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간 대학로서 거리공연… 쩌렁쩌렁 육성·재치있는 입담으로 행인들 발묶어"십시일반 수익금은 소년소녀가장 돕기에 사용해요"

서울 대학로의 명물 윤효상(40)씨는 야생의 개그맨이다. 누가 정식으로 개그맨 공인증을 준 적도 없고, 펑크를 낸다고 해서 뭐랄 이도 없지만, 주말 오후만 되면 행여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주위를 서성대는 팬들이 부지기수다. 그의 거리 공연 구력만 올해로 19년.

그의 ‘공연장’은 대학로 샘터 파랑새 극장 주변 계단형 노천무대다. 기타를 들고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군중이 몰려든다. 요즘으론 드물게 시원스런 육성으로 불러대는 노래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래 사이사이로 내뱉는 ‘웅변’에 가까운 입담의 마력 덕이기도 하다. 마이크 하나 없어도 소리가 사방에 쩌렁쩌렁 울린다.

콘티도 따로 없다. 대부분 즉석에서 즉흥으로 애드립을 터뜨린다. 관객들의 폭소가 연타로 터진다. 스스로 박수까지 치며 장단을 맞춰보려는 관객들에게 ‘발라드 박자에 박수가 웬 말?’이냐고 되레 면박, 가사를 까먹어도 즉석에서 지어낸 채 꿋꿋이 밀고 나간다.

노래가 너무 고음에 치달으면 아예 태연자약하게 옥타브를 팍 내려 부르고도 여전히 용감무적이다. 웬만한 극장용 코미디보다 더 재미있는 현장이 관객들의 발을 묶는다.

“하도 소리를 지르느라 원래 미성이었던 것이 완전히 탁성이 다 됐어요. 다들 저더러 사람들의 생각과 거꾸로 간다고들 해요. 실제로 이왕 하는 거 남들과 똑같이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상식과 반대로 치고 나가곤 해요. ”

인사동에서 다시 만난 윤씨. 은근히 진심을 비췄다가 예외없이 구박을 당했다.

“솔직히, 잘 부르시는 노래는 아니죠?(웃음)”

“그렇다고 못 부르는 노래도 아니쟎아요?(정색). ”

그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 등 음악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어머니 아래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고교시절엔 밴드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음악과 사람들에 섞여 노는 것이 좋아 22세 때부터 대학로에서 거리 공연을 시작했다.

직장생활이라곤 군 제대 후 얼마간 이런저런 잡역을 해 본 것이 전부다. 그 중 제일 장기간 버틴 것이 신문배달 6개월이다. 세운상가의 물건 배달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대학로에 드나들게 되었다.

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멋지게 노래 부르는 거리의 가수에 반해 스스로 보조 노릇을 자청해가며 ‘나도 함께 노래하면 안되겠냐’고 배짱 좋게 물었다가 퇴짜맞은 일도 있다. 연주엔 강하나 박자에 취약한 현재의 파트너(MBC 공채 개그맨 출신 김철민씨)를 만난 것도 대학로에서였다.

윤씨는 KBS TV ‘열린음악회’의 오프닝 분위기 메이커로도 활약 중이다. 이도 벌써 10년째다. 오래 전 한 대학교의 열린음악회 녹화 때 놀러갔다가 방송 준비상 시간이 걸리자 막간에 ‘우발적으로’ 나서서 특유의 노래를 불렀다가 좌중을 뒤집어놓은 윤씨.

사인까지 해달라며 몰려든 초면의 방청객들 옆에 야전점퍼를 입은 한 남자가 찾아와 있었다. 열린음악회 담당 PD였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 프로그램 오프닝을 맡아줄 수 있겠냐’며 제안 받은 것이 이 긴 인연의 시작이다.

“어릴때요? 아주 내성적이고 말 없는 아이였어요. 그런데 군 제대 후 사람들 앞에 스스럼없이 나서서 뭔가 엉뚱한 대답이나 엉뚱한 행동을 할 때마다 저를 보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고서 그때서야 아마 내게 뭔가 끼가 있나 보다 생각하게 됐어요.”

■ 본업은 레크리에이션 강사

윤씨의 생업은 따로 있다. 여느 직장인의 수입 못지않은 대우의 레크리에이션 강사. 거리가 아닌 공식 행사장에서는 몸값이 만만찮은 A급 섭외 대상이다. 얼마 전에도 중국의 한 행사장에 초청받아 다녀왔다. 문제는, 원하는 만큼만 벌고 나면 그 이상 무리하려고도, 돈벌이에 더 욕심을 내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집사람이 늘 제게 하는 얘기가 있어요. ‘당신은 당신이 정한 딱 그만큼만 채우면 거기서 딱 멈추는 사람’이라고요.”

“좋은 뜻으로 한 말일까요?(웃음)”

“아니죠(웃음). 더 벌 수 있는데도 더 벌지 않으니 집사람 입장에서는 서운할거예요. 하지만 저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거든요. 직업도 있고, 좋아하는 공연도 하고, 너무나 사랑스런 아내와 세 아이까지 있으니 더 이상 욕심이 없어요.”

어린 시절 가정사정으로 그는 일찍부터 가난을 경험했다. 한창 자랄 나이에 두 달 넘게 라면으로만 끼니를 떼운 적도 있고, 비닐하우스에서 살았던 때도 있다.

“어릴 때 워낙 어렵게 살아서 그런지, 커서도 웬만한 고생은 고생같이 느껴지지도 않아요. 아마 그래서 아무 벌이도 없이 쫄쫄 굶을 때에도 공연을 계속했고, 그런 와중에도 행복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거리 공연에서 간간이 관객들이 성의표시로 선사한 수익금으로는 어려운 처지의 청소년들을 돕는데 쓴다. 아예 통장도 따로 만들어두었다. 한국복지재단에서 대상자를 추천 받아 형편 닿는대로 계속 숫자를 늘려나가며 소년소녀가장들의 생계를 돕고 있다.

2년전 쯤, 종로 피아노 거리에서 평생 잊지 못할 순간도 경험했다. 저녁 무렵 노천 무대에서 공연을 하던 중 갑자기 험상궂은 남자들이 나타나 ‘누구 허락을 받고 이 자리를 쓰느냐’며 행패를 부렸다.

꼼짝없이 봉변에 처한 윤씨. 일순간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그런데 이를 본 무대 아래의 관객들이 하나둘씩 우르르 무대위로 뛰어올라와 윤씨를 보호하며 문제의 남자들과 맞섰다. 인근 경찰서까지 걸어가 문제의 ‘불청객’들을 인계하고 돌아서보니 거의 50명에 가까운 관객들이 그 먼 길을 함께 따라와 있었다.

■ 벌 만큼만 버는 자족의 미학

“그때 제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알았어요. 별 것도 아닌 저를 돕겠다고 그 먼 길을 걸어서 끝까지 함께 해 준 분들을 보고 정말 가슴이 뜨거웠었어요. 그 길로 근처 술집에 모두 모시고 가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 제주도에서 오셨다는 한 아저씨는 ‘요즘 세상에 이런 곳이 어디 있냐, 오늘 술은 내가 산다’고 고집을 피기도 하셨죠. 누가 뭐래도, 우리 사회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그는 앞으로 11년 뒤인 만 쉰한살이 될 때까지만 공연을 계속 할 생각이다. 딱 30년만 채우고 깔끔히 접을 예정이다. 그땐 자신과 호형호제하는 유명 가수들도 불러서 제법 거나한 기념공연을 벌여보고 싶다.

당연히 이들에게도 마이크 없이 육성 라이브를 요구할 생각이다. 그를 요즘 유일하게 화나게 하는건 대학로 거리를 점거한 마이크와 앰프 부대다. 확성장치들이 등장하면서 그 많던 거리 가수들이 하나둘씩 대학로를 떠나갔다.

한번 공연이 끝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면서도 그가 굳이 성대가 상하도록 큰 소리로 육성 공연을 벌이는 것도 이에 대한 저항의 뜻이다. 그러고보니 그와의 재회 후 맨 일성도 그것이었던 것 같다.

“지난주엔 사물놀이패 소리까지 이겨냈어요! 그게 가능하더라니까요. 저는 끝까지 제 목소리로만 공연을 이어나갈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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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