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심·호기심 강한 연구인 출신… 확실히 차별화된 방식으로 승부수색다른 시도로 대학운영 잇따른 성공… 삼성그룹에서 혁신 사례 강연도

“대학의 경쟁력은 서울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필자가 만든 공식이다. 아무리 좋은 대학도 수도권에서 멀면 경쟁력이 떨어지고, 후진 대학도 서울 근처에 있으면 명문이 된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수도권 집중 현상의 대표적 폐해 중 하나다. 그만큼 지방대학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호에 소개할 전주대학교는 예외다. 이남식(53) 총장의 탁월한 리더십 덕분이다. 그는 2003년 전주대학교 9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2003년께 전주대는 최악이었습니다. 2000년부터 지원자가 급감해 3,400명 정원에 2,500여명 정도밖에 모집을 못했습니다. 4년 만에 거의 1,000명이 준 것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예전 입학생 숫자를 회복했습니다. 학생이 느는 유일한 대학이지요. 취업률도 85%로 올라섰습니다. 70%에 그쳤던 입학잔류율(합격한 후 등록을 하는 학생의 비율)도 100%대로 올라섰습니다. 작고 지저분하고 취직 안 되는 학교에서 젊고 역동적이고 취직 잘 되는 대학으로 이미지도 바뀌었습니다. 총장인 제가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 참석해 혁신 사례를 발표합니다. 삼성 임직원들도 학교 변화를 탐방하러 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대학교처럼 보수적인 집단을 이렇게 바꿀 수 있었을까? 그의 답변이다.

“우선 지방대학이란 말 대신 지역대학이란 말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지역과 함께 하고 지역에서 1등 하는 걸 우선적인 목표로 했습니다. UI(University Identity)도 바꾸고 지저분한 건물도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물리적인 변화도 중요하거든요.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대형 정부과제를 따는 데 힘을 집중했지요. 당시 교수들은 우리 실력으로는 어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에 전북대, 우석대, 원광대 등 쟁쟁한 경쟁자가 많거든요. 하지만 밀어붙였습니다. 제안서 작성을 지휘하고 총장인 제가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해서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던 큰 프로젝트를 몇 개나 땄습니다. 2004년 6월 지방대학 혁신역량 강화사업 대형과제에 선정됐고, 같은 해 7월 산학협력 중심대학 사업에 전북에서 유일하게 선정되어 5년간 총 700억 원을 지원받게 됩니다. 덕분에 이 지역에선 동방불패란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이런 성공들이 학교를 변화시키는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자신감도 얻었죠.”

과연 장애물이나 애로사항은 없었을까. “물리, 화학, 생물, 수학 등 기초분야에 학생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교수 35명에 학생이 57명이었습니다. 11개 학과를 없애고 대체의학대학이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픔도 많았지요. 하지만 350명을 모집하는데 경쟁률이 무려 25대 1입니다. 비전을 시각화(visualize)하고 역할과 사명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가치창조(value creation)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남북대화’식으로 하던 딱딱한 회의는 음식을 차려놓고 스탠딩으로 진행했습니다. 현장투어도 시작했습니다. 교수들이 현장을 알아야 하거든요. 20년간 자기 대학 외에 다른 대학에는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은 교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시장과 고객에 대한 이해가 명확한 사람이다. 시장이 어떻게 바뀌고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대학의 주요 고객인 학부모와 학생을 수시로 초청해 학교 변화를 알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전주대가 인구에 회자되게 만들었다. 지역 사회와의 활발한 교류를 위해 문화경영 아카데미 같은 CEO 과정과 국제영재학교도 만들었다.

학생들의 눈에 비친 전주대의 모습을 알기 위해 수시로 포커스그룹 인터뷰도 했다. 또한 초청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주대가 좋은 이유 3가지’를 쓰게 하고 당첨된 학생들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고객들은 자연스레 전주대에 대해 친근감을 갖게 됐고 지금의 변화를 가져온 불씨로 이어졌다.

그의 전공은 ‘전공불문’이다.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무엇을 전공이라고 부르기가 곤란하다. 서울대 농화학과를 나와 카이스트에서 국내 최초로 인간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표준연구소를 거쳐 한성대 교수 시절에는 산업안전공학을 했고 국제산업디자인대학에서는 부학장으로 디자인과 인연을 맺었다. 또 벤처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를 보면 “진리는 한 학문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여러 영역을 넘나든다”는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태생적으로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인물이다. 또한 프로젝트를 기안하고 수주하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다. 미시간대학 교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을 때는 닛산자동차에 ‘의자의 불편함’(seating discomfort)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해 40만 달러짜리 연구비를 따낸 적도 있다. 인간공학을 통해 자동차사고 피해실험을 실시하는 연구였다.

귀국 후에는 한국표준과학연구소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그가 몸담은 체위측정실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5년 단위로 국민 체위를 측정하는 곳인데, 각 부서에서 밀린 연구원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는 “식사 후 족구나 한 판 하지요”란 말이 쉽사리 나왔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먼저 이름을 인간공학연구소로 바꿔 과감한 도전을 시작했다. 당시 연구비는 연간 4,000만 원으로 42개 연구소 중 꼴찌였다. 하지만 그는 국가 연구사업에 뛰어들어 연구비를 지원받았고 2년 후에는 연구비 25억 원으로 외부수탁 1위가 되면서 42개 연구소 중 으뜸이 됐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뭔가 축적된 결과가 지금 나타나는 것이다. 그가 전주대를 변화시킨 것 역시 그 동안의 공력이 축적된 결과다. 그는 계속 무언가 바꾸고 도전을 했다. 안정된 표준연구소를 그만두고 한성대 산업시스템 공학과로 자리를 옮긴 것도 그렇고, 편한 교수 생활을 접고 생소한 디자인 쪽에 도전한 것도 그렇다.

어느날 국제디자인 대학원대학이란 신설대학에서 부학장을 뽑는다는 말을 들은 그는 거기에 도전해 부학장이 됐다. 그는 디자인경영학과를 개설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학교를 운영해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디자인과 경영, 공학을 결합시킨 인재를 뽑아 훈련하는 것이 목표인데, 시험을 이틀 보고 그룹토의를 평가에 반영했다. 어떤 학교도 해본 적이 없는 시도였다. 학생 전원을 6개월간 해외로 보내기도 했다. 입학생의 전공도 묻지 않았다. 재직 중 그가 만든 뉴밀레니엄, 뉴비전 최고경영자과정은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그의 커리어는 연구원과 교수이지만, 핏속에는 벤처기업가의 정신이 흐른다. 남들이 안 한 것을 해보고 이를 상용화시키는 데 관심이 많다.

기업을 만들기도 하고 투자를 받기도 했다. 그는 메디슨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경험이 있다. 카이스트 시절 메디슨을 창업한 이민화 회장과 함께 일했고 자회사인 메디다스의 프로젝트도 직접 진행했다. 벤처캐피탈 경험도 했고 김택진, 이재웅, 변대규 사장 등 벤처 1세대와 함께 벤처리더스클럽을 운영하기도 했다.

지금 그는 전주 한지의 국제화에 앞장서고 있다.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NPIC) 운영도 전주대가 하고 있다. 대학 운영기술을 수출하는 셈이다. “리더의 역할은 방향을 제시하고 가시화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See(보고), Feel(느끼고), Change(바꾸는 것)는 사람의 생각이 변해가는 가장 기초적인 구조입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소유자 이남식 총장이 이끄는 전주대의 무한한 혁신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 한근태 약력

한스컨설팅 대표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환경재단 운영위원

환경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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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