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권은 독재·독선 아닌 독창정부 세워야"창조적 자본주의는 우리시대 새 가치… 예술가의 마음으로 국민 이끌어야

인생 황혼에 이르러 실존적인 고민… 완고한 무신론자가 세례까지 받아
보수 진보 뛰어넘는 대안 모색… 침묵하는 다수 끌어안는 새역사 창조를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초대 문화부 장관)는 고희를 훌쩍 넘긴 노령에도 정력적인 사회활동을 멈추지 않는 흔치 않은 원로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다. 특히 인문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복잡한 세상사를 특유의 논리와 말솜씨로 버무려 풀어내는 모습은 가히 박학다식함의 결정체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서 ‘한 수’를 듣고자 하는 요청은 끊임이 없다. 노학자의 황혼이 호젓하지 못하고 늘 부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얼마 전에는 일본의 한 대학교 초청을 받아 3박4일 일정으로 특강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일본과 일본인의 특질에 대한 치밀한 해부를 시도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저서로 그 쪽 지식인 사회에도 꽤 알려져 있다.

이 석좌교수는 언변이 화려하고 청산유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안티’들도 없지 않지만, 그 자신은 “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는데 끝나고 보면 ‘강연’이 돼버리더라. 나를 잘난 체하는 부류로 오해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라며 웃어넘긴다.

그의 말을 제대로 곱씹으면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한 번 쌓은 명성을 오랫동안 우려먹는 지식인은 결코 아니다. 지금도 자신의 지성(知性)을 날마다 새로 갈고 닦는다. 광속으로 변해가는 오늘날에도 그가 던지는 화두가 생명력을 갖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08년 쥐띠해를 맞아 그에게서 한국의 좌표와 진로를 들어봤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상하게도 요즘은 당황하게 돼요. 과연 내가 무얼 하고 있나, 내가 잘하고 있나, 라는 고민이 드는 거죠.”

근황을 묻는 질문에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당대의 대표적 지성이 인생의 황혼에서 삶의 고민을 하다니…. 의아하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설명이 곧장 이어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사구별이 모호하지요. 공직에서 은퇴하면 개인의 사적인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며 살아야 하는데 그런 ‘은퇴문화’가 우리 사회에는 없어요. 만약 그런 문화가 있다면 내가 지금 인터뷰를 하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요.”

70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뿜어져 나오는 그의 활력에는 역동적인 노년의 모델을 보여준다는 찬사가 아무래도 많은 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 석좌교수의 부지런한 사회참여에 대해 타고난 천성쯤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스스로는 “과거의 공적인 삶의 연장선에 얽혀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의무 같은 일”이라고 고백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황혼에 이르러 뒤늦게 ‘실존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신의 존재, 혹은 존재방식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한 것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완고한 이성주의자였던 그가 지난 7월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한 ‘깜짝 사건’도 그런 고뇌의 표층이랄 수 있겠다.

“젊었을 때는 젊음을 향유하지 못했지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저항문학의 기수로서 젊은이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버거운 짐을 지고 살았던 거야. 그런데 지금은 조용히 삶을 되돌아보고 진정한 자기발견을 해야 할 땐데 그렇지도 못해. 우리나라는 그런 풍토가 안돼 있어요.”

그는 자신이 직접적인 당사자로서 우리 사회의 고령화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고령자가 매우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사회적인 대비는 그 추세에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령사회는 말 그대로 나이 70, 80까지 뛰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나 같은 노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젊은이들의 자리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딜레마가 생긴다는 거죠. 요즘은 내 삶의 부조리를 그런 데서도 느끼고 있어요.”

그의 말대로 고령화는 노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체 세대가 함께 져야 하는 짐이자 함께 풀어야 하는 숙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당면한 고령화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아이는 아이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그 격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원론적인 말에 정답이 있을 듯도 싶다. 비단 그 해법은 고령사회뿐 아니라 어느 사회든 추구해야 할 이상향일 터이지만.

한번 청진기를 든 노(老) 석학의 날카로운 진단은 우리 사회의 다른 문제로도 이어졌다. 특히 그는 ‘공공영역’이 점차 와해되는 현상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엘리베이터 안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사담(私談)을 중단했는데, 요즘은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마치 들어라는 양 지껄이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되죠. 전철에서 휴대전화로 떠들거나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으며 걷는 것도 같은 맥락인데, 이것은 요즘 사람들이 그만큼 공공의 장소를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왜곡된 현상의 사례들입니다.”

흘러간 옛날 타령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지켜야 할 가치도 함께 떠내려가는 것은 결코 아닌 법이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중병도 어쩌면 여기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공(公)과 사(私) 가운데 예전에는 공이 앞섰지만 지금은 사가 모든 곳을 침범하고 있어요. 개인의 이해만을 먼저 챙기는 거지요.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분위기도 별로 없어요.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공론의 장’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겁니다.”

공공영역의 붕괴는 사적영역의 확대와 동전의 양면 관계다. 그런데 사적영역이 날로 커지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중시하는 시장주의, 자본주의가 세계를 제패한 데서 상당 부분 비롯된 것이다.

이 석좌교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대결을 펼치던 냉전시대에는 ‘선택’이 가능했지만 모든 게 시장주의로 통합된 오늘날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며 “문제는 그 시장주의 안에서 세상이 잘 돼가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과연 없는 것인가. 그는 이른바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를 유력한 방편으로 제시한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도 바로 이 창조적 자본주의가 정답이라는 것이다.

창조적 자본주의는 기존 가치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며, 기존 자본주의처럼 창조의 결과(가령 이윤 등)를 지키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창조 그 자체를 존중하고 지속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아이들이 항상 웃고 즐거운 이유가 뭡니까. 바로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기 때문이에요. 창조적 자본주의는 이와 흡사합니다. 일이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는 그런 사회를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멋집니까.”

기실 세계는 ‘크리에이티브 지수’(창조력의 수준)가 높은 나라가 행복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는 시대로 바뀌어 가고 있다. 미국 카네기멜론대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는 미국 앞에 닥친 쇠퇴 위기의 본질은 바로 ‘창조적 계급’(Creative Class)의 약화라고 갈파한 바 있다. 뒤집으면 창조적 계급이 미래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인 셈이다. 창조의 힘에 주목한 많은 석학들은 앞으로 10년간은 창조가 자본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을 예측하고 있다.

이 석좌교수는 창조라는 화두를 멀리 공자 사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해 보였다. “공자는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뜻 아닙니까. 이는 창조적 자본주의가 가진 엄청난 힘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가령 블로거들은 누가 시켜서 지식을 올리고 전파하는 게 아니죠. 그저 자기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일종의 경제효과를 내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지식과 즐거움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게 아니라 커진다는 거죠. 이 같은 ‘증여 경제’를 창조적 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창조라는 가치는 어떤 분야에서도 효력을 발휘한다. 정치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는 사상 유례없는 구도를 보여줬다. 보수와 진보가 나뉘었고, 그 안에서 보수와 진보는 또 갈래갈래 분열했다. 그러나 투표율은 겨우 60%를 넘어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눔의 셈법이 여전히 유효함을 드러냈지만 그 중간지대에 자리한 ‘침묵의 다수’가 점차 두꺼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점을 주목한 이 석좌교수는 정치권, 혹은 시민사회 진영에 이런 권고를 했다.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제3의 길 혹은 제3의 대안을 ‘창조’해야 할 때가 됐어요. 침묵의 다수를 끌어내는 것은 새로운 역사 창조의 의무가 된 것입니다. 사실 강력한 창조는 이쪽도 잘 안 보이고 저쪽도 잘 안 보이는 ‘어슴푸레한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지요.”

그는 자연스레 차기 정부에 대한 조언도 곁들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독재와 독선이라는 두 가지 권력 모델밖에 경험하지 못했어요. 독재도 나쁘지만 독선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죠. 다음 대통령과 정부는 무엇보다 ‘독창 정부’가 돼야 한다고 봐요. 기존 역사에서 봐온 모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그러면서도 즐겁고 창조적인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정부가 등장해야 합니다. 내가 문학에 뿌리를 둬서 이런 말을 덧붙이는데, 차기 지도자는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문인, 예술가의 마음으로 정치와 정책을 펼쳐나가기를 간곡히 당부합니다.”

이 석좌교수는 2006년 ‘디지로그’(Digilog)라는 저서로 독서계에 선풍을 일으킨 바 있다. 디지털 기술에 아날로그 감성을 입혔을 때 우리나라가 진정한 정보사회의 리더로 도약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디지로그는 단지 정보기술(IT) 분야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문명 혹은 문화를 논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핵심 사상은 ‘이질적인 것의 융합’에 있다.

우리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 동안 ‘이질적인 상대’인 북한과 거리를 좁혀 왔다. 최근에는 북핵 6자회담, 남북 종전선언, 북미 수교 등이 추진되는 등 북한과 국제사회 사이에 해빙의 조짐이 조금씩 가시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한반도는 역사적 대전환을 조만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관련해 이 석좌교수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세계사는 지난 200년 동안 영국, 미국, 일본 등 해양세력이 주도해 왔다. 그 연결고리가 지금 한반도 남쪽에 걸려 있다. 반대로 해양세력에 뒤처졌던 중국, 인도, 러시아 등 대륙세력이 완연히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그 흐름도 한반도 북쪽에서 막혀 있다.

“남한과 북한은 각각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최전선을 이루고 있어요. 이 두 세력이 경직된 채로 충돌하면 재앙을 부르지만 긍정적으로 상생하면 그야말로 고싸움놀이를 할 때 두 적수가 맞부딪쳐 하늘로 솟구치듯 엄청난 상승효과(시너지)를 발휘하게 될 겁니다. 다만 북한이 진정으로 변화해 ‘세계의 룰’ 속으로 들어오느냐 하는 게 대전제입니다.”

특유의 혜안과 달변으로 자신의 근황에서부터 나라 안팎의 문제까지 고루 설파한 이 석좌교수는 주간한국 독자들과 국민에게 새해 덕담을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제가 올해 일흔 여섯이 됩니다. 지금까지 돈이나 권력 없이 살아왔지만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는 게 바로 창조적으로 살아왔다는 점이에요. 인생의 재미는 끝없이 도전하고 창조하면서 삶의 많은 가능성을 발견하며 사는 데 있어요. 열정을 갖고 즐겁게 일을 합시다. 그게 ‘복’ 받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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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