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 채워준 영화, 그길에 충실할뿐"전직때 갈등 심했지만 반대한 아내도 즐겁게 사는 모습 보고 마음 놓아

이 ‘리버럴’한 남자는 얼마 전까지도 변호사였다. 그러나 이젠 신분이 바뀌었다. 겸업도 아닌 전업 영화인이다. 그리도 갑갑했던 양복을 마침내 벗어 던지고, 그토록 원하던대로 마음껏 청바지에 스웨터 차림으로 출퇴근한다.

올 봄, 파격적 영입 인사와 변신으로 화제가 됐던 영화사 ‘봄’ 조광희(41) 대표. 이까지 오는데 10여년이 걸렸다. 일종의 우회로로 돌아오느라 본인에게는 더욱더 힘들고 극적인 여정이었다. 법정을 오가며 누구보다 현실의 함정에 밝고 예민할 그가 인생 안착기인 나이 마흔에 오히려 대모험을 감행했다.

_영화제작자가 된 후 첫 연말인데, 얼마나 실감이 나시는지.

“이젠 꽤 익숙해진 편이다. 처음엔 호칭부터 나 자신도, 주변에서도 혼란이 많았는데(웃음) 이젠 처음만큼 낯설게 들리지는 않는다.”

_본인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특별히 들 때가 있나.

“사업의 질적인 만족감을 느낄 때 그렇다. 한 조직이 자연스럽게 굴러가는데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즉 조직의 시스템 정비후 더 체계적인 된 느낌을 받을 때다. 내가 ‘정리벽’이 있다. 뭐든 제 자리에 딱딱 정리가 돼 있어야 한다.”(웃음)

_조 대표 개인적으로도 영화에 대한 애정의 깊이가 남다른 것으로 아는데, 제작자로서 실제 제작 과정에는 얼마나 관여할 수 있나.

“제작자이지 나는 감독이 아니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감독 등 스탭의 영역이다. 물론 의견을 말하기는 하지만, 단지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정도의 입장이다.”

◆ 법대생과 영화관

_원래 법대 선택은 누가 한 건가.

“아버지의 뜻이었다. 당신의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당신 세대의 관습적인 선택 이었다. 진학 후에도 사법시험을 안 보겠다고 해서 부친과 또 한번 충돌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시험을 본 이후론 더 이상 아무 요청도, 간섭도 없으셨다.”

_사법시험을 보면서 결국 자신과 타협한 것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활동하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을 보았는데, 정작 나중에 민변 활동을 하면서도 행복하지 않더라는 얘기인가.

“그랬다. 민변 활동 자체로는 보람을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뭔가 마음이 다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 부분을 영화가 채워주었다. 그러다 1999년 영화 ‘카라’의 상영중지가처분 관련 소송을 처음으로 맡게 되면서 상황이 변해갔다. 이를 계기로 점점 영화전문 변호사로 자리를 굳히게 되면서 일에 대한 만족감이 높아졌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재미있게 지냈다.”

_고2때부터 대학시절은 물론, 사법연수원 시절에도 영화를 보러 쫓아다녔다고 들었다. 고2때면 보던 영화도 꺼야 될 때가 아닌가.

“당시는 요즘과 달리 영화 한 편이 개봉되면 오래 가니까 작품 수로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아무튼 80년대 개봉작들은 거의 다 본 것 같다. 사법연수원 시절엔 영화 서클을 만들어서 고전영화들을 본 뒤 서로 토론을 하곤 했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나 알랭 레네 감독의 ‘히로시마 내 사랑’같은 것도 다 그때 보았던 것들이다. 그 시절이 참 즐거웠다.”

_어떤 면에서의 재미였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대상에 대한 새로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더 흥미로운 사람들이었다. 당시 내 개인적으로도 법조계의 한 전문지에 영화 관련 기고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조 대표는 그 기고와 관련해 모 출판사로부터 영화서 발행 제의를 받은 바 있다. 그는 거절했다. )

_상당히 잘 썼던데, 왜 거절했나? (그는 영화전문지에서도 청탁을 받아 칼럼을 실은 바 있다.) 언젠가 정식으로 칼럼을 써 볼 생각이 없나.

“안 쓸 거다. 영화를 많이 보는 것, 좋아하는 것과 영화에 대해서 쓰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영화를 많이 봤다고 해서 직접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_조 대표가 생각하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그럼 뭔가.

“감상하고 즐기는 건 아마추어, 생산하는 것이 프로라고 생각한다.”

◆ 영화광, 호랑이 굴로 들어가다.

_영화계 영입 제의를 받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이 힘들지 않았나.

“영화사 대표직을 맡을 때보다 오히려 작년에 제작본부장으로 처음 옮겼을 때 가장 힘들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불안감, 과연 내가 이 분야에 맞을지, 일단 다른 길로 빠진 결과로 생길 변호사로서의 경력상 단절감, 로펌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등으로 갈등했다. 그러나 결론은 ‘지금, 바로, 여기서 충실하게 살겠다’는 생각이었다.”

_당시 부인 등 주위의 반대도 심했다던데, 지금은 어떤가.

“처음엔 많이 걱정했던 아내가 이제는 반대 안 한다. 내가 즐거워하며 지내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바뀐 것 같다.”

_수입면에선 어떤가.

“저금은 못 한다. 하지만 생활하는데에는 별 문제 없으니 그 정도면 되지 않나.”

_대표 취임 때 '수익구조개선을 위해 연 평균 제작 편수를 늘릴 계획'이라고 말한 것으로 안다. 취임 후 이미 개봉된 것이 있나.

“아직 없다. 현재 홍상수 감독의 작품 ‘밤과 낮’이 내년 4,5월 개봉 예정으로 대기 중이다. 배우 전도연이 출연하는 ‘멋진 하루’도 촬영 준비 중이다. 잘 되면 내년에 4편을 개봉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작품이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제작자로서 내년 영화의 결과가 내 성적표일 수 있다는 부담감이 있다.”

_3년 계약으로 대표직을 맡은 것으로 안다. 3년 후의 거취에 대해서는 예정된 것이 있나.

“아무 것도 없다. 영화사측에서도, 나 자신도 3년 이후의 일에 대해 서로가 단 한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그때 상황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내 개인적으로는 3년후 어떤 상황이 되든 다시 변호사의 삶으로 돌아가게 될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_영화인으로 적을 옮기던 무렵 직접 쓴 글을 보았다. 스스로 던지고 답하지 않은 물음에 대해 직접 답을 듣고 싶다. '당신은 지금 살아있는가?','당신은 지금 제자리에 있는가'

“(전혀 지체없이) 둘 다 ‘그렇다’이다.”

(사실 그의 자기 고백서엔 의문문 한 문장이 더 적혀있었다. ‘너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고 있는가?’다. 하지만 그 물음은 던지지 않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그의 얼굴에 답이 씌여있었다.)

■ 조광희 약력

서울대 법대. 사시 33회. 1998년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차장. 로펌 ‘우방’, ‘한결’에서 활동, 명필름, 봄, 싸이더스 등 고문변호사 역임. 영화 <카라> 관련 건을 시작으로 <하얀방>, <범죄의 재구성> 등 상영중지 가처분 사건 상당수 수임. 2006년 영화사 봄 제작관리본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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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