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두나 사진집 '두나's 런던놀이' 미리보기

사진의 맛은 노출(빛)과 셔터 스피드(시간), 그리고 ‘거리(공간)’가 좌우한다. 피사체와 렌즈의 거리, 초점이 머무는 한 점과 그 점을 감싸는 배경이 이루는 아스라한 깊이, 포착된 이미지와 응시하는 시선의 거리.

한 장의 사진이, 누구의 말처럼,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보는 사람이 각기 다른 관심으로 어우러지고 부딪치는 만남의 자리라고 한다면, 그 마음과 마음의 거리야말로 사진의 맛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세상 속 모든 만남의 맛도, 한 장의 사진처럼, 여러 층위로 형성되는 그 거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지 모른다.

배두나와의 인터뷰는, 그래서 두려웠다.

사진집 ‘두나’s 런던놀이’(옐로우미디어)를 만들고 있는 그와의 인터뷰는, 작가와 기자라는 비교적 냉정한 거리를 요구하는 만남이었으나, 기자이기 이전에 그의 팬이기도 한 나는 인터뷰이로서의 ‘거리 두기’에 자신이 없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괴물’의 홍보 일정에다 간만의 TV드라마 촬영으로 분주할 그가 두 대의 카메라와 사진집(가제본)을 들고 삼청동의 한 카페에 들어섰을 때, 나는 세상에 갓 나온 사슴처럼 크고 투명한 그의 시선에 눌려 눈 둘 데를 못 찾아 우왕좌왕하면서 초점 잃은 눈으로 사진집의 사진과 글만 응시해야 했다.

“고무줄놀이가 고무줄을 갖고 노는 것, 공기놀이가 공기를 갖고 노는 것인 것처럼 ‘런던 놀이’는 런던을 가지고 노는 것. 유명관광지에 우르르 몰려가서 기념사진을 정신없이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깃발 가이드 관광 같은 것은 왠지 그 도시가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에게 있어 ‘여행’이란 곧 ‘놀이’이다.”(책 머리에서)

오래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은 사진

- 여기 이 글들…, 모두 직접 쓰신 건가요.(이런 멍청한 질문이 있을까)

“부족한 글이어서 두려워요. 하지만 진실하게 쓰고 싶었어요. 누가 대신 쓰거나 고쳐주면 마치 대역을 쓴 것 같고 내가 포장된 느낌을 받아요. 이 글 그대로 걸러지지 않고 나가기를 바라요.”

- 사진도요?(휴우~, 젠장!)

“(웃으며 그는 자신의 카메라들을 만지작거렸다) 이 아이들이랑 논 지 2년 남짓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절대로 ‘프로’는 아니에요. 연기와 사진을 병행한다는 식으로 과장될까 두려워요. 사진은 제 놀이예요. 그래도, 기간은 얼마 안 되지만 이 아이들과 정말 뜨겁게 놀았다고는 말할 수 있어요.”

어눌한 기자가 안쓰러웠던지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또박또박 혼자 풀어나갔다.( ;) “하나에 몰입하면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지우개를 모았는데 용돈을 아껴 사 모은 지우개가 피아노 의자를 가득 채울 정도였어요. 영화처럼 사진도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질리지 않고 오래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서울의 한강을 뛰어다녔던 트레이닝복. 영화 ‘괴물’의 촬영이 끝나고 런던여행을 왔다. 언제나 한 작품의 촬영이 끝나면 짧게라도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는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한다. 새로운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복수는 나의 것’ 촬영이 끝나고 뉴욕을 갔고,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촬영이 끝나고 도쿄에 갔듯이. ‘괴물’을 비우기 위해 런던에 왔다. 한강의 박남주를 템즈강에 두고 온다.”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다분히 일상적이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연기와 일상의 경계가 모호한 그에게 그 ‘아이들’은, 일상 속에 자신의 한 끝을 묶어둔 말뚝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스크린에 몰입은 하되, 아예 스크린 속으로 사라져버리지는 않게.

“저와 함께 노는 ‘아이들’이 스무 대쯤 돼요. 이 오래된 롤라이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예요. 한 번 보세요. 렌즈에서 연륜이 느껴지지 않나요? 잘못 찍은 사진조차 제 연륜으로 걸러주는 것 같아 든든해요. 반면에 이 라이카는 결과물이 탁월해요. 뷰파인더를 통해 본 행복을 배신하는 일 없이 그대로 전해주죠.”(책에는 그의 ‘아이들’ 각각에 대한 소개도 있다.)

그의 사진들은 런던의 일상을 담고 있다. 고단한 도시인들의 저문 하루가 담긴 튜브(지하철)의 풍경, 심상한 거리와 사람들의 표정, 얼굴을 맞대고 폰카를 든 연인의 모습, 그리고 그 런던을 가지고 노는 그녀의 모습….(그녀가 피사체로 등장하는, 거울 영상이 아닌, 사진들은 패션사진작가 윤석무 씨의 작품이라고.)

모든 의미가 그러하듯, 사진의 의미 역시 모호하다. 피사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사진을 찍는 이가 담고자 하는 바, 그 사진을 바라보는 이가 찾고자 하는 바가 만나 ‘서로 버무려지고 충돌하며’ 이루는 모호함. 그 중에서도 특히 사진 속에 투사한 그녀 자신만의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제가 보여주기보다는 남이 상상해주기를 바라요. 의도나 의미가 발설되는 순간 이미지는 깨져버리잖아요. (지하철 전동차 안 풍경사진을 가리키며) 전 이 튜브의 사진에 동그란 빛의 느낌을 담고 싶었지만, 보는 이들은 다른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지 않겠어요? ”

그의 이 야무진 말들을 들으며, 나는 기억 속 영화의 여러 장면들(헤드랜턴을 쓰고 책을 읽던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와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을, 그의 오래된 수동 카메라들을, 디지털적이고 즉물적인 인상이 아니라 깊고 느리게 감응하는 그 아날로그의 이미지들을, ‘불친절한 두나씨’라는 그의 블로그 문패의 의미와 ‘무심이’라는 별명의 맥락을 더듬고 있었다.

런던에 내 존재의 일부를 남기고 오다

책에는 런던과 런던을 가지고 노는 그의 다양한 표정들, 에피소드와 여행정보 등이 7개의 챕터 속에 담겨 있다. 그리고 ‘런던에 두고 온 것들’이라는 챕터의 맨 끝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런던의 한 공원에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을 남기고 온다. 무언가를 남기고 온다는 것이 좋다. (…) 유명한 관광지에 머리핀이라도 하나 숨기고 온다든지. 나는 세인트제임스공원에 나의 셀프샷이 담긴 필름 한 통을 커다란 나무 밑에 묻어두었다. 2006년의 나의 이 모습을….”

내가 좋아하는 작가 존 버거는, 사진작가 장 모르와 함께 한 사진에세이집 ‘말하기의 다른 방법’에서 사진과 영화의 서술형식을 비교하며 사진은 과거 회상적이며 영화는 미래지향적이라 했다. 정지된 사진이 기억을 통해 ‘거기 있었던 것’을 찾는다면, 영화는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한 기다림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득한 거리를 두고 두 서술형식이 만나는 어느 한 지점에서, 일(영화)과 일상(카메라)의 그 모호한 경계 어디쯤에서, 런던에 두고 온 그 필름처럼, 과거를 담아 미래의 어느 날을 예비하는 현재의 배두나를 이 책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불친절하게, 무심하게, “제시는 하되 설명 없는 함축으로.”

결국 나의 인터뷰는 실패였지만, 그는 그 실패마저도 즐거운 ‘놀이’로 여기게 만들었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