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기호·유행은 끊임없이 변화…시대를 껴안고 가는 코미디가 성공군대 전역하기 2주일 전에 시나리오 써 15년 후에 첫 연출"작품 메시지보다 기분이 중요… 파르스 장르 특히 어렵다"

연출가 장진(38)을 만난 것은 수요일 저녁 무렵 대학로 공연에서였다. 연극 <서툰사람들>이 끝나고 그는 무대로 올라왔다.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마누라가 떠 준 것”이라며 말문을 연 그는 “마누라가 허리띠를 안 챙겨줘서 멜빵바지 입고 왔습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늦깎이 신랑의 팔불출 행동에 관객들은 “에~이”하고 애정 어린 야유를 보냈다. <서툰사람들>은 ‘2008 연극열전’의 첫 번째 작품이다.

대학로 연극을 부흥시켜보자는 목적으로 배우 조재현을 비롯한 연극인들이 10편의 레퍼토리를 구성해 1년간 투어에 들어간다. 그는 “(연극열전으로) 바람을 일으키지 않으면 공연이 죽는다는 생각으로 기획했습니다. 첫 테이프 끊어서 부담이 큽니다”라며 인사를 마쳤다.

며칠 후 정식 인터뷰 때도 그는 그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기자가 “관객 반응이 좋다”는 말로 인사를 건네자 “지금 관객 수는 사실, 배우 이름값이랑 연말 특수 때문이에요. 1월 중순이 되면 진짜 판결이 나겠죠. 그때부턴 ‘입소문’이니까요.”라고 답했다.

그의 작품은 과도한 애정을 받을 때가 있다. 영화든 연극이든 그의 작품을 선택하는 많은 관객이 ‘장진’브랜드를 믿고 결정한다. 그만큼 마니아 층이 두텁다. ‘장진 효과’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영화에서는 흥행으로 이어지기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연극판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공연을 보러 간 날, 예비석까지 매진돼 인기를 실감케 했다. <서툰사람들>이 코믹장르임을 감안하더라도 공연 100분 내내 웃음이 터졌다. 웃으려고 준비하러 온 관객을 보며 누군가 “장진 연극은 ‘(코미디언) 이주일 같다’”고 말했다.

“파르스(Farce, 소극ㆍ 笑劇)장르가 그래요. 메시지를 주입하려 하거나 특정 목적이 없어요. 이 장르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요. 슬랩스틱이 들어가니까 배우 체력이 따라줘야 되고. 그래도 왜 하냐면 관객이 쉽게 웃으니까. 주인공 캐릭터에 동화돼 웃다 보면 무대에서 본 기분 좋은 기억이나 연애담을 대리만족하게 되거든요. 관객은 여기(극장)서 고민이나 종교적 구원을 얻기보다 문화를 소비하면서 즐거워지고 싶어하죠.”

그의 연극에서 메시지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기분 좋게 공연을 보고 나서 공허한 느낌이 드는 건 이 때문이다. 그것을 장진은 ‘기질 차이’라고 답했다.

그는 소설이나 연극을 볼 때 메시지보다는 기분에 집중한다. 메시지가 없다고 작품이 와해된다고 의식해본 적은 없다고 한다. 그는 “관객은 영화나 연극을 보고 다시 작품을 떠올릴 때 메시지보다는 작품이 줬던 기분, 작품 속 문장을 떠올린다”고 설명했다.

코믹극을 주로 쓰고 연출한 그에게 한국관객의 특징을 물어보았다. “코미디가 성공하려면 시대를 껴안고 가야 된다”는 대답이 나왔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가 코미디를 하게 된 계기로 이어졌다.

“제가 민주화 마지막 세대거든요. ‘투쟁’ 가열 차게 하고 군대 갔다 오니까 다 화해해 있고, 그 다음에 X세대, N세대 나오고. 이런 세대를 상대로 공연해야 하는데 내 의식은 아직 민주화 열풍에 있고, 초반 괴리감이 컸어요. ‘뭘 해야 하지?’ 학교 다닐 때 전공은 마당극, 민속극이었는데. 그때 고개 끄덕이면서 왔던 장르가 코미디였거든요. 내 아버지 세대, 내 세대, 이해할 수 없는 세대까지 코미디를 보면서 웃는다면 결국 작가들이 써야 할 지점이 아닌가. 그래서 전 코미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시대를 껴안고 시대를 관통할 수 있는 코미디를 만든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제작품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1993년 발표한 <서툰사람들>은 그가 군대 제대하기 2주일 전 쓴 작품이다. 95년 무대에 선보인 이 작품은 ‘천재 장진’이란 말을 있게 한 신호탄이었다.

천재라는 표현에 그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러는 거고”라며 얼버무린다. 연극과 영화 모두 대본작업과 연출을 하는 그이지만 <서툰사람들>은 발표 15년 만에 처음 연출을 맡았다. 장영남, 강성진 등 알려진 연극 배우 이외에도 영화배우 한채영이 공연에 합류해 화제를 모았다. 연극 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에게 주연을 맡긴 이유를 물었다.

“전 다른 장르 배우가 제 작품에 오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어요. 한채영 씨는 데뷔 때부터 봐왔고, 굉장히 성실하죠. 작업하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요. 공연이 두 팀으로 진행되는데, 사실 메인은 장영남 씨가 잡고 있으니까 이런 대중극에서 조금 특별하고, 보고 싶어하는 신선한 사람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공연 전날 한채영의 다리가 부러져 그녀가 출연하는 팀은 주인공이 깁스를 한 버전으로 수정됐다. 장진은 그 밖에도 95년 첫 공연 때와 비교해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 그는 “세월 지나서 지금 닭살로 보이는 부분들, 이 만큼씩 드러냈어요”라고 말했다.

“연극계가 굉장히 격하게 변하고 있어요. 일 년 전 어떤 작품 해서 관객을 웃겼다 해도 지금은 효과 없죠. 유행도 그렇고 대중의 호흡도 제가 보기에는 아주 거칠게 변하고 있어요. 그래서 작가들은, 특히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는 다분히 예언자적 기질이 있어야 돼요.”

‘이 만큼씩 덜어낸’ 대본을 보았다.

[장덕배] 이 여자, 참 말 많네. 조용히 좀 해. 헷갈려! 이걸 어떻게 묶드라. 매듭법이 있는데…. 가만있자……. 여기서…한번 돌려가지고……. 거꾸로…….

이봐, 오른손 좀 살짝 올려봐. 됐어. ……아, 왼손은 가만히 있고……. 빌어먹을 풀렸잖아.

[유화이] 죄송해요. ……힘드시면 그냥……칭칭 막 묶으세요.

장진의 대본에는 말 줄임표가 넘쳐난다. 대사 한 줄에 두 세 개는 기본이다. 그는 말보다 글로 성격을 드러낸다. “소심한 사람이 말 줄임표를 자주 쓴다고 하는데…” 라고 묻자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곧 이어 “대본 쓸 때 버릇”이라고 말했다. 장진의 대본 속 말 줄임표는 배우의 역할이다.

“많은 분들이 연극과 영화의 차이를 말하세요. 연극은 정말 배우의 힘이죠. 연극연출은 최종 리허설에서 모든 게 끝나요. 첫 공연이랑 마지막 공연을 찾은 관객이 다른 효용을 느끼면 안 되잖아요. 말 줄임표야 뭐, 다들 선수인데. 오래 호흡한 친구들이라 제 대본이 익숙하죠.”

공연을 끝내면 다시 영화작업에 몰두할 생각이란다. 그가 찍을 영화 제목은 <로맨틱 헤븐>. 죽어서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지난 해 늦깎이 결혼을 해서인지 작품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고.

“유서 같은 작품이랄까. 다 쓰고 부인한테 보여줬는데, 내가 총각이라면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도 못하겠죠. 결혼을 하고, 좀 있으면 아이도 생기는데, 그러면서 작품 의미가 달라지는 거야. 정말 헤어지기 싫은 사람이 생기니까. 이 작품 보면서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앞으로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결혼하고 나니 작업하면서 더 자존심은 생기죠. 내 아내, 내 아이가 보는데 부끄러워서라도 대충 못하겠다는 생각. 앞으로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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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