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같은 인생살이 페달 놓치면 넘어져요""작품의 생명은 재미"… 치열한 프로근성으로 34년간 변함없는 인기훈훈한 인간미는 또다른 매력…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는 스누피"

영화 ‘식객’이 개봉한지 20여일 만에 누적관객수 200만 명을 돌파했다.

대표적인 영화 비수기로 꼽히는 11월에, 내세울 만한 톱스타도 없는 작품의 이 같은 흥행성적은 놀랄만하다. 영화 흥행의 원천은 다름 아닌 원작. 그런데 영화 본 소감을 솔직히 말하면, 재미와 감동이 원작에 못 미친다.

몇 번의 거절 끝에 어렵게 인터뷰 승낙을 얻어내고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허 씨의 화실로 갔다. 그가 살던 가정집을 개조해 쓰고 있는 화실에는 허 씨와 문하생 4명, 허 씨와 음식취재를 함께 다니는 기자1명 등 총 6명이 일하고 있다.

“난 인터뷰하는 거 정말 싫어 하는데….인터뷰할 때마다 다른 얘길 할 수도 없고. 같은 얘기 되풀이하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겹쟎아.”

거장의 인터뷰 기피 이유치고 색다르다.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만화가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첫 인사말이었다. 그러면서 취재 일화도 들려줬다.

한번은 그가 식객 취재를 위해 마산의 이름난 아구찜 음식점을 찾아갔다. 그런데 주인 할머니가 끝까지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취재를 못하고 돌아왔다. 재미 있는 것은 주인 할머니의 취재거부 이유가 “여기저기서 취재하러 많이 오는데, 그때마다 똑같은 얘기 하는 게 싫어서” 였다고.

그가 만화가를 그리기 시작한 지는 43년째이고, 자기 이름을 걸고 만화가로 등단한 지는 34년째다. 데뷔이래 ‘각시탈’, ‘태양을 향해 달려라’, ‘퇴역전선’, ‘망치’, ‘날아라 슈퍼보드’, ‘사랑해’ ‘식객’ 등 숱한 히트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영화와 드라마, 만화영화로도 제작되며, 다양한 장르에서 인기를 누려왔다. 만화영화로 제작된 ‘날아라 슈퍼보드’는 방송사상 처음으로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퇴역전선’과 ‘아스팔트사나이’, ‘미스터Q’는 드라마로 제작됐고, ‘식객’, ‘타짜’, ‘비트’는 영화로 만들어져 정상의 인기를 얻었다.

현재 ‘사랑해’가 드라마로 제작되고 있고, 내년 5월에는 ‘식객’이 미니시리즈로 방영될 예정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7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의 만화가 변함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만화가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도태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최고를 고집하는 치열한 작가의 근성에서 나온다.

끊임 없이 대중의 인기를 얻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는 “재미 있으니까 보지. 재미 없으면 누가 만화를 봐? 만화뿐 아니라 모든 게 다 그렇지. 난 인문서적도 그런 것 같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책은 인문학 서적이지만 재미있으니까 많이 읽쟎아. 요즘엔 특히 게임이 생겨서 사람들이 만화 잘 안 봐. 그러니까 게임보다 더 재미 있는 만화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 그게 쉽지 않아.”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넘치는 해학,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기술은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재능이 아니다.

“그렇지. 어느 정도 타고난 면도 있지. 내가 그런 점은 우리 아버지의 영향을 많아 받았어. 아버지가 농담 잘 하시고, 좌중을 잘 웃기는 분이시거든. 하지만 재능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허 씨는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냥 쥐어 짠다”는 표현을 쓴다. 작업실 한 쪽에 쌓아놓은 종이를 바라보며, “저렇게 작업을 위해 쌓아놓은 종이를 보면 겁이 난다”고 하는 말에서도 작가가 재미있는 작품을 위해 얼마나 각오의 노력을 쉴새 없이 쏟아왔는지 실감케 한다. 취미생활조차 그에게는 만화를 위한 작업의 연장이다.

식객을 포함해 그의 만화는 책상 앞에 앉아 떠오르는 아이디어로 쓰는 작품이 아니다. 현장을 직접 뛰며 발로 쓰는 만화다. 그래서 그의 만화는 풍부하고 생생한 정보와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식객을 쓰기 위해 지금껏 그가 취재한 음식점은 수천군데. 음식에 대한 지식은 전문가 수준이다. 그의 취미는 등산과 여행, 낚시, 골프, 음악감상 등 다양하다.

취미생활얘기만 들으면 언뜻 그가 정상의 자리에 올라 신선놀음 하는 중견작가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취미는 창작의 중요한 밑거름이 돼왔다. 여행 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사진에 담아 캐릭터 연구에 활용하고, 지인들과 만나 음식점에 가서도 취재를 한다. 요즘엔 매일 3시간씩 관상수업을 듣고 있다. 관상만화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새벽 5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한다. 퇴근 후에는 주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간다.

“나 같은 사람은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좋지. 하고 싶은 일은 다 하고 사는 편이야. 옛날엔 낚시에 미쳤었고, 한참 골프 좋아할 때는 한 달에 15번까지 필드에 나간 적도 있었지.

그렇다고 일을 소홀히 하진 않아. 골프치고 새벽 3시에도 작업실로 와서 일을 마쳤지. 나는 월급쟁이가 아니니까 일 손 놓으면 돈이 안 나오지. 신문사들 만화 연재하면 나한테 ‘우리가족’이라고 말하면서, 휴가도 안 주고 말이야. 연재 하루라도 안 하면 돈 주나? 그게 무슨 가족이야?(웃음). 인생이 자전거 같아. 패달 안 밟으면 넘어져.”

치열한 승부근성으로 다져진 작가 허영만 씨. 그러나 그에게서 각박한 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 소탈한 미소와 말투는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 화실 사람들에게 “여기서 허 씨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자, 이구동성 “처칠”이라고 답했다. 처칠은 영국산 안내견.

허 씨는 어딜 가나 이 하얀색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데리고 다닌다. 처칠은 낯선 사람을 봐도 짖지 않는 전형적인 순둥이다. 그러면 허 씨가 좋아하는 만화는 무엇일까? 찰스 M 슐츠의 ‘스누피’ 란다. 인생에서 후회 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머리를 숙인다.

“죽을 때 이런 말을 하고 싶어. 나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은 나를 용서해달라고. 난 사람들한테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이거든.”

또, ‘식객’에서 왜 대결구도를 택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음식에 대한 정보량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식객’이 대결구도의 구성으로 이뤄진 것은 정보량이 많은 경우 대결구도가 효과적이거든. 하지만 ‘초밥왕’처럼 지나치게 대결구도로 가는 것은 좋지 않아. 재미는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좋지 못해.”

그의 작품이 단순히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위트만 가지고 롱런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훈훈한 정서가 담긴,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에 끊임 없이 사랑 받는 것이 아닐까.

■ 허영만 화백은

1947년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났다. 미대 진학을 꿈꾸다 집안 사정이 나빠지자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10여년 동안 문하생으로 일한 뒤 1975년 '소년 한국일보'의 신인공모에 '집을 찾아서'가 당선되면서 만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데뷔 후 지금까지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 받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에는 스포츠만화 '태양을 향해 달려라'(1977), 음악에 대한 만화 '고독한 기타맨'(1986), 자동차 개발과 기업의 흥망성쇠를 다룬 '아스팔츠의 사나이'(1992), 가족만화 '사랑해'(1998), 도박을 그린 '48+1'(1992)과 세일즈맨의 일상을 그린 '세일즈맨'(1994), '타짜'(2002), 음식만화 '식객'(200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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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세화 기자 cand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