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록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재인식'은 '해전사' 보완한 것"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한국의 근ㆍ현대사는 왜곡된 역사다. 민족과 혁명이라는 색안경을 낀 좌파들의 해석일 뿐이다. 암울하기만 했다던 일제 강점기도 그렇고 친일했다는 이광수, 독재자로 그려진 이승만도 재평가되어야 한다. ”

일군의 학자들이 우리의, 한국인의 역사의식 한가운데에 돌을 던졌다. 8일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ㆍ책세상 출간)’을 통해서다. 파문은 의외로 크다.

신문들은 연일 대서특필을 하며 한편으로 역사 논쟁을 부채질하고 있다. ‘재인식’은 책 제목이 이미 이야기하듯이 1979년부터 89년까지 전6권으로 출간돼 한 세대의 역사인식을 지배해 온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에 대한 문제 제기다.

‘재인식’의 주요 필진에 따르면 ‘해전사’는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각색한 편향된 역사 기술이라는 것이다. ‘재인식’에는 28명의 사회과학자들의 논문이 실렸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가 ‘재인식’의 주류 필진의 도발적 문제 제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필진 중 이완범(45ㆍ정치학)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특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는 88년과 89년 ‘해전사’ 3권과 4권에도 3편의 논문을 실었던 특이한 경력 때문이다.

그 때가 20대 후반이었으니 꽤 ‘조숙한 학자’였던 셈이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지나 이번엔 ‘재인식’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해전사' '재인식' 기획자 두루 만족시킨 학자

무엇이 달라졌을까? 사상적 ‘전향’이라도 했나? 그러나 사실 그는 ‘재인식’ 주류 필진의 사관으로부터 분명 한 발 비켜서 있다.

그는 “새로 나온 ‘재인식’은 89년 완료된 ‘해전사’ 속편일 뿐이며 그간의 연구성과를 반영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겠다는 심정으로 응했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해방 공간의 한국정치사’가 전공인 이 교수의 연구는 ‘해전사’나 ‘재인식’의 기획자들의 의도를 모두 만족시킨 소재였다. 아마도 그가 끈질기게 추구해온 ‘사실과의 대화’ 노력 덕일 것이다.

15일 ‘해전사’와 ‘재인식’의 사이에 서 있는 그를 만났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거창한 물음으로 시작된 그와의 인터뷰는 2시간 여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로 진행됐다.

“요즘 언론들의 편가르기식 보도를 보고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를 새삼 되묻곤 합니다. 저는 실증주의자입니다만 그렇다고 사료를 절대적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사실을 뒤집는 사료가 언제든 나타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역사가의 펜은 진리를 좇는 철학자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사실에 바탕을 둬야 하지만 그렇다고 역사가가 자신을 마치 고대 신탁의 사제처럼 스스로 여긴다면 그건 또 다른 이데올로기일 뿐이죠. 역사의 기록은 상대주의는 아니지만 상대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80년대 ‘해전사’나 2000년대 ‘재인식’은 둘 다 역사서로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교수는 ‘해전사’가 민중사관의 영향을 받은 역사 기술이라는 데 일면 동의한다. 그렇지만 좌파 편향적이라고 단정하는 데는 유보적이다.

송건호, 진덕규, 김학준 씨 등 ‘해전사’ 다수의 저자들의 정치적 성향을 보더라도 좌파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다만 ‘해전사’ 저자들이 70ㆍ80년대 민중지향적 시대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그는 역사가 시대와 교감하는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재인식’ 역시 공산권이 거의 붕괴하고 북한 체제의 실패가 명백하게 드러난 2000년대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는 ‘역사는 현재의 문제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 강만길 선생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본 카(E. H. Car)의 말도 같은 맥락인 셈이다.

‘재인식’의 논문들 중 일제 식민지 시기를 기술한 논문은 당시 시대상황과 연관시켜 과도하게 내재적 접근을 하고 있는 반면, 해방 이후를 다룬 논문들은 반대로 결과주의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지적을 전해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

그는 이광수를 ‘친일 내셔널리스트’로 규정한 조관자 교수의 논문에 대해서도 ‘인간 이광수’의 고뇌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역사의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 않느냐며 비판했다.

친일과 내셔널리스트를 개인이 어떻게 녹여냈는지 몰라도, 역사 기술에 있어서는 ‘과도한 개념적 곡예’라는 지적이다.

좀 더 철학적으로 보자면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이면이 있게 마련이다. 뒤집어 보면 일제든 친일이든 한국전쟁이든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 이외의 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걸 이해하면 되는 일이지 그 이면을 ‘정사(正史)’로 기록할 수는 없는 게 아니냐는 것이 이 교수의 생각이다.

또한 그는 사료의 축적과 고증의 편이성 차원에서도 20년 전 ‘해전사’와 지금의 ‘재인식’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사료 발굴 차원에서 보면 20년 전 ‘해전사’의 연구들은 한계가 많아 이젠 박물관에 가야 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전사’ 세대라는 386들의 역사인식이 여전히 80년대 식의 과거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단편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이란 꼬리표를 붙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언론의 도식적 역사 분류에 불만

그는 ‘해전사’를 좌파가 본 역사, ‘재인식’을 뉴레프트의 역사라는 식으로 도식적 분류를 하는 언론에게도 불만이다. ‘재인식’을 안티 테제가 아닌 후속 테제로 자리매김 해달라는 주문이다.

그 간의 학문적 발전과 축적으로 기존 ‘해전사’를 수정ㆍ보완한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다. 또 고증의 차원을 넘은 부분은 다양한 역사 해석의 하나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란 소리다.

사실 ‘해전사’가 없었다면 ‘재인식’도 없다. 그는 선학(先學)의 연구 중 일부 오류가 있다면 설득력 있는 사료로 수정하면 되지 연구 전체를 폄하할 것까지는 없다는 태도다.

어떤 면에서는 ‘재인식’의 일부 필진이 언론의 과잉보도를 유도해 놓고 뒤늦게 ‘그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대응한다고 꼬집는다.

화제를 돌려, 20년 넘게 해방 공간의 한국 정치를 연구한 학자로서 ‘만약’이란 접두어를 붙여 그 당시를 생각할 때 가장 아쉬운 역사가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그의 즉답은 몽양(夢陽) 여운형(1886~1947년)과 고하(古下) 송진우(1890~1945년)의 좌우합작 실패를 든다.

그의 논문 ‘해방 직후 국내 정치 세력과 미국의 관계, 1945~1948’에 의하면, 1945년 8월15일 일왕이 항복 조서를 발표한 직후 행정권을 인수한 여운형은 이날 오후 우익 거두인 송진우와 좌우합작을 시도했다.

하지만 송진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바람에 합작이 실패했다.

결국 다음날 여운형과 안재홍 정백 세력이 주축이 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했고, 광복 직후의 건국 사업이 첫 단추부터 좌·우익의 대립의 형태로 진행됐다는 것이 이 교수의 해석이다.

이 교수는 당시 고하가 임정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 정세 판단 측면에서도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것이라고 오판하는 바람에 우익 입장에 서서 사태를 관망했을 것으로 본다.

또 역으로 여운형을 비롯한 건준 주도세력이 소련 진주설이라는 부정확한 정보를 과신한 탓에 송진우를 빼고 안재홍만 포섭해 건준을 의도적으로 좌경화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이 뭉쳤더라면 좌우 연합의 국가 건설이 현실화했을 거라고 평한다.

“사료가 있다고 해서 생각만큼 과거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는 일이죠. 늘 당대의 주역들과 대화하려고 해요. 그런데 그 쪽에서 시침을 뚝 뗄 땐 정말 난감하죠.”

이 말을 하며 그는 인터뷰 내내 굳었던 표정을 조금 푼다. 사료와 사료 사이의 공백에서 고민하는 학자의 고백이다.

역사에서 ‘만약’은 부질없는 일이다. 불필요한 아쉬움만 낳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이 없다면 역사는 상상력의 빈곤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인간은 사실들만으로는 사유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은 인간세상 바깥의 일일 터이다.

그래서 그는 고증된 여러 사료들과의 대화를 통해 역사가 나름의 논리적 분석작업을 해 놓은 것을 읽는 이가 ‘역사의 현재성’에 맞게 취사 선택할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얘기한다.

세상 만사 너무 힘이 들어가면 탈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재인식’을 둘러싼 논쟁도 소모적인 비난보다 생산적인 공방으로 진행돼 ‘현대사 연구의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길 그는 소망했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