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문서감정사회 회장… "판정 잘못땐엄청난 파장 신경 곤두서는 빵점 직업"인장·필적·문서 감정 경력 무려 45년… 국쇄도 제작한 '도장의 달인'민사소송 증언대 자주 올라… 위조범 '죽이겠다' 협박에 출근 못하기도

자꾸 그의 휴대폰이 울었다. 그렇쟎아도 궁금했던 근황을 굳이 직접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일을) 맡아드릴 수 없습니다. 1주일쯤 뒤에 연락주세요. 기다리시는 것 외엔 딴 방법이 없습니다. ” 예닐곱번째 통화에 이르자 그는 숫제 통사정 수준이었다. “요즘 제가 잠도 못 자는 판국입니다. 1주일째 집에도 거의 못 들어갑니다. ”

소위 BBK 인장 위조 논란으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주인공. 대검의 최종 판정으로 논란이 종식된 뒤에도, 대한문서감정사회 한용택 회장은 그 소동의 여파로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요즘 하루 해가 더 짧아졌다.

“결국 동일 인장으로 확인됐는데, 그간 언론에서 감정을 맡으셨던 분으로서 소감이 어떠십니까? ” 그는 직설적인 대답을 피했다. 대신 ‘사실 맨처음 TV를 통해 논란이 터졌을 때부터 (직업적인 본능에서) 이미 혼자서 특수 카메라로 화면을 촬영해 감정해보던 차에, 다음날 갑자기 언론이 떼지어 들이닥쳤던 것’ 정도로만 답했다. 그 소동 와중엔 거의 닷새 동안 잠도 못 잤다.

인장, 필적 등 문서감정 경력 45년. 그는 언론의 생리에도 노련한 베테랑이다. “언론에서 감정 의견을 말할 때는 특히 표현에 조심해야 한다. 단지 내가 후배 감정사들 대표로 ‘총대’를 대신 멘 것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 노장, 문외한을 시험하다.

지난 세월, 숱하게 언론을 상대해보았을 그는, 아니나다를까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탁자 위로 한 장의 커다란 종이를 내밀었다. 다섯 개의 확대된 인장 표본들이 찍혀있었다. 이름은 같지만 모양새는 제각각 차이가 나는 것들이었다. 문서감정계의 노장이 문외한을 슬쩍 떠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여럿이었다. ‘다른 인장인가, 같은 인장인가’에서부터 ‘어느 부분이 어떻게 다른가’, ‘달라보이지만 같은 인장이다.

근거가 무엇인가?’ 등 그의 테스트는 갈수록 집요해졌다. 요행히 그의 테스트를 요령껏 통과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출제자의 의도’부터 먼저 간파한 덕이었다.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마지막에 흘러나왔다.

“보통 사람들은 단순접근으로 형태만 보기 때문에 오판의 위험이 높습니다. 하지만 인장의 형태란 건 감정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전자나 마약 등의 감식은 기계가 해줄 수라도 있지만, 필적이나 인장 감정은 사람의 힘, 특히 오랜 경력을 가진 감정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일입니다. ”

전문가의 차이는 아주 미세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인주를 묻히기 위해 도장을 내리 찍을 때의 각도(보통 82도 내외), 찍을 때의 기울기, 힘을 주는 강도, 받침대의 사용여부와 재질, 날인시의 각도, 인주의 제조사별 제품 특성이나 습도 등 수많은 요소가 작용한다. 같은 사람이 같은 도장을 사용하더라도 외형상 다른 인장처럼 오인 받을 수 있는 여러 개의 모양이 만들어질 수 있다. 노장이 한마디 덧붙인다.

“저는 대통령 도장보다 동장 도장이 더 무섭습니다. 모든 인감 증명이 동장 도장에서부터 나오거든요.”

◇ 법정에서의 증언전쟁

운이 나쁘면, 도장 하나에 한 인생이 거덜나기도 순식간이다. 세상에 벌어지는 숱한 문서위조 공방을 그는 오래도록 목격해왔다. 그것도 그 논란의 최중심점에서. 이들 전문가가 주로 불려가는 곳은 민사 소송 때다.

한때 한 등기소 소장의 사각 도장이 문제가 됐다. 문서 원본의 날인 모양과 달리 몇 년 후 도장 크기가 서로 달라 시비가 벌어졌다. 문제의 대상은 나무도장이었다. 이를 들고 법원에 나가 장장 8시간 동안 증언하며 동일 인장임을 증명해냈다.

“증언 때 (다른 인장이라 주장하는 측) 변호사에게 ‘당신 군대에 갔다 와 봤냐’고 하자 ‘난데없이 그건 지금 왜 묻냐’더군요. ‘비가 오고 컴컴할 때 군인들이 어떻게 후퇴하는지 아느냐’고 또 물었죠. 다들 어리둥절해 하는데, ‘그럴땐 톱으로 나무를 잘라보고 길을 정한다. 나무를 잘랐을 때 나이테가 좁은 쪽은 북쪽, 나이테가 넓은 것은 남쪽을 뜻하기 때문이다. 단, 동,서 방향의 나이테는 간격이 동일하다. 즉, 나무 재질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일부 방향으로 변형이 생긴다는 걸 알려줬죠. 결국 그리그리하여 공식적으로 감정 결과를 인정받아 재판 결과를 바로잡았어요. 45억 원이 걸린 민사 소송이었죠. 이 일을 하자면 정말 별별 것까지 다 알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경험과 공부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게 특히 어렵구요. ”

6년 전에는 한 사기꾼의 교묘한 인장 위조로 빌딩 등 전 재산을 날리고 암까지 걸려 거의 폐인이 된 사람도 보았다. 심지어 무고죄로 고소돼 징역형까지 살고 출감한 뒤였다.

민사재판 패소 이후 형사재판 단계까지 넘어간 상태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한 회장을 찾은 것. 여러 가지 정황 판단과 감정 후, 담당 변호사에게 전화해 ‘아무래도 이 사건이 이상하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검찰에 찾아간 날, 검사 앞에서 감정 결과를 밝히기 위해 칼라복사기로 문제의 문서를 복사하다가 뜻밖의 대어를 낚았다. 복사기의 미세한 토너가루가 복사 때 점점이 묻어들면서 오히려 기존 문서만으로는 보이지 않던 약 8군데의 위조 흔적이 즉석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한 회장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 행운이었다.

그 외에도 문서 뒷면에 인주의 기름이 배어나오지 않은 점 등 위조의 증거를 속속 짚어내면서 극적으로 진위가 밝혀졌다. 이미 패소했던 민사재판 결과까지 다시 뒤집히는 등 비로소 피해자의 진실이 빛을 보았다.

“온갖 사기꾼을 다 봅니다. 이 일을 한 지 45년 되는 지금도 의뢰를 받을 때마다 참선하는 기분으로 감정합니다. ‘내가 오판하면 누군가가 울게 된다, 내가 오판하면 대한민국이 오판하게 된다’고요. ”

필적 감정은 더더욱 풀기 고약한 고난도 과제다. 본인이 쓴다해도 쓸 때마다 글씨가 달라진다. 필기구의 종류, 색소 함유량, 필기시의 자세, 마음 상태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이 글씨를 바꾸어놓는다. 물론, 어떤 고의로 평소와 다른 필체를 쓰더라도 그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방법이 따로 있다. 흥미진진한 감정 기법은 많지만, 모방범죄 예방차원에서 이상은 비밀.

서로 다른 인장처럼 보이나 5장 모두 같은 인장이다.

◇ 빵점자리 전문직

그의 옆엔 45년째 이 직업을 뜯어 말리는 사람이 있다. 그의 부인이다. 건물 입구의 간판을 떼게 한 것도 부인의 발상이다. ‘이 일 때문에 당신 수명이 단축될까봐서’가 근심의 이유다.

일의 성격상 느끼는 중압감도 문제지만,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 끼어 시비와 항의에 시달리는 일도 일상이다. 7년 전인가엔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으로 1주일 동안 사무실에 나오지 못한 적도 있다. 경호원들을 고용해 한동안 사무실 주변에 세워놓고 일하기도 했다.

돈보다 사명감에 일한다. 인기야 좋지만, 원하는 이상 의뢰가 들어오면 ‘아파서’ 또는 ‘나이가 들어서’라는 핑계를 대서라도 어떻게든 일을 적정선으로 줄인다.

“직업으로는 빵점이에요. 시비에 시달리는 것도 너무나 피곤하고, 이래저래 뇌가 너무 많이 마모됐을 겁니다. 집사람이요? 지금도 여전히 (이 일을) 말립니다.”

얼마 전엔 ‘인장감식기계’를 발명했다며 찾아온 방문객도 있다. 이미 특허를 받았다고 했다. 노장은 이 흥분에 들뜬 ‘발명가’에게 똑같은 자신의 도장으로 이리저리 모양을 다르게 찍어 10개짜리 테스트용 표본을 주고 ‘기계로 감식해보라’고 숙제를 내주었다. 사흘 뒤에 찾아온 상대는 ‘10개중 3개는 다른 인장’이라고 했다. 노장은 두말없이 상대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는 20여종의 장비를 갖고 있다. 3천만 원짜리 적외선 촬영기를 비롯해 자외선 촬영기, 현미경, 관련 약품 시료 등이 즐비하다. 확대경으로 인장 그림 모양이나 들여다보고 판정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국내 문서감정계도 매우 과학적인 단계에까지 와 있다.

“한가지 꼭 당부 드리자면, 특히 인감 도장은 꼭 손으로 새긴 도장을 쓰세요. 기계로 새긴 도장을 쓰면 나중에 (소송과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어요. 맘만 먹으면 다른 사람이 도용해서 재산을 가로채는 건 식은 죽 먹기죠. 그만큼 도장이란 무섭습니다. ”

◇ 인생 감정을 위한 선물

작고한 그의 부친은 아주 이성적이고도 따뜻한 어른이었다. (그는 생전의 부친과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한동안 목이 잠겨 버렸다. 눈시울도 심하게 붉어졌다.) 그의 각별한 사부곡을 듣고보니, 잠깐의 인상이었지만 그의 삶 역시 부친의 성격을 따옮긴 듯 보였다.

“제 철학은 두가지 입니다. 시간 절약, 그리고 열심히 살기. 열심히 살면 반드시 좋은 끝이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

은근히 강직한 성격도 선친의 유산일까? 그는 이따금 택시를 타고가다 말고 도중에 갑자기 내려버릴 때가 있다. 유명인이든, 무명인이든 택시 기사가 그 누군가를 욕하는 소리를 듣게 될 때다.

“저는 남을 욕하는 사람이 제일 싫습니다. 절대 같이 안 다닙니다. 두 늙은이(본인 부부) 살기도 바쁜 판에 남의 욕할 시간이 어디 있냐 말이죠.”

그는 서예인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잠시 또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한 구석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뒤져 들고 와 내밀었다.

자신이 직접 썼다는 인쇄판 경구(警句) 한 구절이었다. <吾不變則棄世我>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이 나를 버린다는 뜻이다. 아직 새해도 아니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신년 덕담이나 제야의 종소리처럼 가슴을 후끈거리게 했다.

청년기처럼 살고 있는 본인의 요청에 따라 그의 나이를 적지 않는다. 사실 밝혀봐야 실제로 그와 대면해 본 사람이라면 쉬 믿지 못할 숫자다. 내기를 걸어도 좋다.

■ 한용택 약력

서울감정원 대표. 관련 자격증 국내 최다 보유. 미국 국제감식협회 감정사. 영국 지문감식협회 감정사, 한ㆍ중ㆍ일 인장위조방지 발명특허자. 현 국제인장연맹회장. 2000년 한국문화예술연구회 서예대상 수상 등 표창, 수상경력 다수. <국제인장예술대전> 등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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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