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있는 사람, 열심히 하는 사람 못 당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 즐겁게 하는 사람 못 당한다"

때가 됐다. 그간 꾸준히 독자들을 만나온 <직업의 세계>가 이번 호로 그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애초에 <직업의 세계>는 일종의 ‘파랑새 증후군’ 예방용 백신으로 기획되었다.

파랑새 증후군은, 부와 명예에 이끌려 흔히 남들이 권하는 인기직종에 뛰어들었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적성을 찾아 용감하게 이직, 전직을 감행하는 현상을 이른다. 과연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이번 종결편은 독자들에게 드리는 일종의 ‘특집 사은품’이다. 전문가들에게는 전문가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수상한 사람만 보면 추격… 보안경비전문가

사우나에서 두어 시간 새우잠… 연예 매니저

꿈속에서도 옷 재단… 방송의상 디자이너

새벽 체조·명상으로 마음 비워… 관세사

헉! 살 속에서 진드기가… 수목연구원

가짜 디스크 환자를 찾아라… 보험 사기 조사관

■ 게으른 일류는 없다.

△ 국악연주자 K씨는 일과 중 아이들 얼굴 볼 시간이 아침 시간 뿐이다. 출근 전 시간은 아이들과 뒹굴며 논 뒤, 세수는 국악원에 출근한 뒤에야 비로소 해결한다. 평균 퇴근 시각이 자정, 새벽 4시까지 연습할 때도 있다. 좀 쉬고 싶다가도 옆방 연습실에서 연주 소리가 들리면 쉴 생각이 싹 사라진다.

△ 매니저 B씨는 하루 평균 300~400통의 전화를 걸거나 받는다. 대부분 새벽에 일이 끝나 아예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도 많다. 근처 사우나에서 두어 시간 새우잠으로 때우고 다시 일하러 나선다. ‘너는 왜 집에 들어오지도 않느냐’는 부모 꾸지람을 자주 듣는다.

△ 방송작가 L씨는 방송 대본을 멋지게, 그리고 일찍 써내기로 유명하다. 50분짜리 다큐멘터리 한 편을 쓰는데 타 작가들의 집필 시간에 비해 3분의 1도 안 걸린다. 대개 작가들은 마감이 닥쳤을 때 원고를 쓰지만, L씨는 일이 떨어진 첫 순간부터 내내 머릿속에서 원고가 진행된다. 당연히 편집 테이프가 나오자마자 그간 머리에 담아뒀던 글들을 일필휘지로 끝내버린다.

공연기획자 손미정 씨, 일러스트레이터 이경국 씨

△ 일러스트레이터 L씨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하루 평균 12시간이다. 1년 전엔 하루 18시간씩 일하며 살기도 했다.

△ 공중파 방송 PD L씨. 국경일과 가족 기념일은 물론, 본인 생일도 곧잘 잊어버린다. 기술 스태프와 다음날 점심을 함께 먹기로 약속을 잡고 이튿날 아침에 출근해보니 현충일이었다.

△ 외환딜러 Y씨. 일을 하던 중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잠깐만!’하며 통화대기를 시켜놓고는 잠시 급한 일만 처리하고 통화한다는 것이 그대로 깜빡 잊어버려 30분 뒤에야 다시 부랴부랴 전화기를 들었다. 친구가 ‘오기가 나서 일부러 안 끊고 기다렸다’고 했다.

■ 악몽의 전설

△ 미생물연구원 J박사는 어느 일요일 새벽 실종 소동을 일으킨 주인공. 전 날밤 실험용으로 가져다 둔 요구르트를 실험실 냉장고에 제대로 넣고 왔는지 헷갈려 밤새 뜬 눈으로 불안해하다가 새벽 동이 트자마자 실험실로 달려갔다. 몽유병 환자처럼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난 아내를 보고 남편이 경악했다.

△ 방송 의상 디자이너 B씨. 한밤중에 자다 말고 ‘어떻게 재단해야 이 라인이 나오지?’ 큰소리로 잠꼬대를 하다가 자신의 소리에 자신이 놀라 잠을 깼다.

△ 자신이 만든 단행본이 출간된 다음날. 본문을 읽다가 오자를 발견한 출판기획자 J씨. 아무래도 독자들이 바로 알아챌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그 날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의 회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꿈을 꿨다.

■ 못 속이는 직업병

남들은 다 알고, 본인만 모르는 직업병을 갖고 있다. 완치가 불가능하다.

△ 보안경비전문가 S씨는 아내와 산보 중 우연히 강도를 목격하고 쫓아가 잡은 일만 몇 번에 이른다. 자상한 애처가이지만 일단 수상한 상황만 눈에 띄었다 하면 이를 뒤쫓아가느라 아내도 뒷전이다. 한국판 다이하드의 주인공.

△ 신용조사원 Y씨는 집에서 대화기피 대상이다. 무엇이든 꼬치꼬치 캐묻는 버릇이 몸에 배어있다.

초등학생 아들이 ‘오늘 달리기에서 꼴찌했다’고 하면 여느 아버지의 경우 단 한마디 정도로 끝날 대화도 윤씨는 ‘네 앞에 달린 아이랑 어느 정도 간격이었냐’로부터 시작해 질문이 ‘조사’화법으로 이어진다. 겪을 대로 겪은 아내는 남편 Y씨의 질문이 2,3단계만 넘어도 숫제 못 들은 척 연기한다.

△ 출판기획자 J씨의 전언. 편집 중독 초기 증세에 걸리면 거리의 간판이든 식당 메뉴판이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마다 모두 교열하려 든다. 오ㆍ탈자나 맞춤법, 띄어쓰기가 잘못된 것을 보면 절대 가만히 지나가지 못한다.

푸드스타일리스트 박용일 씨

■ 화려함 뒤의 상처와 눈물

△ 카메라맨 K씨는 철원의 한 기념행사 때 4단짜리 받침대에 올라가 촬영하다가 인파에 받침대가 흔들려 추락사고를 당할 뻔 했다.

후배 카메라맨 K씨는 아이슬란드에서 촬영 중 암벽을 오르다 떨어져 사망했고, 드라마 제4공화국 촬영현장에 돌연 음주운전 차량이 덮쳐 카메라맨 J씨가 사망한 사고는 유명하다.

△ 댄서, 일명 백댄서 H씨는 후배들에게 ‘연예인과 절대 친해지지 말라’고 맨 먼저 교육시킨다. 무명 시절에는 예의 바르고 인정 많던 가수들, 특히 어린 가수들은 일단 인기만 얻고 나면 댄서든 매니저든 시녀 정도로 취급한다.

‘친해지면 너희만 상처받게 된다’고 단단히 일러둔다. △ 잘 나가는 일러스트레이터 L씨도 초창기엔 월 수입 20만~30만원으로 살았다. 애써 그려간 그림이 대여섯번씩 퇴짜를 맞고 수정요구를 받을 땐 ‘고작 5만원을 벌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가슴이 울컥한 적도 있다.

△ 수목연구원 C박사. 수목 채집을 위해 언젠가 출장에서 돌아온 지 1주일쯤 지났는데 자꾸 몸이 가려웠다. 긁다 보니 산에서 붙어 온 진드기가 살 속에 파고 들어가 있었다.

■ 위기나 실패에 주눅들지 않는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위기 시에 판가름 난다.

△ 막 출근채비를 하고 있던 방송조명감독 J씨. 새벽 생방송 30분전에 갑자기 콘솔의 고장으로 스튜디오 전체에 전혀 조명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긴급연락을 받았다.

정신 없이 방송국으로 달려간 J씨. 전례 없는 초대형 방송 사고가 예고되고 있었다. J씨가 갑자기 PD에게 ‘방법이 있다’고 외치고는 케이블을 끌어와 옆 방 콘솔에다 조명등을 하나씩 연결해나가기 시작했다. 방송 시작 직전, 아슬아슬하게 작업이 완료됐다. 평소처럼 무사히 방송이 나갔다. 나중에 내막이 알려지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 판매실적 저조로 부득이 모 거래처에 퇴점 통보를 해야 했던 머천다이저 C씨. 그런데 상대회사 사장은 막무가내로 ‘절대 못 나간다’고 버티며 거세게 반발했다. 때는 온 몸이 얼어붙는 한겨울.

C씨는 매일 새벽마다 해당업체 사장 집에 찾아가 문 앞에서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사장이 나올 때마다 끈질기게 호소하고, 수시로 밥과 술까지 사며 달래고 설득해야 했다. 얼마 뒤 서로 원만한 퇴점이 이뤄졌다.

△ 단 한 순간의 오판으로 어느 날 하루 만에 수십억 원을 날린 외환딜러 L씨. 그날 퇴근길부터 다음날 출근 때까지 그 같은 지옥의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예의 실력으로 전날의 손실을 말끔히 만회해 회사와 동료들의 놀라움을 샀다. 딜러에게나 인생에서나 가장 중요한 수칙은 ‘손절매’에 대한 결단력이다.

■ 사소한 단서도 놓치지 않는다.

△ 공정거래 조사관 J씨는 95년 하도급 문제로 한 건설업체를 조사하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담당자가 이들 팀을 위층으로 데려가더니 계속 앓는 소리만 하며 붙잡아두는 낌새가 이상했다.

J씨가 동료에게 눈짓으로 지시해 아래층으로 내려 보냈다. 슬쩍 아래층에 내려간 조사관이 마침 이면계약서 원본을 몰래 복사하고 있던 여직원을 발견, 결국 덜미가 잡혔다.

△ 해외영업상사맨 L씨는 출장 때에도 오직 새 판로 개척 생각뿐이다. 한번은 묵게 된 호텔 방 안의 전화번호부를 펴놓고 거기에 나온 철강업체 명단을 찾아 무작정 일일이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출장길 비행기 안에서 기내 잡지에 나온 순간온수기와 아파트 광고를 보고 무턱대고 그 시공업체에 연락한 적도 있다. 의외로 그렇게 해서 성사된 계약건수가 많다.

수목 연구원 최명섭 씨

■ 일류는 '대어를 낚는 포인트'를 안다.

△ 1990년 서울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 중계방송에 투입된 카메라맨 K씨. 국내, 외신 할 것 없이 온갖 언론사의 취재진이 다 몰려들어서 치열한 촬영전쟁이 벌어졌다.

다들 한쪽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남북한 대표들을 찍느라 아수라장인 사이, K씨는 카메라 보조원을 시켜 미리 단상 쪽에 가서 단상 앞 중앙 자리에 삼각대를 뻗쳐놓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곧 단상 쪽으로 뛰어갔다. 예상대로 악수를 마친 남북한 대표들이 바로 단상위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다른 촬영팀은 다시 우르르 몰려와 서로 자리를 확보하려 몸다툼이 한창이었지만 K씨는 유유자적, 편안하게 촬영을 마쳤다. 그것도 정면 중앙에서. 방송사에 돌아오자마자 사방에서 ‘너 진짜 잘했다.’고 칭찬이 마구 쏟아졌다.

△ 변리사 N씨. 영국에서 모 유명 패션브랜드의 특허 관련 분쟁 사건을 맡고 있던 특허사무소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패소 확률 90%. 영국 측에선 사실상 포기를 선언하며 N씨에게 마지막 자문을 구했다. N씨는 자신의 사무소 전 직원을 풀어서 대형 서점에서부터 청계천 헌 책방까지 모두 다 뒤지게 했다. N씨의 직감대로, 해당 브랜드가 소개된 책이 한 서점에서 발견됐다. 이 도감을 법원에 제출하면서 사태가 역전, 승소로 극적인 반전을 맞았다.

△ 보험사기조사관 P씨. 보험사기 종목 중 가장 많은 것이 허리 디스크. 상습범으로 의심되는 환자의 경우, 집 주변에 잠복하며 당사자에게 전화를 건다.

신분을 밝힌 뒤, 지금 (멀리 떨어진) xx동에 있는데 잠깐 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얼마 뒤 상대가 집에서 나와 걸어가는 모습을 차 안에서 관찰해 보면 진짜 환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더 확실히 알고 싶을 땐 그 집 앞에 천 원짜리 지폐를 떨어뜨려 놓는다. 세수도 불가능할 만큼 디스크로 고통스럽다던 사람이 아주 자연스레 돈을 집어 드는 장면이 촬영돼 보험사기범임을 밝힌 적이 있다.

■ 성공과 행복을 위한 이구동성 어드바이스

△ 이를테면 나는 ‘맷집’이 좋다. 열심히 일한 결과에 대해 간혹 평가가 좋지 않게 나오더라도 잠시만 마음 상해있을 뿐. 그 원인을 분석해 본 뒤 털어버린다. - 공연기획자 S씨

△ 무엇보다 본인이 가장 즐겁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 로봇 개발자 Y박사

△ 총알을 한꺼번에 다 쏘지 말고 한 발 씩 아껴가며 쐈어야 했다. - 개그맨 S씨

△ 흔히 작가의 운명을 PD가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작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바로 작가 자신이다. 본인이 가장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를 빨리 찾아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 방송작가 L씨.

△ 한쪽에서는 워낙 일감 의뢰가 밀려들어 번번이 거절해야 하는 작가층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배고픈 작가들이 있다. 잘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을 관찰해보면 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 있다. 배고픈 작가들의 그림 공통점은 그림에 개성도, 변화도 없다는 것이다. - 일러스트레이터 L씨.

△ 애써 뛰었던 일이 결국 물거품이 되었을 땐 한강변에 찾아가 하소연 겸 크게 소리 한번 지른 뒤, 돌아서자마자 그 길로 실패는 잊어버린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 자동차세일즈맨 P씨.

■ 최후의 싸움은 체력전.

△ 거의 10년째 매일 새벽 5시면 기 수련장에 나가는 관세사 O씨. 1시간 반동안 체조와 명상으로 자신을 비운 뒤 하루를 시작한다. 한창 풀리지 않던 일 문제도 명상 중에 해답을 얻는 경우가 많다.

△ 미생물연구원 J박사는 10년째 매일 새벽마다 1시간 넘게 운동을 한다. 세균 박사로서 얻은 결론 자체가 스스로 면역력을 키워야 세균과 질병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 건강도 다지고, 밤샘 등 업무 수행에도 왕성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훗날 언젠가 <직업의 세계> 세 번째 시리즈가 시작된다면 그 첫 번째 취재대상은 축구스타 이영표 선수가 될 것이다. 월드컵 당시 누군가로부터 ‘축구를 잘 하는 비결’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재능을 타고난 사람,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못 당한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 즐겁게 하는 사람을 못 당한다.”

그간 <직업의 세계>를 사랑해 준 독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취재를 위해 기꺼이 바쁜 시간을 내어 준 전문가 여러분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방황하는 취업지망생들에게도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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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