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여정에서 가시밭길 함께 걸은 코끝 찡한 자식 사랑전대협 간부 아들의 투쟁 도운 아버지의 눈물어린 사연 책으로 펴내"수배생활 중 배고파 우유 훔쳐먹었다는 아들 얘기 듣고 가슴 찢어져"

87년 민주화체제 20주년인 올해 각종 민주화 관련 행사가 범람했다.

그러나 정작 그날의 주역인 386세대는 몇몇 정치권 인사들을 제외하고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서강대 87학번으로 1990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5기 정책위원이던 최정봉(39) 씨도 그 중 한 사람.

그는 92년 사면복권된 후 손학규 전 의원의 비서관 생활, 미국 유학을 거쳐 현재 뉴욕대학 디지털미디어학과 영화이론 교수가 됐다. 물심양면으로 그의 ‘투쟁’을 도왔던 아버지 최창호(72) 씨는 수배 기간동안 아들을 기다리며 날마다 일기를 썼고, 그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아들아 이 길을 함께 가자>는 지난 93년 첫 출간됐고 올해 민주화 20주년을 기념해 보정판이 나왔다. 최창호씨와 아들 최정봉 씨를 만나 민주화 투쟁과 이후 삶을 들었다.

위암 말기 판정받고 고통스런 투병생활
아들은 시위현장서 돌맞아 왼쪽 눈 실명…이화학보 편집장 딸까지 운동권서 활약

■ 아들 덕에 많은 것 배워

“우리 아들이 서강대 87학번, 90년에 총학생회장 하더니 이듬해 전대협 정책위원이 됐어. 그때부터 현상금 500만원, 2계급 특진 걸린 ‘국사범’이 됐지. 딸은 또 이화여대 84학번으로 이화학보 편집장이었어요. 자식 둘이 민주화 운동했는데 걔들 잡으려고 집에 매일 형사 와있었어. 사업체고 친척집이고 친구 네고 다 쑥대밭을 만들어 놨었어.”

최창호 씨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90년 수배령이 떨어지고 2년 수배 생활 동안 아들 정봉 씨는 전대협의 전국단위 학생운동을 전두 지휘했다. 경찰에 쫓기면서도 부산, 대전, 인천 등 전국대학과 데모현장을 돌아다녀 당시 ‘신출귀몰’이란 별명도 얻었다. 아버지는 그런 자식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 당시에 잡혔다 하면 바다에 그냥 빠져 죽이고 할 때야. 내 친구들도 다 자식 말리라고 했어요. 그때 ‘한 마리 제비가 오면 수천, 수만의 제비가 날아온다. 언젠가 너희가 머리 숙이고 나한테 사과할 날이 온다’고 했지. 과연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고 그걸 내가 아들한테 배웠다고.”

최창호 씨가 아들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던 것은 젊은 시절에 대한 역사적 부채감 때문이다. 그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다닐 당시 4·19 학생의거가 일어났지만 그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데모에 가담하기 보다는 뒤에서 응원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자식 행동을 말릴 수도 없었지. 형사들이 아들 있는 데 알려주면 세무 조사도 안 하겠다, 온갖 회유를 다했지. 근데 그럼 아들 팔아먹는 거 밖에 더 돼요?”

수배 중인 아들과는 세 달에 한번 꼴로 만났다. 한 밤 중 전화로 ‘아버지 접니다. 잘 있습니다’란 말만 전하고 끊으면 만나자는 신호가 오는 것이다. 장소와 시간은 아들의 친구들이 알려주었다.

만남의 장소는 서울에서 가까운 수원과 인천에서부터 부산까지 다양했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최 씨는 아들을 만날 때만은 전국 방방곳곳을 손수 운전했다. 저녁 늦게 만나 어스름한 식당 방을 빌려 아들을 만났다. 그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건넨 채 아들 보기 바빴다”고 말했다.

“만나면 음식 먹을 세가 어디 있어요? 아들 얼굴보기 바쁘지. 도망 다니면서 가끔 배가 고파서 우유도 훔쳐 먹고 그랬데. 그럼 또 가슴이 찢어져.”

아들 정봉 씨는 그렇게 2년 8개월을 수배생활 한 끝에 92년 서울에서 검거됐다.

■ 맘 고생으로 위암 말기 시한부 선고받아

아들이 검거된 후 사면복권 되기까지는 당시 총장이던 박홍 현 서강대 이사장의 도움이 컸다. 박 전 총장은 청와대에 탄원서를 내며 최정봉 씨의 사면을 도왔다. 최씨는 92년 1월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졸업 후 손학규 전 의원의 비서관으로 일했다.

“봉이가(최정봉 씨) 서강대 정외과였고, 손학규 전 의원이 담당 교수였지요. 손 전 의원도 예전에 민주화 운동을 했던 분이셔서 누구보다도 봉이 사정을 잘 알았고, 그래서 비서관 일을 했어. 한 일 년 반 쯤 일하다 더 큰 세상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97년 IMF 때 미국 유학을 가겠다고 하더군요.”

아들이 미국 유학길에 오른 지 만 2년이 지났을 2000년 5월, 아버지 최 씨는 위암 말기의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지난 10년간 마음고생에 잦은 술 담배가 원인이었다. 최정봉 씨는 연락을 받고 이틀 만에 돌아왔다.

“지 엄마랑 며칠을 상의했어. 큰 뜻을 품고 유학 간 아들, 잡아야 되는지. 연락하니 바로 한국으로 오더군요. 죄스러웠는지 밤잠을 못자. 한달 반 있다 내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라고 쫓아 보냈어요.”

8년 만에 박사 학위를 딴 아들 정봉 씨는 뉴욕대학 교수로 임명됐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환교수로 한국에 체류 중이다. 최창호 씨는 “이제는 내 아들 마음대로 본다”며 웃었다. “돈, 돈 하는 시대에 부모 자식 간 끈끈한 정이 있어야지”라고 책 출간 이유를 말했다.

“아들도 출소 후에 고문 후유증으로 6개월 대학 병원 신세를 졌어요. 문익환 목사 방북지지결의대회 때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왼쪽 눈이 실명됐어. 아직도 안 보여. 부인도 그때 맘 고생, 병 수발 때문인지 지금 고혈압, 당뇨를 앓아요. 그래도 그 때 옳은 일했다고 생각해.”

■ 교수가 된 아들 최정봉 씨 이야기
386 운동권 세대는 두 방식으로 나뉘어졌다"

이튿날 아들인 정호 씨를 만났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투에서는 지난 날의 ‘투쟁적’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96년 미국 행을 택한 이유에 대해 묻자 잠깐 머뭇거리다 “정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답했다.

“보좌관도 일종의 권력이 있더라고요. 젊은 놈이 그런 것 하니까 겉 멋 들기고 좋고. 또 계속 일하면 진짜 겉 멋 들 것 같아서요.”

보좌관 생활을 그만 둔 그는 전공을 바꾸어 언론학, 영화학 쪽에 관심을 두었다. 미국생활은 “한국생활과의 단절이 준 자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과거로 규정된 내가 없었으니 새롭게 정체성을 만들 수 있었죠. 미국적인 부드러움을 많이 습득했고 양 쪽의 장점을 발견하려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 한국적이지도 미국적이지도 않아요.”

당시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386세대 친구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고 한다. 20년 전과 똑 같은 가치관, 방식으로 사는 사람과 과거를 부정하는 사람으로. 지금은 모두들 당시 얘기를 나누며 농담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그는 87년 체제 이후 바뀐 한국사회에 대해 “엄청난 변화”라고 말했다.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자유주의가 많이 진행됐죠. 한편으로 개발독재문화가 여전히 공존하고요.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서 개인을 인정하는 부분이 많이 커졌습니다. 그런데 방식은 여전히 폭력적이죠. 세계화와 개발 독재 보수주의문화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죠.”

마지막으로 ‘아들, 딸이 똑같이 사회 운동을 하겠다면 응원하겠냐’는 질문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성원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부모 세대에서 옳다는 사실이 다음 세대에서 옳은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 세대가 깨달은 가치를 미래에 똑같이 투사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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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