선택해 YS(김영삼 전 대통령) 진영에 잔류했던 때”라고 술회했다.

“분열의 편에 서지 않겠다”는 명분과 “나대로의 정치 신화”에 대한 꿈 때문이었다고 했다. YS가 ‘3당 합당’으로 여당에 들어갈 때 다시 DJ에게로 돌아왔지만, 그의 이런 행보는 ‘김대중 총재 체제’에서 거의 유일한 비주류가 된 사연이다. 그는 영호남을 기반으로 한 양김의 정치체제 속에서 정확히 ‘DJ 사람’도 ‘YS 사람’도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후농식 정치는 최근 ‘중도개혁통합론’을 주장하는 데서도 일관된다. 그는 “열린우리당이 민주당과 결별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도덕적ㆍ정치적 잘못 ”이라고 규정하고, 다시 우리당과 민주당이 통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당장은 때가 아니고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치르고 나면 “정치권이 한바탕 시끄러운 재편의 몸부림을 칠 것”으로 점쳤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민 그이지만 이제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우선 “노무현 정권이 사상 처음으로 민주적 정체성을 제대로 갖춘 정부인 점은 평가하지만, 시끄럽기만 하지 성과가 안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도자는 자기 절제력을 가져야 한다”면서 자만과 분노, 언행의 절제를 주문했다.

그는 또 영국의 처칠 수상이 재임시 정부의 실책과 문제점만을 정확히 보고하도록 통계부를 만든 것이며,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자칫 주변에 아첨꾼만 득세할까 봐 막역한 친구를 측근에 둬 직언을 하게 한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한결같이 제대로 된 여론을 귀담아 들으라는 얘기다.

그는 “16개나 되던 사회단체장 일을 대부분 다른 분에게 넘기고 지금은 3개만 맡고 있다”고 했다. 남은 3개의 일 중 ‘후농 청소년문화재단’의 일이 요즘 그의 주요 업무다.

2003년에 설립한 후농재단은 그 동안 천안소년교도소에 대학 캠퍼스를 개설해 재소 청소년 진학을 지원하고 이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연극도 기획하는 등 불우 청소년을 돕고 있다.

또 최근 청소년위원회에서 지원하는 가출청소년 쉼터 운영기관으로 천주교 수녀원들과 함께 지정됐다. 연내 개설될 쉼터의 대표는 코미디언 김미화씨가 맡기로 했다.

후농은 정치인 환경운동의 선구자다. 한국에서 첫 환경운동단체인 한국환경보호협의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회장을 맡고 있고, 후농재단을 통해서도 청소년 환경운동을 이끌고 있다.

“1970년대 초 감옥에서 앞으로는 나가서도 정치는 계속 못할 것 같기도 해서 대안으로 모색한 것이 환경운동”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선견지명이었던 셈이다.

그는 1993년엔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유엔 환경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환경운동에 대한 이런 후농의 특이한 이력이 환경운동가 최열씨조차 그를 ‘환경운동의 형님’으로 모시는 이유다.

후농은 1935년 전남 장성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과 남동생은 어려서 죽고 여동생 셋만 남아 졸지에 5대 독자가 됐다.

그가 1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6ㆍ25 때 세상을 등졌다. 여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된 것이다.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그래도 그는 서울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한영고등학교) 3학년 1학기까지 다녔다.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급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피를 판 적도 있다.

이 같은 바닥인생은 후일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아무리 험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버텨낼 수 있었던 저력이 됐고, 정치인으로 성장한 뒤에도 여전한 서민적 풍모의 바탕이 된 셈이다. DJ가 그를 일러 “그림 속 과일도 꺼내 먹을 사람”이라고 한 유명한 일화도 같은 맥락이다.

DJ와 50년 인연, 부침 거듭한 정치역정

그는 19살 때 DJ를 만났으니 50년 넘는 인연이다. 1956년 그가 대한웅변협회 학생부장으로 있을 당시 동양웅변전문학원 원장으로 있던 DJ와 알게 돼 김 원장 집에 신세도 지면서 ‘형님, 동생’으로 발전했다.

이후 DJ가 1961년 강원 인제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했을 때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그도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후농은 1965년 29살의 나이로 동대문갑 보선에서 당선돼 첫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DJ를 떼놓고는 후농의 정치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나는 늘 DJ 면전에서 시시비비 했다”고 강조했다. DJ 곁에서 2차례 4년3개월의 감옥살이와 17년 간의 공민권 박탈을 견뎌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지만 후농의 ‘DJ에 대한 도전적 행보’는 현실에서 대가가 있었다. 여러 사연이 있었겠지만 그는 “양김 체제에서 6선까지 한 중진이었지만 원내총무는 물론 상임위원장 자리 한 번 못했다”고 아쉬움을 털어 놓았다. 그래도 후농은 “DJ를 만난 덕에 내가 오늘 이 정도로 성장했다”고 고백한다.

후농은 DJ의 오늘에 큰 공헌을 한 정치인이다.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대중 대선 후보를 만들어 낸 결정적 인물이다. 김영삼, 이철승 후보가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나선 마당에서 당시 김대중 의원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 때 후농은 “지금 나가야 할 때”라고 김대중 의원을 부추겨 결심을 받아냈다. 유진산 당수의 ‘후보 지명’ 제안을 거부하고 우여곡절 끝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결국 뒤늦게 후보 경선에 뛰어든 김대중 의원이 극적으로 대선 후보가 됐고, 이후 DJ 정치의 발판이 마련됐다고 전한다.

독특한 후농식 정치 행보는 많은 일화를 만들어 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문상(問喪) 사건은 지금 들어도 긴장된다. 1979년 그가 연금 중일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는 이 때 청와대에 전화를 해 문상을 가겠다고 했다. 그 쪽 관계자들이 다들 깜짝 놀란 것은 당연지사. 결국 그는 정보부 차를 타고 청와대에서 문상을 했다. 문제는 그 뒤.

그는 당시 여당 의원이던 남재희 의원에게 “DJ가 문상을 오겠다고 한다”며 본인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전격 제안했다. 그는 속으로 ‘DJ는 큰 정치인인데 분명 문상 제안을 하면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 여당은 몇 시간의 숙고 끝에 거절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안사의 반대’로 무산된 것이다.

박 전 대통령과 또 다른 묘한 인연은 박 정권이 ‘지원’해 준 돈으로 창간한 월간지 ‘다리’다. 후농은 1968년 사상 처음 국회 차원의 재일한국인 실태 조사를 주도한 뒤, ‘재일한국인(부제 재일한국인 80년사)’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을 본 박 전 대통령은 ‘책을 구입해 일본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국무회의에서 논란 끝에 거금 600만원 어치의 책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뜻밖의 거금을 손에 쥔 후농은 이 돈으로 월간지 ‘다리’를 창간했다. 그러나 ‘다리’의 내용은 박 정권 독재의 폐부를 찌르는 비판들로 가득했다. 박 정권에서 나온 돈으로 박 정권을 겨누는 칼을 만든 셈이다. 후농은 “아이러니”라며 씩 웃었다.

또 강삼재 전 의원을 YS의 측근 참모가 되도록 주선한 장본인이 후농이라는 이야기는 정치권에서 유명하다. 동교동계 사람이 상도동계 인맥을 만들어 준 셈이다.

이야기는 ‘선거혁명’이라고 평가됐던 1985년 2ㆍ12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이때 민주당은 마산에 2명의 후보를 냈는데 이 중 한 명이 강삼재 후보다.

그러나 그는 YS가 민 사람이 아니었다. YS는 지원 유세를 위해 마산까지 내려가서도 자신이 민 후보만 지원유세 하고선 강 후보는 찾지 않았다.

공천 과정의 앙금 탓이었다. 선거 결과 YS가 민 후보는 떨어지고 강 후보가 됐다. 당시 YS는 강 의원 이야기만 들어도 버럭 화를 냈고 강 의원 역시 좋은 감정이었을 리 없었다.

그 때 후농이 화해에 나섰다. 그는 강 의원을 달래면서 YS를 만나 강 의원을 자신의 계파로 끌어들여 참모로 쓸 것을 제안했고, 이후 강 의원은 ‘YS의 정치적 양자’로 까지 성장했다.

"정치자금은 생선 먹듯 해야"

정치인이라면 나름대로 사연이 있을 정치자금에 대해 물었다. 그는 ‘정치자금은 생선 먹듯 해야 한다’는 이상천 전 국회부의장(이해찬 국무총리의 조부)에게 들은 말로 대신했다.

“지도자는 자금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생선 가시가 세면 목에 걸리기 마련이고, 또 가시가 없는 듯 하면 필시 부패한 것”이라는 충고다.

그는 애주가다. “절제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얼마 전에도 폭탄주를 11잔까지 마셨다”며 웃는다.

평소 건강은 단전호흡과 테니스, 골프로 다진다. 슬하에 3남1녀가 있다. 장남 윤호(44)씨와 차남 준호(43)씨는 사업을 하고 딸은 시집 가 미국에서 산다.

막내 아들 영호(38)씨는 기자 출신으로 지난 총선에 출마했다가 부자가 함께 고배를 마셨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