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 더 이상 덮을 수 없다"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을 촉구하기 위한 북한인권국제대회가 8일 서울에서 사흘간 일정으로 열렸다.

이번 서울 대회는 7월 미국 워싱턴에서 프리덤하우스 등 미국 인권단체 주도로 열린 대회에 이은 북한인권 관련 2차 국제대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서울 북한인권국제대회 공동대회장을 맡은 이인호(69) 명지대 석좌교수를 만나 북한 인권 등 우리 사회의 현안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그의 첫마디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내 첫 여성 대사를 지낸 이인호 교수는 왜 그가 서울 북한인권국제대회 공동대회장을 맡아 정치적 논란에 한가운데에 섰는지 설명해 나갔다.

“국제 정치 무대에서 인권문제가 정치 도구화한 사실도 역사학자로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인권 상황은 주권, 내재적 접근 등 어떠한 이론적 곡예로도 덮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요. 여러 소리할 것 없이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 보장되고 있지 않아요. 물론 전쟁은 피해야 하죠. 포용정책, 평화와 번영정책 모두 나름대로 수긍이 갑니다. 그렇지만 이제 왜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양보해가면서까지 북한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죠.”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핀란드대사, 러시아대사를 지낸 한국의 ‘여성대사 1호’라는 세간의 명성에 앞서 서슬 파랬던 ‘반공(反共)의 시대’에 러시아의 역사, 특히 러시아 지성사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역사학계 원로다.

1시간 여 진행된 인터뷰 내내 그의 어조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했다.

북한 핵과 인권문제 분리접근은 잘못

먼저 북한의 실상을 잘 아는 지식인으로서 그 동안 마음이 착잡하던 참에 공동대회장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와 수락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선 “북한은 우리에게 고통의 근원 아니냐”고 반문한다. 전쟁의 공포를 일으킴과 동시에 연민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우리 국민이 이런 북한을, 특히 북한 주민이 처한 상황을 애써 외면하려는 심리가 만연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다 북한 실상에 대한 정보가 차단되고 있는 기류까지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 인권문제를 핵 문제와 분리해 접근해야 한다는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가 보기엔 북한의 핵과 인권은 결국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내세우는데 이게 가능하려면 인권 상황의 개선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지금 지식인들이 침묵을 깨고 나서야 하는 이유도 이런 현실 때문이란 설명이다.

북한을 돕기 위해서라도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고 국민의 무관심을 깨워야 한다는 논리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경제 문제 다음으로 북한 핵, 인권, 통일 문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그런데 책방에 한 번 가 보세요. 북한문제 관련 책이 베스트셀러가 없는 것은 물론 아예 팔리지도 않아요. 모두가 무심한 거죠. 왜 이렇게 됐습니까. 북한 인권 등 실상에 대해 이야기하면 다짜고짜 극보수로 몰아버리는 분위기 탓 아닙니까. 지금 북한의 인권에 침묵하는 게 진보입니까”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또 “80년대 민주화 투쟁 시절 반미정서가 왜 생겼나.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원한다는 생각때문 아니었냐”고 진보 지식인 그룹의 이중성을 비판한다.

또한 우리 사회가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혼돈스러운 것은 “기계적 반공교육의 후유증”으로 풀이했다.

한때 북한 정권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혔던 386세대 역시 반공교육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는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일각의 방식인 ‘내재적 접근론’은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라고 했던 독일 철학자 헤겔 우파의 아류로 보고, 그런 식의 역사인식은 나치 정권 등 파시스트까지도 용인하게 되는 역사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민족끼리’란 용어도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적인 삶에서는 관념적인 민족보다 국가가 우선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북문제에 ‘민족공조’ 논리가 앞세워 ‘국가’를 잊어버리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그는 서울 토박이로 한국나이로 올해 일흔이다. 선친은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은행원이었다.

아버지의 서재에 꽃인 수많은 역사서들은 소녀 이인호를 사학도의 길로 이끌었다고 했다.

서울대 문리대 재학 중이던 그는 1956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1년 간 유학생활을 했다.

러시아 역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미국 사회의 ‘스푸트니크 소크(Sputnik Shock)’ 때문이었다.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號)를 쏘아올리자 당시 미국 사회는 온통 충격에 휩싸였다.

냉전시대 유일한 경쟁국이었던 소련에 우주 경쟁의 선수를 빼앗긴 탓이다.

그때부터 미국 정부는 교육체계 전반을 개혁하고 소련 관련 연구에도 막대한 지원을 했다.

한국의 가난한 유학생인 그는 그 기회를 잡아 장학금이 보장된 소련 연구에 뛰어들었고,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 역사 전문가가 됐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일제 식민지의 삶을 경험한 세대다. 그런 탓에 우리의 일제 치하의 과거사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막연하지 않다.

최근 그는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 위원직 제안을 거절했다. 친일 문제를 지금의 잣대로 쉽게 재단하기 어렵다는 믿음에서였다.

그가 보기엔 당시 조선인들의 삶은 대부분 회색의 빛이었고 보는 이에 따라 흑(黑)일 수도 백(白)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제와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면 항일투사가 되든지 초야에 묻혀 산 이들을 존중해야 하지만, 타협을 했지만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지원한 이들의 삶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 손기정 선수도 일제와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며 “그렇다고 손기정 선수가 친일파냐”는 주장이다.

한국사회 지성의 위기 간과해선 안 돼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계속됐다. 그는 작금의 우리 사회를 ‘지성의 위기’라는 말로 압축한다.

북한 인권문제부터 최근 황우석 교수 논란에 이르기까지 현상은 한 마디로 가치의 혼돈으로 규정하고, 이는 사회가 기준 삼아야 할 지성의 부재 탓이란 것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 출범이후 반(反)엘리트주의 현상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평등주의를 아무데나 적용하는 바람에 엘리트주의가 필요한 영역까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고 정주영 회장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는 이미 열린 사회이고, 뒤쳐지는 사람들이 마냥 희생자로 볼 수 없는 현실에서도 맹목적 평등주의가 횡행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이 구체적 현실보다 추상적 논리를 앞세우는 ‘횡포’에서 벗어나 비판적 사고를 회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젊은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국가의 속성이 지령을 바탕으로 선전, 선동, 세뇌 기술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비인간적인 체제인지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교수는 현재 노모(92)를 모시고 강남 반포동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가능한 한 많이 걷는 것으로 건강을 챙긴다.

근래 ‘역사해석’을 주제로 사회 이곳 저곳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대사직을 맡으며 강단을 떠났던 그는 강단 밖 활동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지만 학자로서 책 읽을 시간과 쓸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데에는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프로필

1960년 미국 웰즐리대

1967년 미국 하버드대 역사학 박사학위

1972~79년 고려대 교수

1979~95년 서울대 교수

1996~98년 주핀란드 대사

1998~2000년 주러시아 대사

2004년~현재 명지대 석좌교수

북한인권세계대회

황장엽씨 "북한국 체험하면 친북 사라질 것"

북한인권국제대회가 사흘간 일정으로 8일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 대회에는 그 동안 북한의 인권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온 국내외 단체와 인사들이 총집결 해 한국 정부의 북한 인권 개선에 대한 미온적 태도를 비판하고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증언이 이어졌다.

북한인권국제대회는 9일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상설 국제 연대를 적극 모색하는 6개항의 ‘서울 선언’을 채택했다. 선언은 ▲탈북자들의 고문, 수감 등 보복중단 ▲20만명이 수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치범 수용소 해체 ▲6ㆍ25 전쟁 당시 8만명의 납북자와 국군포로 등의 생사 확인과 송환 ▲수령에 대한 절대복종과 연좌제, 공개처형 등 조직적 인권유린 중단 ▲외부에서 지원된 식량 및 의약품의 영유아 우선 배분 ▲한국 정부의 북한인권 적극적 관심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국내외 40여 개 단체와 인권운동가 1,000여명이 참가한 이번 대회는 알렉산더 브시바우 주한 미 대사와 미 국무부 제이 레프코위츠 북한인권특사, 미국 디펜스포럼재단과 북한자유연대의 수전 숄티 회장, 일본의 사이카 후미코(齊賀富美子) 북한 인권담당대사 내정자 등 미국과 일본의 행정부 관료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등 국내 정치권 인사들이 포함돼 향후 6자 회담 관련 북한의 반응이 주목된다.

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북한인권운동 보고회에서 대회 상임고문인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남한의 일부 학생이 오직 김정일 세습집단의 말만 듣고 친북반미 주장을 하는 데 대해 불행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그런 학생들의 0.1%만이라도 북한에 가서 북 청년들과 함께 노동하고 북한군대를 체험하면 주장이 신중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수전 숄티 디펜스포럼 회장은 “노무현ㆍ김대중 정부가 아니었다면 북한 독재정권은 사라졌거나 변해 있을 텐데 무너지기 직전의 정권을 살려놓는 바람에 동포에게 등을 돌린 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북한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는 다른 이유로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들었다.

김수환 추기경도 봉두완 천주교 민족화해센터 회장을 통해 전달한 메시지에서 “인권 유린을 하는 국가는 국제사회에서 역할을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면서 “북한을 인간의 기본 권리와 존엄성이 보장되는 체제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정부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한반도 평화 안정을 위한 정책이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공개적 요구보다 우선한다”고 밝혔다.

이번 대회 참석차 방한한 레프코위츠 미국 북한인권특사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면담을 신청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또한 이번 국제대회를 반대하는 국내 인권단체들의 움직임도 있었다. 인권운동사랑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천주교 인권위원회, 불교 인권위원회 등은 이날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은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없다”며 “이번 북한인권국제대회의 목표는 북한 사람들의 인권 개선이 아니라 정권 붕괴”라고 비판했다.

한편 중국 사상가 루쉰(魯迅)의 ‘광인일기’ 서문에서 가사를 따온 이번 대회 주제가 ‘유리병’이 네티즌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신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