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 씨카이스트 박사 출신 공학도… 3만6,206 대 1 경쟁률 뚫고 선발지·덕·체 겸비 한국 대표 재원… 향후 우주개발 선구자 기대국제우주정거장서 18가지 과학실험 임무 수행"국민들도 우주 오는 날 왔으면…" 도착 일성

똘망똘망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어린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우주를 주제로 개최된 학교 미술대회에 상상력을 가득 펼친 그림 한 점을 출품했다.

그림에는 ‘은하철도 999’처럼 우주를 나는 기차를 타고 다른 별로 향하는 소녀 자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은 이후 오랫동안 소녀의 방 한쪽 벽에 걸려 있었고, 무시로 소녀를 꿈과 희망의 세계로 이끌었다.

소녀는 어느덧 훌쩍 자라 전도 유망한 공학도가 됐다.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꿈을 먹고 살아가던 그녀. 어느날 우연히 펼쳐 든 신문을 보다가 한 줄의 기사에 눈이 고정된다. 이내 쿵쾅거리는 가슴. 어린 시절 이후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래, 이거야!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어!’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29) 씨가 2008년 4월8일 오후 8시16분39초(한국시각)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러시아 우주선 소유즈 TMA-12호에 몸을 싣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녀가 어린 시절 품었던 꿈을 마침내 이룬 순간, 우리나라 우주개발 역사도 함께 새로운 거보(巨步)를 내디뎠다. 이번 우주비행으로 한국은 세계 36번째 우주인 배출국(여성 우주인 배출로는 7번째 국가)에 이름을 올렸으며, 이 씨는 세계 49번째 여성 우주인(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의 영광을 안게 됐다.

이 씨는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듯 수 차례에 걸친 초고난도의 관문을 뚫고 한국 최초 우주인에 선발됐다. 당초 한국 최초 우주인에 도전했던 지원자는 모두 3만6,206명에 달했다. ‘허수’ 지원자가 제법 섞여 있었다 하더라도 경쟁률은 엄청났던 셈이다.

몇 단계의 시험을 거쳐 그 숫자는 일단 30명으로 압축됐다.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만큼 후보들의 면면은 쟁쟁하고 화려했다. 하지만 중력 가속도, 저압실 훈련 등 혹독한 고통을 수반하는 우주적성 검사에서 20명이 떨어져 나갔다. 평소 태권도 등으로 탁월한 체력을 다져온 이 씨는 여기서도 당당히 살아 남았고, 마침내 2006년 12월25일 대망의 최종 우주인 후보 2인에 선발됐다.

이번 우주인 선발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의 하나는 과학실험 수행 능력이었다. 우주인배출사업의 궁극적 목표가 단순한 우주 이벤트가 아니라 한국 유인(有人) 우주개발 분야의 기초를 닦는 데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발기준에 비춰 이 씨는 한국 최초 우주인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 그녀는 여성 공학도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왔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이 씨는 중학교 시절 과학실험에 큰 흥미를 느껴 과학고로 진학했다.

이후 대한민국 이공계 고급두뇌의 메카인 카이스트에 입학해 기계공학 전공으로 학사, 석사학위를 차례로 받은 뒤 ‘바이오멤스’(BioMEMS)라는 첨단분야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바이오멤스는 생명공학과 초소형전자기계시스템 기술을 접목한 분야다.

놀라운 것은 이 씨가 러시아에서 빡빡하고 고단한 우주인 훈련일정을 착실히 소화하는 와중에 박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학위를 받았다는 점이다. 남다른 열정과 정신력의 소유자임을 입증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공부만 할 줄 아는 책상물림쯤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언론과의 공개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보여준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씨는 보기 드물게 쾌활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명랑처녀’다.

1차 선발자를 위한 축하행사 때는 소감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어릴 때 SF(공상과학) 만화영화를 즐겨봤는데 우주선에는 항상 미모의 여자박사가 있었어요. 그 역할을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라고 답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 씨는 카이스트 재학 시절 소수 그룹인 여학생들을 위한 모임을 기획하는가 하면 농구 동아리 매니저로도 활동했을 만큼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스타일이다. 그녀의 넘치는 열정은 자신의 전공인 기계분야를 훌쩍 넘어 디자인에까지 뻗어 있다.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로고가 국제 학술대회에 채택된 적이 있을 정도로 실력도 만만찮다.

그녀는 세계 각국의 우주인들이 모인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에서 생활하는 동안 특유의 사교성과 친절함으로 ‘한국 홍보대사’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지난해 6월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우주인 등 20명의 각국 우주인들을 초대해 자신이 손수 준비한 콩국수와 비빔국수로 조촐한 파티를 열기도 했다.

이날 훈련일기에는 “이곳 ‘별의 도시’(우주인 훈련센터가 위치한 지역의 별칭)는 많은 나라 우주인이 국경을 초월해 한 가족이 되는 곳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습니다. 이 협력의 장에서 다른 나라 우주인들에게 멋진 대한민국을 알리는 대표 우주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최종 우주인 후보 2인의 역할이 ‘탑승우주인’과 ‘예비우주인’으로 갈렸던 지난해 9월5일. 그녀는 잠시였지만 아쉬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우주로 올라가 임무를 수행하는 주인공으로 동료 고산 씨가 선정됐기 때문. 함께 똑같은 훈련을 소화했고 서로 우열을 가르기 힘들었던 만큼 서운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명랑처녀 이 씨는 그러나 이내 얼굴을 활짝 펴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했으니까 서운하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죠. 하지만 고산 씨가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이라는 ‘골’을 넣을 수 있게 멋진 어시스트를 하는 예비우주인이 되겠습니다.”

이때만 해도 이 씨는 자신이 우주선에 최종 탑승하게 되는 엄청난 반전을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고산 씨의 규정 위반으로 서로 임무를 맞바꾼 지난 3월 이 씨는 차분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감을 밝혔다. “제 목표는 탑승우주인이나 예비우주인이 아닌 최고의 우주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때라도 상황에 빠르게 대처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우주인이야말로 최고의 우주인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딸, 그 이상 무슨 수식이 필요할까. 이 씨는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바이코누르 기지를 떠난 뒤 약 52시간30분 만에 지구와 약 380km 떨어진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지난 11일 0시40분쯤 무사히 ‘도킹’했다. 도착 직후 모스크바 임무통제센터와 가진 첫 번째 화상교신에서 그녀는 “아직도 우주에 온 게 믿어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들도 빨리 우주에 오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며 가슴 벅찬 소감을 밝혔다.

이 씨는 ISS에 머무는 동안 식물생장 실험, 미세중력 환경에서의 세포배양 실험, 노화유전자 탐색 실험 등 총 18가지의 우주과학 실험을 수행한다. 실험 하나 하나는 모두 우리나라가 미래 우주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9박10일간의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이 씨는 미국, 러시아의 우주인들과 함께 19일 카자흐스탄 초원지대로 돌아온다.

그녀의 귀환은 ‘돌아옴’이 아니라 ‘나아감’의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띤다. 그것은 우리나라 국민 모두의 가슴에 담겨진 우주에 대한 꿈을 하나씩 실현해나가는 여정이 될 것이며, 이 씨는 그 선구자로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 이소연 프로필

1978년 6월 광주광역시 출생

광주과학고 졸업

카이스트 기계공학 학사, 석사

카이스트 바이오시스템 박사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연구원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