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기획사 중심 전시회는 큐레이터들 역량 발휘 저해기획력 등 전문성 검증으로 정체성 튼튼하게 확립해야

“신정아 사건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문화예술 활동이 지나치게 상업성을 띄게 되면 문화발전에 저해가 될 뿐만 아니라 또다른 신정아를 낳게 될 것입니다. 큐레이터계의 환경 정비가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지금과 같은 대형 기획사 중심의 전시회나 작품전이 큐레이터들이 역량을 발휘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뺏고 있다는 것이 한국큐레이터협회 박래경(72) 회장의 지적이다.

“기획은 큐레이터의 전문적이고 고유한 영역인데, 수익을 위해 점차 대형 기획사의 기획행사를 더 선호하면서 큐레이터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개인이 운영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문제의 심각성도 이야기했다. 그는 “개인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은 오너들의 입장을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체적인 활동을 하기가 힘들다”며 “오너들 역시 큐레이터를 존중하기보다 부하직원처럼 여기며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지낸 국내 1세대 큐레이터인 박 회장은 지난 8월 한국큐레이터협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협회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협회 출범을 한 달 남짓 남겨놓고 큐레이터였던 신정아의 학위위조와 각종 비리 의혹이 터져나오면서 순식간에 사회.문화계가 충격에 휩싸인 것이다.

큐레이터협회는 창립도 하기 전에 사회적 난기류를 만났고, 순수한 출범 취지와는 달리 일각에선 협회 창립을 신정아 사건과 결부시켜 비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렇게 험난한 환경 속에서 협회가 발을 내딛었고, 박 회장이 첫번째 선장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박 회장은 무엇보다 ‘기초 다지기’에 역점을 두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가 흔들리지 않는다”며 박 회장은 “기본 중에 기본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큐레이터라는 정체성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 뿌리이자 기본이라는 것이다.

“유리컵에 히야신스를 심어서 방 창가에 뒀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얼마나 신기한지 몰라요. 처음엔 뿌리가 조금씩 조금씩 자라는 게 보여요. 뿌리가 점점 길어지고 제법 튼튼해지면 그 다음에 비로소 잎사귀가 자라기 시작하죠. 큐레이터 역시 마찬가지예요. 진정한 큐레이터가 되려면 가장 먼저 뿌리가 되는 기본을 충실히 다지고, 그리고 나서 잎을 키울 수 있어야 해요.”

박 회장이 취임 후 입버릇처럼 강조하고 있는 말이 또 하나 있다. “유리 그릇의 기포처럼 큐레이터계의 불필요한 기포를 제거해야 합니다.”

박 회장은 신정아 사건 역시 “애초에 신정아 스스로가 터뜨렸어야 했던 기포를 눈속임으로 덮어 넘기려다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큐레이터계 내부에 곪아 있는 문제와 결국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협회 출범은 단지 시작일 뿐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와 임무가 막중하다며 개인과 사회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 큐레이터 1 명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 사회가 투자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한 개인의 지나친 욕심으로 허사가 된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제 잘잘못을 따지고 넘어가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정아 사건을 계기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제2, 제3의 신정아 사건을 막기 위해서 큐레이터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 마련과 활동지원이 필요합니다.” 신정아 사건이 큐레이터 문화와 관련업계의 발전을 위한 전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큐레이터협회 창립으로 국내 큐레이터들은 제대로 된 기획과 실력 검증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첫 번째 걸음마를 뗀 것만은 사실이다. 다각적인 활동을 추진중인 협회는 오는 12월 15일 협회창설기념 심포지엄을 갖는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갖고 무성한 잎을 키울 수 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 앞으로 제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인터뷰 내내 박 회장에게서 ‘결연한 각오’ 같은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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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희 기자 leonelga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