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전 별볼일 없던 교향악단 맡아 '말러 신드롬'등 행복 바이러스 전파

경이적인 시청률, ‘똥떵어리’ 같은 유행어 등으로 숱한 화제를 낳았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이하 베바)’의 바이러스는 참 지독하다. 종영 후에도 베바 열풍이 좀체 사그러들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지독한 바이러스의 주범은 단연 강마에(김명민 분)다. 괴팍하고 오만하며, 거침 없이 독설을 날리는 독특한 캐릭터가 재미와 쾌감을 준 것이다. 그러나 폭발적인 그의 인기비결은 무엇보다 그가 실력 있는 지휘자, 즉, 마에스트로의 카리스마를 보여줬다는 데 있다.

소위 ‘명품 예술’에 대한 갈증을 품고 있던 대중이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드라마 속 마에스트로를 보며 희열을 느낀 것이다. 이는 드라마에 삽입된 클래식 곡들을 모은 음반이 시중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등 드라마 방영이래 클래식 음악 인기가 치솟고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독한 클래식 바이러스를 전파한 강마에를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임헌정 상임지휘자(서울음대 교수)다.

19년 전, 지방 소도시의 별 볼일 없는 교향악단이었던 부천시향은 발전을 위해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상임지휘자 제안을 받은 임 씨는 부천시에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고, 부천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그는 작은 지방 교향악단은 완성도 높은 연주와 참신한 기획시리즈로 강한 클래식 열풍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계속된 부천시향의 ‘말러 교향곡 전곡 시리즈’다. 그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말러의 음악을 관객들에게 널리 알리겠다는 신념으로 과감한 도전을 시도했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때까지 생소하기만 하던 말러 교향곡을 임 씨가 이끄는 부천시향의 수준 높은 연주로 접한 관객들은 그야말로 열광했다. 전석 매진과 사상 최고의 커튼콜 등의 기록이 쏟아져 나왔고, 인터넷에 부천필 애호가들의 동호회도 여럿 생겼다. 이로 인해 ‘말러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대중이 수준 높은 음악을 간절히 원한다는 확신이 있었지. 그 동안 말러 음악이 대중적이지 못했던 건 관객들 귀가 나빠서가 아니라, 참신한 기획력이 부족했고, 연주의 질이 낮았기 때문이었어. 관객들은 역시 훌륭한 연주를 알아보더군.”

이처럼 일반인들이 갖고 있던 클래식 음악에 대한 높은 편견의 벽을 무너뜨리고, 잠재돼 있던 (순수)예술에 대한 열정을 일깨운 건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장인정신이었다.

“먹는 건 불량식품이라고 신고하면서, 불량연주는 왜 신고들 안 하는지 모르겠어. 입으로 먹는 것만 중요한가. 정신이 먹는 것도 중요하지. 근데 거기에 대해선 심각하게 생각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

드라마의 인기는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음악가에 대한 호기심도 높였다. 마에스트로 지휘자는 정말 별종일까.

“일반인들이 보기엔 우리가 자기네와 다른 일을 하니까 특별해 보이겠지. 내가 보기엔 과학자도 특별해. 소위 명장은 계속해서 고된 연습을 하는 사람이지. 나는 아침에 눈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항상 악보가 옆에 있어.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도 악보를 보지. 골프 치는 음악가들, 난 이해가 안돼.”

완벽의 소리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는 음악가. 하지만 음악인의 진로는 험난하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음악가는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낮은 봉급에도 아랑곳 않고, 혹독한 연습을 견뎌내는 부천시향 단원들에게 한없이 고맙다고 말한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좋아졌지. 처음 여기 부임해 왔을 때만 해도 연습실에 쥐가 왔다 갔다 하고, 하수구 냄새가 지독하고, 파리에 모기가 얼마나 들끓던지. 게다가 단원들 월급은 또 얼마나 박봉인지….”

마에스트로의 자존심일까. 그는 돈이 전부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아는 사람 아들이 미국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월가에서 일하며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어. 그런데 이번 금융위기 때 재산을 몽땅 잃었다더군.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두 돈을 위해 인생을 바치는 모습이 참 허무해. 많은 예술가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을 꺾지 않는 이유는 예술이 갖는 힘 때문이야. 예술은 영혼을 정화시키고 고양시키며,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그건 전염성이 아주 강해.”

임 씨는 ‘영혼의 울림’을 주지않는 상업주의 예술이 범람하는 작금의 현실도 비난했다. 예술성이 없는 문화 콘텐츠는 개인과 사회를 타락시키는 나쁜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예술가라면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예술을 부활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테크닉만 가지고는 감동 못 줘. 테크닉은 기본이고, 탐욕과 위선, 이기심이 없어야 하지. 영혼이 맑아야 감동을 줄 수 있고, 그게 훌륭한 예술가라고.”

부천필의 또 하나의 도전인 브루크너 교향곡 연주회를 앞둔 그는 요즘 24시간이 부족하다. 역시 생소한 음악이지만 관객들은 아름다운 브루크너의 음악에 빠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와 그의 단원들을 연일 연습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부천시향 상임지휘자로서 그의 철학은 20년 전부터 변함이 없다. 최고의 음악으로 시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다.

“내 소임은 클래식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클래식화지. 클래식 수준을 대중 눈높이로 낮추는 게 아니라 대중의 수준을 높은 클래식 음악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거야.”

◇ 마에스트로 임헌정은

1953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음대와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지휘와 작곡을 공부했다. 1989년부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대음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제14회 동아 콩쿠르에서 전무후무하게 작곡부문으로 대상을 차지하며 일찍이 음악적 재능을 인정 받았다.

이밖에도 그는 문화체육부가 지정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8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상)을 수상했고, 동아일보 클래식 음악분야 전문가 조사에서 ‘국내 최고의 지휘자’에 선정되며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지휘자로 인정 받고 있다. 그는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회를 비롯해 계속해서 참신한 기획과 완성된 연주로 침체된 국내 클래식 음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전세화 기자 cand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