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화두는 미래 위한 통합"

“조국의 정치가 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삼봉(三峰) 정도전(1342~1398)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조선의 정치 기틀을 세우면서 처음으로 철학과 권력을 결합시켰고, 이념과 권력을 제도화한 능력에서 동서양 어느 정치가와 비교해도 탁월한 정치가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친명사대(親明事大)의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조선의 자주를 모색하고 실천했던 정치가이기 때문입니다.”

최상용(64)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과ㆍ전 주일대사)는 삼봉 예찬론자다. 우선 강단의 학자에게 다가오는 삼봉의 매력은 당대의 사상가가 현실 정치를 장악했다는 점일 터이다.

그가 마치 삼봉에게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꿈꿨던 ‘철학의 권력화’를 읽어낼 수도 있을 법하다.

동시에 그는 친명사대와 자주라는 당대의 정치적 명제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삼봉의 지혜를 민족문제와 한미동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지금의 현실에 빌리고 싶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일 오후 고려대 연구실에서 만난 최 교수와의 인터뷰는 안암동 교정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2시간 여 계속됐다. 대화의 길목마다 명쾌한 명제로 매듭을 짓는 그의 언어 감각은 오랜 세월 개념과 씨름 해 온 원로 학자의 이력을 짐작케 한다.

비판적 정치학자의 길 고수

최 교수는 잠깐 주일대사(2000~2001년)를 지낸 것을 제외하면 평생을 현실 정치와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비판적 정치학자다. 이는 학자로서의 삶의 출발점에서 정치 권력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개인적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1972년 일본 도쿄대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강단에 서기에 앞서 고문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시작된 다음해인 1973년 3월2일, 그는 고려대 첫 출강 날 노상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돼 남산에 끌려갔다.

그리고 40여 일 간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혐의는 ‘일본 유학 시절 북한에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왜 끌려왔는지조차 몰랐다.

조작된 혐의였기 때문에 털어놓을 것도 없었고, 이 때문에 더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가량 수감돼 2심 재판에서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결국 유신 독재 실체를 몸소 겪은 1973년 3월2일은 그에게 개인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민족과 평화, 중용. 이 세 단어는 그의 학문을 지배한 개념들이다. 20, 30대에 민족주의에, 40대에는 평화 사상, 지금은 중용의 정치가 그를 사로잡은 화두다.

부시 미 행정부의 세계 전략인 ‘자유의 확산’ 정책, 즉 체제가 민주적 일수록 평화롭고, 민주주의 국가간의 전쟁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논거도 최 교수가 일찍이 천착했던 평화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다만 전세계의 전쟁에 개입하고 있는 미국의 네오콘들이 이 평화의 원리를 편의대로 적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평화 사상은 학문적으로 독일 철학자 칸트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 이래 서양 지성사를 관통해 온 사유란 것이 최 교수의 지적이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지난해 6월 평양을 다녀온 그는 “다시 한 번 정치체제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실패는 체제의 실패라고 본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하고 있지 않은 역사적 사실은 “평등 경쟁에서조차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패배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선진자본주의 민주국가의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이 과거 공산권 인민의 삶의 질보다 훨씬 좋았다는 것은 결국 ‘자유 경쟁에 의한 평등 추구가 국가 권력에 의한 평등 추구보다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철저한 ‘자유를 중심 축으로 하는 민주주의자(자유 민주주의자)’다.

최 교수는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자유와 함께 인권을 든다. 그는 인권에 관련해 몇몇 아시아국에서 주장하는 ‘아시아적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권은 지금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달리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시민단체가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본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대북정책은 네오콘식의 이상주의 보다는 과거 키신저 미 국무장관식의 현실주의적 선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현재 북한과 대화를 통해 개혁ㆍ개방의 길을 여는 정책은 북한의 인권향상에 나름대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또 북한의 개혁ㆍ개방 문제도 진도는 느리지만 이미 시대의 큰 흐름 속에 있다는 판단이다.

민족·평화·중용의 개념에 천착

정작 그가 우려하는 점은 세계적 차원의 냉전이 이미 종식됐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내의 ‘국내 냉전’은 오히려 첨예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좌ㆍ우파가 서로의 존재 이유를 인정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정세는 결국 어느 한쪽의 절망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체제로 대단히 위험하다는 진단이다.

그는 향후 정치적 리더십의 요체는 사생결단식 대립을 미래를 향한 보완적 경쟁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진보는 탈급진화 하고, 보수는 자기 개혁의 길로 나서게 하는 것이 한국 정치가 당면한 과제라는 것이다.

특히 그가 보기에 이런 현상은 민주주의의 경험이 길지 않은 우리 사회가 ‘민주적 가치의 내면화’ 학습이 제대로 안 돼 있기 때문이다.

이제 ‘대립에서 경쟁으로’ 가자는 것이다. 그가 요즘 ‘중용의 정치’에 천착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화제가 악화일로에 있는 한일 관계에 이르자 그의 어조에 한층 힘이 들어갔다. 그는 한일관계 악화 요인은 일본 측에서 제공했지만 이를 풀 또 다른 열쇠로 북일 관계개선에 눈을 돌릴 것을 주문했다.

그는 우선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자신의 3대 외교과제가 북방영토 회복과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북일 수교인데 현재 임기 내 가능한 일은 북일 관계 정상화뿐이라는 것이다.

또 역사적으로도 정치적 우파들이 공산주의 국가와 타협을 이뤘다는 사실에서도 고이즈미 총리와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의 정권 조합에 기대를 걸 만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정치 조합은 납치문제에 발목 잡힌 북일 관계 정상화에 대한 일본 내 반대 여론을 잠재울 수 있는 최상의 카드라는 것이다.

또한 북일 관계가 풀리면 6자 회담 등 동북아 정세에 훈풍으로 작용할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 평화체제의 새로운 축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결정적인 요인으로 현재 미국과 중국이 북일 관계 정상화를 반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든다. 그는 이런 호기를 놓친다면 일본이나 북한의 지도자는 모두 정치적 태만이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덧붙여 우리 정부 역시 이 점을 외교 전략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현재 일본의 대북 행보는 상당 부분 자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이는 돈독한 미일 동맹이 그 바탕이라고 풀이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의 자주 외교 역시 한미 신뢰를 확실히 다져놓고 재량껏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는 기본이지만, 국제 관계에선 국가의 힘은 평등하지 않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그는 1942년 고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무녀독남이다. 경주 최씨로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 역시 같은 가계다.

본인은 굳이 중농집안 출신이라지만, 그는 청부(淸富)와 적선(積善)의 가훈을 실천하며 300년에 걸쳐 ‘만석꾼’의 부를 유지한 경주 최씨 부잣집 가문 출신이다.

학문 바깥세상 잇는 매개물

그는 애주가다. 정확히 술보다 술자리를 즐기는 애주가라 했다. 그 만큼 그의 술자리엔 다양한 인물들이 있다. 정동영 전 장관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정 전 장관과의 인연은 서울대 강사 시절 사제지간으로 시작됐다. 정 전 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 교수에 대해 자신의 좌우명 구동존이(求同存異ㆍ서로 의견을 조화시키되, 합치점을 찾지 못할 때는 유보하면서 꾸준히 대화한다)의 의미와 정치적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대학시절 은사라고 했다.

그에게 술은 학문 바깥의 세상을 잇는 매개물인 셈이다. 그는 평생 마시기 위해 평소 취중지지(醉中知止ㆍ취한 중에도 그칠 줄 안다)의 마음으로 아껴 마셔야 한다며 웃는다.

그의 지갑 갈피엔 20대 여성의 낡은 흑백 사진이 보인다. 오페라 가수인 부인 김숙은 성신여대 교수의 젊을 적 사진이다.

“살다 보면 미울 때도 있지만, 젊고 아름답던 시절의 부인을 보면 마음이 누그러진다”며 멋쩍은 표정이다. 1969년 일본 유학시절 결혼해 슬하에 2남을 뒀다. 육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는 날렵한 몸매를 가졌다.

비결은 매일 아침 조깅이다. 뜀박질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시작했다. 해질녘 1.14평 독방에서 매일 2시간씩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버텨낸 것이 평생의 습관이 됐다.

“이 시대에 필요한 화두는 미래를 위한 통합입니다. 국민통합과 사회통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경제도 남북한 평화공존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믿습니다.” 그는 ‘통합’이란 화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