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 이정수 - 잘나가던 개그맨에서 배고픈 연극배우로 욕심과 오기로 '대학로 스타' 반열에

“개그맨으로 유명세를 누리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배고프죠.사서 고생하냐는 소리도 듣지만,배고픔도 언젠가는 인정받을 배우들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해요.”

개그맨 이정수? 아니, 배우 이정수로 그가 돌아왔다.연극 ‘강풀의 순정만화’에서 순진한 30대 총각 김연우 역으로.‘뉴 보잉보잉’으로 신고식을 치른 그에겐 두 번째 연극이다.

눈이 함박 쏟아지던 7일 저녁, 이정수를 만나러 대학로 신연 아트홀을 찾았다.불이 꺼진 객석에 홀로 앉아 있는 얼굴 잘 생긴 이 남자는 “죽도록 연기가 하고 싶었어요”라며 두 눈을 반짝인다.

‘분위기 썰렁해지면 다시 온다’,‘어차피 홀로 가는 인생’,‘천상천하 유아독존’ 등 튀는 유머로 인기를 끌었던 이정수는 전직이 개그맨이었나 싶을 정도로 연기 철학을 갖춘 진지한 배우로 변신해 있었다.연극 무대는 원래 그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처럼.

그는 우직하고 또한 독하다.개그맨 시절에도 ‘4년 안에 못 뜨면 그만 두어야지’라고 결심했다.자신이 가진 능력 중 ’독특함’을 찾아내 특화시키려 노력했다. 그것이 개그계에서 빨리 인정받은 비결이다. 2002년 KBS 개그맨 17기로 입사해 그 해 우격다짐 개그로 KBS연기대상 코미디 부문 신인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6개월 무명시절 아무도 안 불러줘 오기가 생겨 만든 ‘우격다짐’은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린 코너가 되었다. 당시 24세의 그는 개그계의 샛별이었다.신인상에 오르기도 힘든데 그 상을 받은 후 2년도 안돼 2004년 초 은퇴선언을 했다. 다들 “정신 나갔다”고 비난했고 “바보 같다”며 혀를 찼다.하지만 연기에 대한 열망은 모든 시련을 이겨냈다.

두 가지를 동시에 못하는 성격이어서 개그맨을 그만두고 연기에 올인했다.다시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4년 안에 인정 받지 못하면 그만 두자고.비교적 어린 나이에 스타덤에 올랐지만 서른이 되기 전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싶은 모험심이 발동했다.

평생에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연기였다.그는 언제나 자신의 선택을 존중했다. 개그맨을 그만 두자 일 년 반 동안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노는 체질이 아니라 쉴 동안 운동으로 몸을 다듬고 연기 공부에 매진했다.취미로 시나리오를 쓰며 연기자로 거듭나기 위한 숙련의 시간도 가졌다.

연극 ‘뉴 보잉 보잉’으로 신고식을 치를 당시 웬만해선 기죽지 않는 성격인 그도 딱 아홉 번을 울었다.승부욕이 강한 성격이라 양동근이나 조승우 같은 연기파 배우를 보면 질투가 났다.자신의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자괴감은 그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배우로 만들었다.

단점은 테크닉의 부족이고 장점은 진실함과 열정이란 평을 들었다.첫 무대치곤 괜찮은 칭찬이었다. "‘연극은 play다.그러니 무대에서 즐겨라!’란 선배의 말이 가슴 깊게 와 닿았죠.결국 죽도록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해야하는 건데 혼자 무거운 짐을 짊어진 양 힘들게 굴었거든요.연기엔 정답이 없는 것 같아요.진실하되 때론 기술도 필요한 법이죠.”

이정수,그는 욕심쟁이 배우다. “‘뉴 보잉보잉’의 바람둥이 조성기 역에는 역시 이정수가 딱이야.‘강풀의 순정만화’의 김연우 역은 이정수가 잘 해.욕심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런 평을 듣기 위해 무대에 올라요.혼신의 힘을 다하는 거죠.” 피나는 노력과 열정은 욕심과 비례하기 마련이다.

이 성실한 노력파 배우는 과연 언제부터 배우를 꿈꾸었는지가 궁금해진다. “개그맨으로 얼굴이 알려지기 전부터 연기를 했어요.꿈이 배우였으니.개그맨을 그만두고 전업하겠다고 했을 때 생각보다 큰 고통이 따르더군요.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당연히 수반되는 시련이라 생각하며 견뎠죠.”

올해 28세.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올인하며 꿈을 이루는 것이 그의 목표다.

조급할 나이는 아니다.하지만 개그맨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그가 넘어야 할 산이다.자칫 실수라도 하면 ‘개그맨이어서 그래’라고 편견을 가지고 바라볼 것 같다.무대에 설 때마다 그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무대에 오르면 늘 이 순간이 나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요.오늘 서는 무대는 어제보다 성숙돼야 하고,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배우로 거듭나고 싶어요.” 개그와 연기를 겸할 수도 있었지만 한쪽은 가짜 인생 같아 싫단다.진실되게 한 가지 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그렇게 최고가 되면 스스로에게도 떳떳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우직하게 배우의 길을 걸어가는 이정수는 개그맨 출신이라는 산을 넘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관객에게 ‘배우 이정수’로 인정받는 것이다.큰 산을 넘으니 ‘뉴 보잉보잉’에 이어 ‘강풀의 순정만화’가 다가왔고, 이어 4월에 막오르는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의 박문호 역에 캐스팅 됐다.

“바람둥이,순진남,도박 중독자, 세 가지 역할을 해요.앞으론 냉혈한이나 킬러 역을 한번 맡고 싶어요.” 무대 위에서 인생 공부 중인 이정수. 호기심 많고 욕심 많은 그가 소화해내지 못할 배역이 어디 있으랴.

‘분위기 다운되면 다시 오겠다’고 외치던 우격다짐의 그가 진정한 배우로서 대학로의 분위기를 한껏 업시키기 위해 오늘도 무대 위에 오른다.배우가 되는 길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험난하고 고독하겠지만 빛 볼 그 날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여정은 즐겁게 보인다.

연극 '강풀의 순정만화'
가슴 속에 꼭꼭 숨은 첫사랑을 꺼내다

연극 강풀의 순정만화 만화가 연극 무대에 올랐다.인터넷에서 최고의 조회수를 기록해 네티즌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강풀의 순정만화가 그것이다.관객의 호평으로 앙코르 공연에 들어간 강풀의 순정만화는 '처음 느낌.그 설레이는 사랑 이야기'답게 첫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로맨틱 코미디다.

교복을 입은 18세 여고생 수영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30세 평범한 회사원 연우는 영화처럼 우연히 자주 만난다.고장난 엘리베이터 안에 갇히면서 이들의 우연한 만남은 필연이 된다.

또 다른 만남은 고등학교 2학년인 강숙과 우수에 찬 여인 하경.늘 같은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하경을 보고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 강숙은 하경의 환한 미소에 마음을 뺏기게 된다.하지만 옛사랑의 상처를 안고 사는 하경은 좀체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눈치 없이 하경을 따라다니며 애정공세를 펼치는 강숙.

연극은 두 가지 만남을 서로 엇갈리는 시간 속에 교차하면서 사랑,이별 그리고 만남을 잔잔하게 이야기한다.

재밌는 것은 연극에서 주인공 남녀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이다.만화 속 주인공처럼 남녀의 얼굴이 빨개지는 장면은 빨간색 조명으로,문자를 보낼 때는 엑스트라가 칠판을 가지고 나와 직접 쓰게끔 한다.

또한 마음이 스산해지는 장면은 선풍기 바람으로,첫눈은 비누 방울로 처리된다.떨리는 마음은 '두근두근' 놀랄 때는 '화들짝' 등 의성어,의태어의 사용은 만화를 재현한 듯한 느낌이다.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연출의 힘이라면 주인공들이 만화 장면의 인물과 근접한 것으로 연상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력 덕분이다. 특히 1인 7역을 맡은 엑스트라 역 서승원의 활약은 연극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래서 객석은 시종 웃음바다가 되다가도 어느새 훌쩍이기까지 한다.

연극은 재밌고,때론 슬프다.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