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작고 여린 몸이 만신창이라니… "기적같은 하루하루가 감사할 뿐"인공 호흡기에 의지… 기도 절개·직장 제거로 고통, 의료지원 혜택도 못 받아

“은혜는 분명히 살 거예요. 초롱초롱한 눈빛이 희망을 줘요.”

경기 안산시에 사는 백한나(34) 씨는 임신 7개월 무렵, 호흡이 가빠지고 가(假)진통 같은 복통을 느꼈다. 급하게 산부인과를 찾았으나 별 이상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꼬박 열 달을 채우고도 예정일을 열흘이나 넘긴 2004년 6월 14일, 12시간의 진통 끝에 체중 3kg의 여아를 낳았다. 난산이었다. 그러나 힘겨운 출산의 아픔이 잉태의 기쁨으로 바뀌기도 전에 시련이 닥쳤다. 아기가 태어나서 3분도 지나기 전에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이튿날에는 입술과 피부가 퍼렇게 변하는 ‘청색증’까지 보였다. 의료진은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종합병원에서 뇌, 폐, 기도 등 온몸 구석구석 정밀 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모든 검사 수치는 정상이었다. 아기는 숨을 못 쉬어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데 원인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병명도 모르고 가슴 졸이며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3개월을 지냈을 때 ‘폐혈증’이 왔다. 감염이 일어나 혈액에서 세균이나 진균이 발견된 것. 아기는 소변을 보지 못하면서 몸이 붓기 시작했다.

그 후로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의사가 보호자를 찾았다. “오늘만 보고, 다시 오지 마세요.” 은혜가 너무 힘들어서 이젠 그만 떠나려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졌다. 엄마 백 씨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듯했다. 태어나서 따뜻한 엄마 품에 한번 안겨 보지도 못한 어린 생명을 두고 발길을 뗄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아가의 모습은 참담했다. 소변으로 배출되어야 할 독소들이 몸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서 장기들을 마구잡이로 손상시키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심장, 폐, 소장 등 장기들이 모두 제 기능을 잃었다. 채 100일도 안 된 어린 아기의 얼굴은 엄마 얼굴보다도 더 크게 부풀어 올랐고, 눈도 퉁퉁 부어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눈물로 밤새 기도를 올리던 새벽녘, 기적이 일어났다. 오전 5시 “어머니, 아기가 소변을 보기 시작해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이어 심장에 찬 물을 뽑아내고, 썩어 들어간 소장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호흡을 돕기 위해 입에 심었던 관도 뽑고 대신 기도 절개 수술을 받았다. 人공 호흡기도 달게 됐다.

그러나 겨우 한 고비를 넘어서자 이번엔 계속 배가 부어 오르는 증세가 나타났다. 관장으로 변을 빼주면 배가 가라앉다가도 뭔가를 먹으면 다시 부풀기를 반복했다. 대장, 특히 S형 결장 및 직장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비대)된 ‘거대결장’이었다.

그때가 생후 5개월. 직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해야 했지만, 그러기엔 아기가 너무 어리고 작았다. 병원에서는 당시 4kg에 불과한 아기의 몸무게가 2kg가량 증가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하지만 꼬박 열 달을 채워 중환자실에서 나올 때도 아이의 체중은 6kg이 안 됐다.

“전 세계적으로도 이런 증상을 가진 아이는 200명이 채 안될 거래요. 대부분 신생아 때 많이 죽고, 좋아져도 열여덟 살을 넘기는 것은 어렵다고···.”

희귀병 중에도 희귀병에 속하는 아기의 병명은 ‘선천성 중추성호흡곤란증후증’. 그것도 정확한 병명은 아니란다. 주요 증상이 유사할 뿐, 정확하게 일치하는 병명은 아직 의료계에도 보고된 게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두 달 전부터는 급작스레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생후 26개월에 들어서면서 호흡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은혜의 천진난만한 모습, 최근 증상이 다소 호전되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은 언제나 조마조마하다. 임재범 기자
것이다. 낮에는 인공 호흡기를 떼고도 한참을 잘 논다. 더디고 더디게 증가하고 있지만, 몸무게도 이제는 거의 10kg에 이르렀다. 건강한 아가들에 비하면, 돌 무렵에 불과한 발달 수준. 하지만 이만해도 엄마도 기쁘다. “희귀난치성 호흡 곤란증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호흡이 좋아지고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마음을 놓기는 아직 이르다. 엄마의 심정 같아서는 아픈 아이에게 맛난 음식이라도 실컷 먹여주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한다. 대변 문제 때문이다. 직장을 떼어낸 후론 아기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변을 본다. 하루종일 변이 줄줄 세어 나오니까 아이 엉덩이 속이 다 헐어 버렸다. 이로 인해 변을 볼 때마다 쓰라려서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내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또 하나의 아픔이다.

게다가 두 돌이 지났음에도 걸음마도 떼지 못한다. 자세히 보면 오른쪽 다리가 뒤로 약간 휘어져 있다. 엄마는 생사를 오가는 위급한 상황이 거듭되다 보니 발달 상황에는 세세히 신경을 쓰지 못했다며 가슴 아파한다.

자다가도 가래가 쌓일까, 숨이 가빠질까, 엄마는 밤에도 가슴 졸이며 겨우 눈을 붙인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와 함께 한 2년여 동안 하루도 감사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기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아기의 이름은 ‘은혜’. 출생 직후 호흡 곤란으로 힘들어 하는 아기를 보면서 기독교신자인 은혜 외할머니가 “우리 은혜, 하나님의 은혜로 살려주세요”라며 울부짖은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됐다.

그런 은혜를 엄마는 ‘부모에게 힘을 주는 아이’라고 했다. 지난 6월 4일, 그 가녀린 몸으로 5시간에 걸쳐 직장을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았을 때도 수술 직후 은혜는 신기하게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료진을 바라봤다. 한참 후 중환자실에 들어선 엄마를 보고서야 참았던 듯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 은혜도 이렇게 잘 견디는데 부모가 힘을 내지 않을 수 없죠.”

병원에서도 희귀병임에도 불구하고 지원 받을 길이 없는 은혜에게 따스한 관심을 가져줬다. 은혜 부모를 대신해 의료진이 나서 보건복지부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일부 희귀병은 인공 호흡기 대여 지원이 가능하지만, 은혜는 인공 호흡기가 꼭 필요한 호흡 곤란 증후군인 데도 혜택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술비와 입원비는 제외하고라도, 인공 호흡기 대여비만 한 달에 70

만~80만원이 들었다. 엄마는 “은혜가 지원 받는다기보단 앞으로 비슷한 고통을 겪을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법이 개선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은혜는 앞으로도 정확한 원인도 모른 채 얼마나 긴 사투를 벌여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인생의 꽃을 제대로 피워보기도 전에 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는 “하루하루 좋아지고 있기에, 나쁜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은혜는 아주 간혹 가냘픈 신음 소리로 ‘엄마, 아빠’를 부른다. 기도 절개 때문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리 없지만, 어린 생명은 스스로 소리 내는 법을 터득한 듯하다. 그런 은혜가 엄마는 말할 수 없이 고맙다.

“혹여 은혜가 중도에 가슴 아픈 일을 맞는다 해도 마냥 슬퍼하지는 않을 겁니다. 짧지만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심치 않을 테니까요. 이름도 모를 병에 맞서 꿋꿋하게 투병한 기적들이 다른 아픈 아이들한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엄마는 “은혜가 몰라보게 좋아진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돼서 기쁘다”고 거듭 강조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은혜의 병은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경우로 보고 되어 정확한 진단이 어렵고, 구체적인 치료법도 밝혀진 것이 없는 암담한 상황이지만, 엄마와 은혜는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찾아낸 듯 보였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