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감나는 인조 사체 제작으로 실력 인정… '애니메트로닉스' 개발 박차

한 여자가 손에 털이 숭숭 박힌 요괴의 손을 만지작거린다. 한 남자는 목이 잘려나간 사람의 얼굴에 칠을 하고 있다. 어떤 이는 목 없는 말의 움직임을 완상하는 중이다.

영화 특수분장 스튜디오, 메이지(MAGE)의 풍경이다. 18일 오전 경기 하남시 미사동 메이지 스튜디오를 찾아 <타짜>의 최동훈 감독 연출, 강동원×임수정 주연 영화 <전우치> 촬영 준비에 여념이 없는 신재호(42) 특수분장 감독을 만났다.

갑자기 지방 촬영장에 호출을 받고 갔다 급히 돌아왔다는 신 감독의 낯빛과 충혈된 눈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눌러 쓴 검은 모자와 츄리닝 차림 역시 그의 생활을 대신 말해준다. 신 감독은 자주 웃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일에 대해 말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고 일종의 확신 같은 것이 느껴진다.

■ "이미지를 캐릭터화, 생명력까지 불어넣는 특수분장"

“특수분장은 사기다”

자신의 일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냐고 묻자 신 감독이 한 말이다. 최대한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드는 게 그의 일이라는 점에서 나온 답이다. 신 감독은 “지금의 특수분장은 단순히 수염을 붙여주거나 상처를 만드는 것 뿐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이미지를 캐릭터화하고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말한다.

현재 작업하는 십이지신 요괴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용은 물론 쥐, 소, 말 등의 동물을 모티프로 한 상상의 동물인 십이지신상을 최대한 살아있는 것 같이 형상화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실리콘, 라텍스 등을 움직이는 손길에 따라 요괴는 점점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그가 만드는 십이지신 요괴는 단순한 가면이나 인형이 아니다. 손과 눈, 귀, 입 등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만들어내기 위해 안에는 갖가지 기계 장치가 들어있다.

그의 ‘사기’에 속은 것은 이 글을 읽는 당신 자신일 수도 있다. 영화 <적벽대전>이나 KBS 드라마 <대왕세종>에 등장하는 말 역시 그의 작품이다. 칼 위에서 용감하게 칼을 휘두르는 장수의 연기에 집중하느라 당신은 화면의 말이 가짜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 대표는 “잘 몰라줘서 섭섭했다기보다는, 완벽하게 속여서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흡족했다”며 악동 같은 미소를 흘린다.

이런 결과물은 과학기술과의 결합에 의해 가능했다. 움직이는 말 모형이나 눈과 입, 귀를 껌뻑이고 사지를 움직이는 괴물을 만들 때는 전자통신연구소와의 협력으로 애니메트로닉스(Anitronics; 애니메이션(animation)과 일렉트로닉스(electronics)의 합성어로 기계적 뼈대나 전자 회로를 가지고 제작한 실물과 흡사한 캐릭터원격 조정을 통해 움직이게 하는 CT(culture technology) 기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 '우뢰매'에서 '사체'까지

그가 처음부터 ‘잘 나갔던’ 것은 아니다. 막연하게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는 특수분장에 관한 책이나 제작과정이 나온 외국 책을 보며 대리만족을 했다. 신 감독은 90년 김청기 감독의 16밀리 영화 <우뢰매>에 참여하면서 특수분장 일을 시작했다.

신 감독은 “아동영화 시장이 있긴 했지만, 최대한 적은 예산으로 빨리 찍어야 했던 상황에서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시작했다는 점에서 <우뢰매>는 의미가 있었다. 신 감독은 귀신의 손이 땅에서 튀어나오는 장면과 비행기 날리는 장면에서 무선모터 등의 ‘메카닉’ 장치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수분장을 ‘분장’에서 끝내지 않은 셈이다.

금융실명제 여파로 영화산업이 위축됐던 이후 수년간 일감을 찾지 못했던 그는 95년 심형래 감독의 <파워킹>에 참여했다. 98년 <조용한 가족> 제작에 참여해 실감나는 인조사체 등을 만들어내며 실력을 인정 받기 시작한다. 99년에 미니어처가 많이 등장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각종 괴기스러운 장면이 많았던 <텔미썸딩> 등의 작품으로 주목 받았다.

<텔미썸딩>에서는 시체를 만들려고 해부학과 법의학을 공부하고 알지네이트에서 실리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재료를 테스트해 만든 시체 모형이 일본에 주문해 만든 것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다시 한번 주목 받은 신 대표는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로 대종상을 거머쥔다. 신 감독은 “리얼함을 강조하기 위해 부검실에 들어가 사체를 살피기도 하고, 부검하는 장면의 동영상을 뒤지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 '죽여야 사는 남자'

진짜보다 진짜 같은 ‘사체’를 만들려 사투를 벌이는 그에게 자신의 창작물은 어떤 의미일까. 사체 모형이 즐비한 작업실에서 밤샘작업 할 때 무섭지 않느냐는 질문에 신 감독은 “나의 창작물이기 때문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며 “작업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죽여야 사는’ 그의 작업을 이해해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셈이다.

남들의 오해와 상관 없이 그는 자기 길을 걸어왔다. <텔미썸딩>을 촬영할 때는 의학지식이 있는 범인이 피해자의 사지를 절단하는 장면에서 ‘사실감’을 높이는 게 관건이었다. 소, 돼지, 닭 등 실제 고기를 구해 땅바닥에 떨어트려보기도 하고, 칼로 째기도 하면서 실제와 비슷한 질감의 사체 모형을 만들어냈다.

‘죽이는’그의 작업은 때로 즉흥력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작년에 한 외국작품에서는 처참하게 살해된 뒤 부패된 시체를 거의 다 표현했는데 촬영시간이 임박했다.

‘임기응변’으로 현장에 있던 귤 껍질에 색을 칠해 혀로 사용했다. 작년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찾아온 펑 샤오캉 감독의 영화 <집결호> 촬영을 하러 중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날에는 스튜디오에 불이나 준비한 작품들이 다 타버렸다. 그는 할 수 없이 재료를 들고 현장에 가서 특수분장 용품을 만들었다. 단편영화를 찍을 때는 피(血) 용도로 케첩을 쓰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젊은 영화인들을 보는 그의 생각은 어떨까. 신 감독은 “재료 하나를 구하려 며칠씩 돌아다니던 예전과 같은 열정을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라며 “요즘은 인터넷만 통하면 어떤 정보든 얻을 수 있지 않느냐”며 여건은 나름대로 개선됐지만 ‘열정’이 예전 같지 않은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신 감독은 자신의 ‘열정’을 체계화하고 있다. 그는 이미지를 디자인하면 자동으로 형상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하는 등 작업공정의 디지털화를 추진하고 있다. 기관과의 협조 아래 애니메트로닉스 개발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다.

신 감독은 보다 정교한 ‘사기(?)’를 꿈꾼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