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범죄행동 분석팀 권일용 경위국내 최초 범죄행동 분석가 … 안양초등학생 살인사건 자백 받아내

요즘 프로파일러(Profiler·범죄행동분석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안양초등학생을 살해한 범인 정모(39)씨가 범행을 자백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프로파일러였기 때문이다. 프로파일러는 범죄자들이 공격하는 형태나 범행도구, 범행 후 처리 등 범죄행동을 분석해 범인을 추론하는 수사전문가다. 범죄행동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심리가 매우 중요한 도구로 활용된다. 국내에는 현재 전국적으로 30여 명의 프로파일러가 활동 중이다. 이번 안양초등학생 살인사건에서 범인의 자백을 이끌어낸 주인공은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인 경찰청 범죄정보지원계 권일용(43) 경위다. 그는 요즘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시달리고 있다. ■ 부인하던 정씨 행동분석 심리전 통해 범행자백 받아내

지난해 12월25일 안양시에서 이혜진(10)·우예슬(8) 양이 실종됐다.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인력을 투입해 탐문과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두 어린이의 생사여부는 물론 사건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혜진 양의 시신이 실종 장소 인근의 야산에서 발견됐고, 살해된 우예슬 양으로 추정되는 시신 일부가 경기도 시흥시 군자천 하류 부근 공사 현장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안양 일대 렌터카 업소를 뒤져 두 어린이가 실종된 날 빌려간 차에서 남겨진 혈흔을 발견하고, 혈흔이 혜진·예슬양 것과 일치한다는 DNA 검사결과를 통보받았다. 그리고 범인 정씨를 검거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서를 가지고 범인을 검거한 후에도 사건은 계속 미궁에 빠져 있었다. 정씨가 범행을 부인하거나 거짓진술을 하고, 범행동기를 함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수사본부가 범죄행동분석관인 권일용 경위에게 도움을 청했다. "프로파일러의 핵심 역할은 범행의 재구성을 통해 범행동기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이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미뤄 범인은 알코올이나 약물로 인한 환각상태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인구 밀집지역이라 목격자가 많을 수 있음에도 과감히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이죠. 또, 시신의 옷이 모두 벗겨진 점으로 미뤄 실종된 어린이들이 성범죄의 표적이 됐을 것이고, 토막살해 등 잔인한 살해수법으로 보아 범인은 여느 흉악범들과 마찬가지로 폐쇄적이면서 폭발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반사회적인격장애자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같은 범죄행동 분석을 마친 뒤 권 경위는 정씨를 직접 만났다. 그가 정씨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자백 받은 것은 "교통사고였다"는 말이었다. 권 경위는 첫날 5시간의 대면을 통해 정씨 자신도 파렴치한 범죄인 것을 충분히 지각하고 있고, 자신의 말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우기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래서 권 경위를 비롯한 프로파일러 5명은 새로운 심문전략을 세워 다음날 다시 정씨와 만났다. "흉악범들이 검거 후에도 범행사실을 부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절대적인 지지자를 잃지 않으려는 심리 때문입니다. 이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으나,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이 최소한 한 사람은 있다고 믿게 마련이거든요. 그 사람에게 만큼은 자기의 흉악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는 겁니다. 그런 요소를 찾아내면 범인에게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해 자백을 이끌어내기가 쉬워집니다." 정씨에겐 그 대상이 자기 어머니였다. 이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가 살아온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권 경위가 그의 얘기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이며 귀 기울여 주자, 말문이 트인 정씨는 부모의 이혼과 계모와 아버지로부터 학대 받고 자란 얘기, 동네 아저씨로부터 성폭행당한 얘기, 사귀던 여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얘기 등을 줄줄이 털어놨다. 그리고는 "사귀는 여자도 있었지만, 다들 떠나고 지금은 혼자서 술마시고, 대여섯 평 방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 여자들이 능력과 직업, 돈이 없다고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며 여성들에 대한 피해의식과 분노를 드러냈다. 이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얘기들이 정씨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정씨는 권 경위에게 "당신도 자극적인 동영상을 보면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그는 역시 공감하는 자세를 보이기 위해 "그렇다. 성적인 환상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정씨는 왜곡된 성적 환상과 그 동안의 행태들을 더욱 여과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 범인의 방어력이 무너졌다는 것을 실감한 그는 공감하던 태도를 바꿔 "세상에는 당신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도 많지만 모두 살인과 같은 범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며 정씨를 압박해 갔다. 그리고 자백을 권유했다. "그에게 지금 어떤 느낌이 드냐고 물었더니, 모든 게 현실처럼 느껴진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수사팀이 신문실로 들어와 증거를 들이대며 정씨를 추궁했지요. 이때가 저녁 5시쯤이었습니다. 그리고 밤10시쯤 정씨는 술 마시고 본드를 흡입한 상태에서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만난 두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성추행한 뒤 죽였다고 실토했습니다." 결정적인 증거 앞에서도 한치의 뉘우침 없이 범행을 부인하던 인면수심 살해범의 입을 열게 한 것은 프로파일러 권 경위가 펼친 치밀한 심리전의 위력이었다. ■ 인격장애 범죄 늘면서 과학적 수사만으로는 한계, 프로파일러의 역할 중요해져

그는 대학졸업 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해 8년 동안 과학수사팀 현장감식 요원으로 일했다. "현장에서 일하며 프로파일러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과학수사는 일반인들이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발달해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과학수사가 고도로 발달해도, 수사는 예전보다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동기가 없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런 범죄는 금품을 노린 범죄나 원한 관계에 의한 범죄와 달리, 증거를 찾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또 대부분의 연쇄살인범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으므로, 주변에서 온순하고 착하거나 공격성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탐문이 아니면 쉽게 수사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제 증거물을 조사하는 과학수사와 함께 범인의 행동을 분석하는 프로파일러의 역할이 중요해졌어요. ." 그는 당시 서울지방청 과학수사실의 윤외출 실장(현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강력계장)에게 과학센터 내에 범죄행동분석팀을 만들어 보자고 건의했고, 2000년 2월부터 프로파일러로 활동해오고 있다. 프로파일러가 되기 위해 그는 낮에는 현장감식 일을 하고, 야간대 심리학과에 입학해 제반 심리학 이론들을 섭렵했다. 그리고 미 연방수사국(FBI)에서 나오는 각종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현장감각에 심리학적인 이론을 겸비하게 된 그는 범죄행동분석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반사회적인격장애를 가진 범인들을 수사하고 검거할 때마다 프로파일러인 권 경위의 공로가 빛을 발했다. 그는 이제껏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정남규를 비롯해 수백 명의 끔찍한 범죄 주역들의 범행을 분석하고 , 때로는 현장조사나 면담을 통해 범죄 용의대상을 좁혀나가고, 범행자백을 받아냈다. 사건이 발생하면 권 경위를 포함한 프로파일러들은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작업에 들어간다. "예전엔 범인을 협박하거나 잠을 재우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는 등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수사했지만, 프로파일러가 생긴 이후 달라졌어요. 프로파일러의 분석작업은 매우 과학적입니다. 범죄행동을 분석할 때 순간적인 기지도 물론 사용되지만 수많은 범죄유형을 데이터화 해놓은 'SCAS(Scientific Crime Analysis System)'를 이용해 객관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프로파일러의 역할은 범죄 용의자들의 성향을 분석하는 것뿐 아니라, 목격자들이 여러 명일 때 수사가치가 있는 목격자를 평가하거나 목격자 진술을 평가하는 것도 포함된다. 아동 성폭행 피해자 등 극심한 충격 때문에 사건에 대한 기억을 못하거나 진술이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최면수사도 실시한다. 권 경위는 현재 10명의 예비 프로파일러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을 전공한 대학원 졸업자 중 10명을 뽑았습니다. 이들이 성공적으로 교육과정을 마치고 나면, 프로파일러가 되는 거죠. 우수한 프로파일러가 많이 나와줘야 효과적인 수사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흉악범들의 성향과 범죄행위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러. 그를 만나기 전까지 '프로파일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명석한 두뇌와 날카로운 신경에 인간미 없는 경찰이었다. 그런데 첫 인상부터 인터뷰 내내 권 경위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소탈함과 푸근함을 잃지 않았다. "무서우면 범인들이 자백 안하죠. 옆집 아저씨처럼 편하게 담배 주면서 얘기 시켜야 이것저것 털어놔요." 그러나 사람 좋은 그도 흉악범들만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 "안양초등학생 살해자 정씨는 여성들에 대한 분노와 함께 성적으로도 상당히 왜곡된 사람입니다. 이런 범인들을 숱하게 만나보는데,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이번 사건의 범인 정씨는 사람을 헤칠 때 절대로 뒤에서 찌르는 법이 없었어요. 남이 고통 받는 모습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며 희열을 느꼈기 때문이죠.(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과 함께)도대체 왜 그런 일을 저지르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답답하기만 합니다." 이처럼 하는 일이 흉악범들을 분석하고 대하는 것이다 보니, 평상시엔 본인의 마음 다스리기에도 힘을 쏟는다. "범죄영화를 많이 봤느냐?"는 질문에 손을 젓는다. 현실 속 사건을 스크린에서 또 보는 것 같아 진저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는 범죄행동분석 기술이 궁극적으로 범죄예방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그와 범죄행동분석팀 요원들은 일반인들도 범죄자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범죄를 예방하거나 대처할 수 있도록 메뉴얼을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다. 그는 또 "범죄 피해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성폭행 피해자들은 보복과 세상의 이목 때문에 사건을 은폐한다"며 "이들을 대상으로 반드시 후속대책을 세우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범죄를 당했을 때는 꼭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많은 피해자들이 그렇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이제껏 수사를 해보면 범죄가 발생한 지역에서 피해자가 더 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가지만 범인 검거 후에도 피해자는 나서지 않아요. 안양초등학생 살해사건이 일어난 해당 지역에도 성폭행 피해자가 더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데, 피해자들에게 솔직히 피해 사실을 고백하고, 치료를 받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권 경위는 성폭력피해자들을 위해 경찰병원에서 운영하는 '원스톱 센터'도 소개했다. 경찰병원 원스톱 센터에서는 전담 여성경찰관이 24시간 근무해 피해조사와 동시에 일선 경찰서와 연계해 신속한 수사를 도와준다. 또, 16세 미만, 아동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센터 내 진술녹화실을 운영해 피해자가 법정에 출두하지 않고도 소송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전세화 기자 cand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