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외국계 직장 그만두고 MBA 유학… 지금도 끊임없는 배움의 길제약업계의 강력한 경쟁력은 '선택과 집중'… 내분비 계통 약으로 작지만 강한 기업 키워

작지만 강한 기업들이 있다. 일반인에게는 낯설지만 그 업계에서 어떤 회사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회사들이다. ‘페링’이 그런 회사 중 하나다. 이 회사는 간, 장, 위 등 내분비 계통 약에서는 강자다. 1950년대 스웨덴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프레드릭 폴슨 부부가 설립했다.

연구개발에 관심이 많았던 폴슨 부부는 단백질의 기초물질인 펩타이드를 기반으로 내분비 계통의 약을 만들어 제약회사에 팔기 시작했다. 반세기가 지난 현재 매출 1조 원, 종업원 3,000여 명에다 45개 국에 진출해 있다. 이 회사의 한국지사장이 황상섭(49) 대표다. 96년 회사를 설립해 98년부터 본격 영업을 시작했는데, 현재 직원은 50여 명에 매출은 200억 원 가량 올리고 있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페링 출신 임원과 식사를 하면서 이 회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다닌 회사 자랑을 꽤나 했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시중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탄탄하고 계속 성장하는 데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참 가족적이어서 좋습니다. 제가 다른 회사도 몇 곳 경험했지만 이렇게 좋은 회사는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떤 회사일까. 그런 궁금증으로 문을 두드리게 되었는데 역시 분위기가 달랐다. 천장이 높고 인테리어가 우아하고 독특했다.

황 대표에게는 사업 초창기가 가장 큰 위기였다. 마케팅 매니저로 활동하던 96년 그는 한국페링 설립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이후 2년간 회사 설립작업에 착수했지만 아무 기반도, 브랜드도 없는 상태에서 의사를 상대로 영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다른 성과도 없었고 무엇보다 직원 채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작은 회사의 문제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직원과 둘이서 회사를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면접을 본 후에는 연락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규모가 작으니까 실망한 거지요. 게다가 제약영업은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로 인해 마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국산품 애용 붐이 불 때도 참 힘들었지요.”

■ 시드니 셀던 소설 주인공에 반해 약대 진학

때로는 우연한 만남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가 제약 관련업에 몸을 담게 된 것은 시드니 셀던의 소설 때문이다. ‘애욕의 핏줄’(Blood Line)에 나오는 리 윌리엄이란 인물에 감정이 동화됐던 것이다. 윌리엄은 시골 약국에서 급사생활을 하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다국적 제약회사의 CEO로 성장하는 인물이다. 황 대표는 그 인물에 반해서 약학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경북 문경 출신이다. 거기서 초등학교를 나와 일찍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중ㆍ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어릴 적 꿈대로 성균관대 약학과를 졸업했다. 처음부터 삶이 잘 풀린 것은 아니다. 전공과 무관한 재벌그룹 무역파트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전공과는 다른 업무였어도 즐겁게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다 ‘약대를 나와 엉뚱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고, 곧 이어 화학 관련제품을 다루는 외국계 회사로 이직했다. 대우도 괜찮고 편했지만 3년이 지나자 또 다른 갈등이 생겼다. 너무 편한 게 탈이었다.

그는 학습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계속해서 배우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한다. 오늘날 한국페링이 있는 것도 그 덕분일 것이다. “당시 외국계 회사는 주5일 근무에 다른 회사보다 월급도 훨씬 많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죠. 하지만 편한 것은 좋지만 이대로 지내면 미래의 내 모습은 뻔하다 싶더군요. 뭔가 한 단계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번 돈을 투자해 과감하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지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위험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됐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이든 조직이든 후퇴하게 된다. 그는 MBA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91년 무렵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에 과감한 베팅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경영학에 대한 실무 및 이론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유학생과 만나게 되면서 삶의 지평이 넓어졌다.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배움에 도전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자과정, 밥슨칼리지 바이오제약 경영자과정, 성균관대 약학박사과정 등을 밟고 있다. 오는 6월에는 하버드대 바이오과정도 이수할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제약업계의 젊은 CEO 등과 경영연구회를 만들어 제약산업 전반을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제약산업을 보는 안목도 날카롭다. “제약산업은 연구개발에 천문학적인 돈이 듭니다. 웬만한 회사는 투자비용을 댈 수 없지요. 제약회사들이 인수합병(M&A)을 통해 덩치를 키우는 것도 투자비용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약업계에서 살아 남고 경쟁력을 키우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선택과 집중입니다. 엔도 같은 회사는 듀폰 출신의 여자 연구원이 만든 회사인데 통증완화 분야에서는 1등입니다. 10년밖에 안 된 회사지만 매출이 1조 원을 넘습니다. 공장시설과 연구개발은 아웃소싱을 하지요. 큐메드라는 스웨덴 회사도 대단합니다. 보톡스와 비슷한 레스틸렌이란 제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데 말하자면 피부를 ‘다림질’ 해주는 제품이죠.”

그는 윤리경영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제약산업은 구조적으로 병원을 상대로 과도한 영업을 하다 보니 리베이트 같은 좋지 않은 관행이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지요.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미국의 세르노 같은 회사는 매출 2조 원이 넘는 회사인데 과도한 영업으로 벌금 9억 달러를 물고 결국 다른 회사에 팔렸습니다. 요즘 업계에선 변호사 출신의 최고윤리책임자(CEOㆍChief Ethics Officer)를 두고 부정한 행위가 없는지 철저하게 점검합니다. 저희 회사도 점차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재 양성도 그의 지대한 관심사 중 하나다. 이는 자신의 삶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온 것일 게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죠. 사람을 채용하고 키우는 데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회사 설립 초기 사람이 없어 애를 먹은 것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이죠. 저 자신의 학습과 글로벌 인재육성을 위해서 앞으로도 투자를 꾸준히 할 작정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여러 고수를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다. 성공한 이들은 확실히 남다른 그 무엇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긍정적인 기운 같은 것이다. 황 대표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기,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계속해서 학습하기 등이 그를 지금까지 이끈 ‘브랜드’라는 생각이다.

■ 한근태 약력

한스컨설팅 대표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환경재단 운영위원

환경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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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