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일가 재산부터 재벌가 뒷이야기까지 고급 데이터 보유일반 국민·투자자들에게 객관적인 기업평가 기준 제시 목표

신흥 중견그룹 A사의 매주 월요일 임원회의 석상에는 한 가지 ‘특이한’ 보고서가 올라온다. 자사의 회장을 비롯해 주요 재벌그룹 오너 일가의 주식재산 변동 내역이 담긴 문건이다.

이 보고서를 볼 때마다 A사 회장은 얼굴 표정이 환해지곤 한다. 어느새 자신이 기존 재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상을 갖게 된 데서 오는 흐뭇함 때문이다. 물론 기분이 언짢을 때도 있다. 계열사 주가하락으로 재산 평가액이 떨어졌을 경우다.

최근 국내 재계에서는 재벌그룹 대주주의 주식 평가액 및 지분 변동 내역 등을 실시간으로 반영한 자료를 제공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가 은근한 화제가 되고 있다. 비단 재계만이 아니다.

재계 소식을 취재, 보도하는 언론인들 사이에서도 이 사이트는 단연 관심의 초점이다. 주인공은 국내 최초 재계전문 포털사이트를 표방하는 ‘재벌닷컴’(www.chaebul.com)이다.

재벌닷컴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재벌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벌 총수와 대주주 일가족 5,700여 명의 상장, 비상장 주식 보유 현황은 물론 재벌들의 경영활동 소식, CEO 인물평, 송사(訟事), 인맥과 혼맥, 재벌가 사람들의 동정, 은밀한 비화 등 다루는 정보의 범위가 매우 방대하다.

임원급 이상 1만7,700여 명의 주요 경력, 출신학교, 가족관계, 주변 평가 등을 담은 재계 인사 인명록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2배에 이른다.

그렇다면 재벌닷컴은 왜 이런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을까. 정선섭(48) 대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역사와 연륜이 깊어지면서 부(富)의 규모도 커졌지만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검증하는 잣대가 없었어요. 그래서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일반 국민들과 투자자들에게 기업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객관적인 평가 근거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이 일을 하게 됐죠.”

정 대표는 20년 가까이 취재현장을 누빈 기자 출신이다. 특히 재계 소식만큼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파악하는 경제전문 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일선에서 기자로 뛸 때 늘 한 가지 궁금증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재벌들의 정확한 재산은 얼마인가, 또한 그들이 내는 상속세나 증여세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그러다 자신이 직접 재벌과 부호들의 재산을 밝혀내면 어떨까 하는 꿈을 간직하게 됐다. 그 꿈은 2년 전 재벌닷컴 설립으로 실현됐다. 정 대표는 매년 세계의 부호 순위를 발표하는 미국의 유력 경제전문지를 벤치마킹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재벌은 한국 특유의 표현이다. 이 단어는 우리 경제가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면서 외국인들에게도 한국만의 독특한 대기업집단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로 통용되고 있다.

재벌은 그러나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말이다. 그런 탓에 재벌들도 재벌이라는 호칭을 아주 싫어한다. 하지만 재벌을 떼놓고 한국 경제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 대표는 재벌을 어떻게 평가할까.

“사람들은 흔히 재벌을 뭉뚱그려 비판하는 경향이 많습니다만, 저는 기업과 오너를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재벌 소유의 ‘리딩 컴퍼니’들은 우리나라가 국부(國富)를 축적하는 데 결정적이고 선봉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그들의 공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반면 재벌 오너들 중에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의식구조와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아쉬운 대목입니다.”

정 대표는 국내 재계의 가장 큰 취약점이 바로 도덕성과 같은 ‘정신적 가치’의 빈곤이라고 강조했다. 부의 크기만큼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재벌들을 ‘덩치만 큰 초등학생’에 빗대기도 했다. 문제는 재벌의 영향력이다. 한국 경제의 주도권을 재벌이 갖고 있는 데다, 그 힘은 갈수록 더욱 공고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터에 재벌에 대한 적절한 견제장치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재벌닷컴이 그 역할을 일부 할 수도 있다는 게 정 대표의 생각이다. “국내 재계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조언하고 평가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숙화를 위한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재계도 재벌닷컴의 활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때때로 민감한 사안이 재벌닷컴 발(發)로 보도돼 아연 긴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부 기업들은 재벌닷컴의 정보공개 여파로 정정공시를 내기도 했다. 재벌닷컴이 기업 투명성 제고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례다.

정 대표는 재벌 총수와 일가족의 주식 보유 현황을 데이터베이스(DB)화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였다. DB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전산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다.

재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뉴스 뒤의 뉴스’를 추적하는 데는 자신의 경륜과 함께 인맥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특히 현직 기자 시절부터 교분을 나눠온 전ㆍ현직 대기업 임원들은 그에게 힘을 보태주는 든든한 원군이다.

“재벌가(家) 이야기는 그들 집안의 내력과 역사를 모르면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한 코스닥 상장기업 대표가 모 재벌과 가까운 친척관계라는 점 때문에 주가가 폭등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 대표 측과 모 재벌 오너 측은 악연으로 갈라선 사이였어요.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일반 투자자들은 막연한 기대감으로 주식을 사들였다가 주가가 폭락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죠. 이 사건은 왜 재벌가의 뒷이야기가 중요한 지를 잘 나타내는 사례입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몇몇 친분 있는 재벌 2, 3세들도 종종 정 대표에게 쏠쏠한 재계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또한 재벌닷컴 VIP 회원 중에도 재벌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의 인맥이 얼마나 광범위한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재벌 2, 3세들은 정보교류와 친목을 위해 자기들끼리 모임을 자주 갖습니다. 그들 중에는 비상한 두뇌와 합리적인 성품을 겸비한 사람들도 제법 많아요. 저는 그들이 경영권을 승계하면 한국 재벌들도 글로벌 수준으로 변모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2, 3세 중에는 선대 회장이 일군 업적과 성과를 무너뜨리지나 않을까 우려될 만큼 자질이 부족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재벌닷컴의 기본 입장은 재계에 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 제공이다. 출범 초기 다소 거부감을 나타냈던 재계도 이제 재벌닷컴의 취지와 방향에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에는 인지도가 수직 상승하면서 사업 제휴를 제안해오는 기업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 대표는 이제 첫 걸음을 뗐을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데이터라는 것은 오랜 시간 축적돼야만 권위와 신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국내 최고의 재계 관련 데이터 전문기관을 목표로 삼은 재벌닷컴의 행보를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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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