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주년 맞은 왕년의 '스크린 여왕' 남편과 찰떡금실 자랑팬들이 헌사한 한국 최초 영화배우 특별전 열려 감동 또 감동

지난해 말 문화예술계의 핫이슈는 단연 영화배우 윤정희씨와 피아니스트 백건우씨 부부다. 대통령선거 기사로 도배된 년 말 주요 신문 지면에서도 이들 부부 기사는 헤아리기 힘들 만큼 넘쳐났다.

지난달 22일 윤정희씨의 데뷔 40주년 특별전이 열린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대기실에서 윤정희ㆍ백건호 부부를 만났다.

요즘 각종 영상미디어에 등장하는 중견연기자들의 얼굴을 보면 하나같이 젊고 팽팽하다. 얼굴로 먹고 사는 것이 여배우라는데 늙어가는 자신의 외모를 있는 그대로 노출하려는 여배우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런데 ‘은막의 여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배우 윤정희(63)씨는 차원이 달랐다. ‘더 젊고 예쁘다’는 말이 아니라 환갑을 넘긴 자연스런 외모 그대로였다. 단순히 타고난 유전자만으로는 젊은 외모를 유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다른 중견 여배우처럼 ‘보톡스’ 같은 약물이나 주름 수술로 자신을 젊고 예쁘게 포장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녀는 늙어가는 모습을 공개함에 있어 당당했다.

“나이 든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했다는 ‘그레타 가르보’보다 편안하게 늙음을 보여주었던 ‘잉그리드 버그만’을 닮고 싶어요. 나이 들어가는 걸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받아들여야지, 피부는 물론 눈도 마음도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모든 것이 늙어 가는데 얼굴 주름살 좀 편다고 젊어지겠어요. 만약 얼굴뿐 아니라 모든 걸 젊게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저는 자연스런 모습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외모가 판치는 세상에 주름살까지 그대로인 그녀의 모습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는 지난달 14일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세계 최초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일주일에 걸쳐 모두 연주해낸 릴레이 콘서트로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총 관객 1만 6,000명에, 매일같이 공연장을 찾은 관객만도 수백 명에 달했다. 연주가 끝난 후 기립박수와 더불어 10여 차례 커튼콜을 받은 백씨는 “32곡의 소나타 속에 담겨있는 베토벤의 삶 자체를 연주를 통해 보여주고 연주자와 작곡가 그리고 청중이 한마음이 될 수 있는 연주회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편의 연주를 들었느냐고 묻자 윤씨는 “앞자리에서 들어본 적이 없어요. 맨 뒷자리에 앉아도 치는 사람 못지않게 너무 떨려요. 긴장의 연속입니다. 연주가 끝나고 청중들이 환호할 때는 청중들이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라고 눈망울을 붉혔다.

윤씨는 인터뷰 도중 조금이라도 민감한 질문이다 싶으면 남편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때마다 말보다는 사랑스런 눈빛으로 응답한 백씨는 엉뚱하게도 “사진을 찍는 것이 참 재밌습니다.”라며 아내의 인터뷰 장면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기에 열심이었다. 그는 “처음 아내를 만난 것이 독일 뮌헨 올림픽 때입니다.

그때 ‘효녀심청’ 영화를 같이 보았는데 영화 속의 심청이를 봐야할지 배우 윤정희를 봐야할지 혼란스러웠죠. 이후 30여 년 동안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눈을 못 떼고 있습니다.(웃음)”라며 변함없는 아내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1970년대 여배우 윤정희를 한번쯤 흠모하지 않은 남성이 과연 있을까! 윤정희는 수 천 명이 몰려든 공개 오디션을 통과해 1967년 1월 1일 개봉한 영화 ‘청춘극장’의 주연으로 일약 신데렐라가 된 여배우다.

“지금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지만 저희 집 앞에서 만나달라고 혈서까지 쓰는 남자 분들이 많았어요. 여학생들도 집으로 몰려들어 쉽게 밖으로 나갈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당대의 스타가 한국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접고 파리로 건너가 한 남자의 소박한 아내로 살아오면서 일상이 답답하지는 않았을까 궁금했다. “배우가 겉으로 보기에는 참 화려하지만 제 생활은 전혀 화려하지 않았어요. 카메라 앞에서는 배우이지만 집에서는 큰딸이고, 누나일 뿐입니다. 밖에서 보는 화려한 세계도 실제로 안으로 들어가 보면 다 열심이고 고생하고 그러잖아요.”

인터뷰 후 윤씨는 남편과 함께 자신이 기생으로 주연한 ‘강명화’를 관람했다. 이날 행사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30~60대 팬 250여 명과 최근 예술원 회장으로 뽑힌 원로감독 김수용,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배우 신성일, 안성기, 유지인, 강수연, 한지일, 이승룡 등 영화인들과 디자이너 앙드레 김, 가수 남진, 성우 고은정이 함께 해 의미를 더했다. 한국 영화계에서 배우 개인의 공식 특별전을 팬들에 의해 헌사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행사 시작에 앞서 이례적으로 자청해 마이크를 잡은 백건우씨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연기자의 연기세계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이 모인 값진 자리라고 생각한다”며 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99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한 배우 신성일씨도 백발의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 “몇 년 전 백건우씨로부터 베토벤의 전기를 선물 받아 감명 깊게 읽고 헤어스타일까지 베토벤처럼 바꿨다”며 자신을 공개적으로 구명해준 윤씨 소식을 옥중에서 듣고 “하루 종일 펑펑 울었다”고 고백해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윤씨는 “기관이나 단체에서 열어 준 특별전이 아닌 팬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준비해주신 것이라, 정말 무엇보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팬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행사를 기획한 팬 카페 운영자 안규찬씨는 “비비안 리, 오드리 헵번 같은 외국의 고전 여배우들은 기억하면서 우리의 중요한 여배우들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을 보면서 섭섭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배우들이 많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윤정희 선생님의 특별전을 기획했다.”고 말한다. 이에 윤씨는 “오늘 같은 행사가 계속되어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현재 국내외 각종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씨는 행사장을 떠나며 한국영화계에 대해 “요즘 유럽 어느 곳을 가던지 한국영화에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자만하지 말고 더 나아가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또한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면 평생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라며 팬들에 대한 감사함과 더불어 남편 백건우씨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글.사진=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