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세계가 손끝에서 완성되는 희열이 있죠"물이끼 이용, 화분용 인형이나 장식용 동물상 만드는 자연공예·정신건강에 도움

“본인 생각에 (남에게 주기)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들어야 좋은 작품이고, 그 생명도 오래 가요. 실제로 너무나 공들여 만든 건 너무 아까와서 팔지도 못해요(웃음). 그럴 땐 돈도 눈에 안 보이죠.”

수공예가 박명숙 씨는 토피어리(Topiary)를 만든다. 토피어리는 일본 열도의 인기를 거쳐 지난 2001년 국내에 들어온 신종 공예다. ‘다듬는다’는 뜻을 가진 토피어리의 기원은 고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은 화분용 인형이나 장식용 동물상을 비롯해 원하는 것을 다 만들 수 있다.

작은 토피어리 곰인형은 주변에서 가장 흔히 만나게 되는 작품. 주재료로 물이끼를 사용하기 때문에 봉제 인형과는 또 다른 특성을 띤다.

식물 재료라 촉감도 다르지만 실제로 공기 속에서 살아 숨쉬는 자연공예품이다. 토피어리 자체가 공기를 뱉고 빨아들이는 기능을 한다. 토피어리 작품에 관엽식물 등을 심어넣어 키우기도 하고, 최근에는 관상용으로 쓸 정원 조경 장식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올 초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정월대보름 행사 때 토피어리로 만든 대형 돼지머리를 만들어 드린 일이 있었어요. 고사 때 진짜 돼지머리 대신에 쓰겠다고 주문을 해서 만든 건데, 행사를 진행하신 분이 ‘현장에서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말해 저도 뿌듯했어요.”

손끝에 포들거리는 촉감이 감도는 물이끼를 비롯해, 재료나 제작 방법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준비물은 기본 뼈대를 만들 철사, 물이끼, 뼈대에 이끼를 입히는 과정에서 사용할 낚싯줄 외에 전정가위, 롱 로즈 등의 기본 공구 정도다.

화분으로 쓸 경우 토피어리에 심을 식물만 더 준비하면 된다. 동물이나 사람 모양의 토피어리를 만들 때 눈이나 코, 입을 표현할 작은 소품들의 경우 기성품을 살 수 있다.

토피어리용 물이끼는 아직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칠레나 뉴질랜드 등의 수입산을 쓴다. 철사는 가늘게는 지름 0.1mm짜리에서부터 굵은 것은 5mm짜리 등 총 4, 5가지를 사용한다.

눈썰미의 차이는 뼈대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드러난다. 철사 뼈대는 토피어리를 만들기 전 가장 먼저해야 할 단계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뼈대 모양은 도안집을 참고해 디자인한다.

대형 작품을 원할 경우, 기본 도안을 원하는 만큼 확대해서 그리면 된다. 주로 초보들은 곰돌이 인형으로부터 첫 습작을 시작해 차차 복잡한 모형으로 옮겨가며 고난도 작품에 도전한다.

뼈대는 일일이 각 부위의 상대 비율이나 수치를 정확히 설정해서 만든다. 뼈대가 제대로 만들어져야 이끼도 잘 덮이고 모양도 자연스럽다. 잘못 만들어진 뼈대는 어차피 완성 과정에서 드러난다. 특히 두 발로 서 있는 자세의 사람 인형을 만들 경우, 애초의 뼈대 도안이 바르지 않으면 완성 후 다리의 균형을 잡지 못해 쓰러지기 일쑤다.

“도안이 견고하지 않으면 모양도 제대로 안 나오고 이끼도 잘 안 붙어요. 물론 이끼를 더 붙이거나 해서 대충 수정할 수는 있지만 사실은 엉터리인 거지요. 이 때문에 아예 ‘안전하게’ 처음부터 앉은 모양으로 도안해 만들거나 네 발짜리 동물을 선호하는 분들도 많아요.”

몇 시간씩 철사를 구부리고 자르는 일을 하다보면 손과 팔뚝에 긁혀 상처가 나기도 한다. 박 씨의 팔에도 군데군데 흉터가 남아있다.

작업 중 면장갑이나 고무장갑을 끼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토피어리 공예가의 상당수가 여성. 철사를 다루느라 공구를 사용하다보면 매번 손아귀에 힘을 주느라 나중에는 손목과 손가락 마디가 저려온다.

도안과 뼈대 만들기 작업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물이끼로 살을 붙이는 과정이 이어진다. 물이끼는 주로 사용하는 갈색 이끼 외에도 초록색이나 빨간색 등 염색된 것들도 있다.

원재료는 건조된 상태로 생산된다. 여기에 물을 충분히 축여 젖은 상태로 만든 뒤 토피어리 제작에 사용한다. 만들기 전 약 1시간 정도만 미리 물을 부어 두어도 말라 있던 물이끼에 속속들이 수분이 스며들어 다루기 좋은 상태가 된다.

특유의 촉촉한 느낌도 색다르지만, 가공 과정에서 항균 처리된 상태라 오랫동안 젖은 상태의 물이끼를 만지더라도 피부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앓고 있던 습진이 낫기도 한다”고 박 씨와 수강생들은 말한다.

“토피어리용 물이끼는 참 신기한 점이 많아요. 물을 축여보면 짧은 시간에 금세, 그리고 많이 수분을 흡수하는 데다 다 만들어 햇볕에 놔두면 초록색으로 변하기도 하거든요. 가공품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이끼 같아요.”

마치 찰흙을 붙이듯 젖은 물이끼를 하나둘씩 모형의 부분마다 붙여나간다. 동물의 경우 대개 팔이나 다리, 귀 등으로 출발해 점차 몸통 부위로 옮겨가며 모양을 만든다.

이끼를 붙인 뒤 이를 고정시켜주는 도구인 투명 낚싯줄로 뼈대와 함께 꽁꽁 감아준다. 인공 접착제는 전혀 쓰지 않는다. 나중에 수분이 말라 물이끼가 바싹 건조되더라도 최대한 낚싯줄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감는 것이 기술이다.

물이끼로 원하는 모양이 완성되면, 필요에 따라 눈, 코, 입이나 장식 리본 등 원하는 소품들을 덧붙여 마무리한다. 화분으로 사용할 경우, 원하는 위치에 원하는 재배 식물을 심어넣고 물이끼로 잘 덮어주면 된다. 식물을 키우는 요령도 어려울 것이 없다. 식물 뿌리가 심겨진 부분을 중심으로 적절한 간격과 양만큼 제때 물을 주면 된다.

관리만 잘하면 오래도록 식물을 키울 수 있다. 설령 실수로 식물이 죽더라도 죽은 식물을 빼낸 뒤 다시 물이끼에 충분히 물을 적셔 새 식물을 심어넣고 이끼로 마감하면 된다.

솜씨가 능숙할수록 토피어리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도 짧아진다. 곰돌이 인형 모양은 이미 만들어진 철사 뼈대를 제공받을 경우 초보자라도 단 두어 시간 만에 완성되지만, 팔뚝 길이 정도 높이의 말 모양을 만들려면 박 씨의 노련한 솜씨로도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

대형 작품일수록 당연히 소요시간도 늘어난다. 작업 자체도 더 고단해진다. 정월대보름 행사 때 의뢰받았던 토피어리 돼지를 만드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것도 급히 서둘러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하며 투자한 시간이다.

“가르쳐보면 솜씨 있는 분들은 빨리 적응하고 익혀요. 1주일에 1회씩, 약 5개월 과정으로 개인강습을 하고 있는데, 그 기간에 약 20점의 작품을 만들어내죠.

열심히 가르쳐드리기는 하지만 일부러 너무 빨리 속도를 내지 않으려고 해요. 너무 급히 따라오려다 보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될 수 있거든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박 씨는 연봉 6,000만원대의 주부 사업가였다. 제법 큰 규모의 유통사업을 꾸리며 돈을 벌었지만, 대신 체력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특히 눈의 통증이 심해 ‘정밀 망막 검사’를 하라는 권고까지 받았던 그는 우연히 TV를 통해 토피어리를 접했다. 그리고 취미 겸 호기심 삼아 배우러 다닌 것이 결국 전업으로 이어졌다.

“뭔가 만들고 배우기를 좋아했던 터라 다른 공예들도 거의 모두 접해봤는데, 그중에도 토피어리가 가장 마음을 끌었어요. 처음부터 다른 분들보다 비교적 빨리 적응하고 작품도 잘 만들어냈던 것 같아요.”

2002년부터 토피어리 공예를 시작, 현재 한국토피어리협회 서울 강서지원 선임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박 씨의 작품은 2005년 모 외국계 의류기업의 홍보 행사 때 대형 토피어리 청바지로 선보여 화제가 된 바 있다. 코엑스 수공예 작품전에도 해마다 출품해 꾸준히 일반인들을 만난다.

자연 재료를 쓰는 데다 초록색을 자주 바라봐서인지 예전의 심했던 눈의 통증이 사라졌다. 수분에 민감한 물이끼의 특성 때문에 “장마철에는 습기를 제거해주고, 겨울에는 가습기 역할을 한다”는 박 씨는 “특히 탈취 효과가 있어서 주변의 잡냄새도 없애준다”고 토피어리 예찬론을 편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 중인 토피어리 공예가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직접 작품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는 이들과 박 씨처럼 주로 교육과 정보 보급에 주력하는 이들이다.

최근 들어 토피어리 작품의 값이나 대여료도 고가로 오르는 추세다. 높이 약 3m짜리 작품의 경우 수백만원에 거래되기도 한다. 대형 토피어리는 1회 대여료만 약 1,000만원 선에 이른다.

박 씨는 현재 몇몇 유명 백화점 문화센터와 학교, 기업 등 10여 곳에 출강하고 있다. 혼자만의 작업 시간이 모자랄 만큼 강습 일정이 빼곡하다. 자신의 작업실에서도 매주 2회 토피어리 교육을 하고 있다. 작업실에는 박 씨가 만든 200여 점의 크고 작은 토피어리가 있다. 이제껏 가르친 수강생이 수백명, 직접 배출한 강사만도 70여 명에 이른다.

“다른 수공예도 비슷하겠지만, 토피어리를 하는 데에도 비율과 수치, 감각이 매우 중요해요. 보기보다 아주 잔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죠. 뭣보다 솜씨가 있어야 하고, 자신감이라든가 상상력 그리고 열의도 필요해요.”

수강생들이 즐겁게 작업하는 모습만으로도 그는 흐뭇함을 느낀다. 언젠가 강습을 받으러 처음 작업실에 왔던 수강생은 10시간이 넘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아 박 씨를 난감케 한 적도 있다.

암 환자였던 다른 수강생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찾아왔다가 토피어리를 만들며 건강이 호전되었다며 고마워한 일도 있다.

“실제로 토피어리 때문에 건강이 좋아진 건지 아닌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마음이 더 건강해졌을 거라는 확신은 분명히 든다”고 박 씨는 말한다.

박 씨를 찾아간 날에도 이미 오전반 수강생들이 다녀간 뒤 2명의 전문 원예치료사들이 박 씨의 지도 아래 동물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이들 원예치료사들은 치료용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토피어리를 배운다고 했다.

실제로 박 씨로부터 배운 간단한 소품들을 자신들이 맡고 있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가르쳐주며 직접 만들게 해본 결과 “훨씬 표정이 밝아지고, 말수가 많아지거나 생기가 감도는 등 눈에 띌 정도의 효과를 보았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외국 수출길도 열리고 있다. 박 씨만 해도 얼마 전 미국에 작품 30여 점을 수출하는 제의를 받은 바 있다. 다만 아직 적정한 시장가격이 설정되지 않아 실제 활황기를 맞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각 공예가마다 수입이 달라 평균 수익을 계산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대형 토피어리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아직 도입기 겸 과도기이므로 자신만의 독특한 창의성과 시장 개척력만 있다면 시기적으로 오히려 토피어리 붐의 선봉으로 자리잡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손재주가 있는 이들이라면 취미 겸 직업으로도 한번쯤 꿈꿔 볼 만하다. 박 씨의 충고 그대로 ‘당분간 돈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다.

● 토피어리 공예가가 되려면

약 5개월 과정의 토피어리 양성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서울에는 현재 교육장이 약 5군데 있다. 강사가 되려면 한국토피어리협회가 실시하는 토피어리 디자이너 자격증을 따야 한다.

시험 내용은 이론과 실기, 포트폴리오 심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 강습소를 이용하는 방법 외에도, 원할 경우 협회 본사에 회원으로 가입해 교육을 받으며 실력을 보강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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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정영주 객원기자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