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정신 한솥밥, 무대를 살찌웁니다"

문화를 향유하는 안목이 다양해진 요즘 주류문화의 식상함에 반발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그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주류문화보다 비주류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는 추세다. 문화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기엔 이미 둘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하여, 비주류는 이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주류는 아웃사이더나 이단아가 아니라 ‘비전’이 있고, 예술세계에 ‘비주얼’이 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미래가 밝은 문화인들이다. 뚜렷한 주관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나가는 ‘내일을 꿈꾸는 비(飛)주류’. 그들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88-1번지는 연극 실험실 ‘혜화동 1번지’의 주소다. 100석의 객석, 10평 가량의 무대. 객석과 무대를 다 합쳐봐야 20평 남짓 될까. 비록 극장은 협소하지만 혜화동 1번지의 위력은 대단하다.

기국서, 이윤택, 김아라, 채승훈(1기), 박근형, 손정우(2기), 김낙형, 이해제, 양정웅(3기) 등 혜화동 1번지 출신 선배들은 연극계 요직에서 활동했거나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스타 연출가들이다.

실험극이지만 대중성을 확보한 화제작도 있었다. ‘청춘예찬’(박근형 연출), ‘한여름 밤의 꿈’, ‘미실’(양정웅 연출), ‘나의 교실’(김낙형),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김재엽 연출), ‘임대 아파트’, ‘사건발생 1980’(김한길 연출) 등은 혜화동 1번지 마니아를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혜화동 1번지가 닻을 올린 것은 1994년. 연출가 김아라 씨의 연습실을 동료들이 함께 쓰자고 한 데서 비롯되어 지금 4기까지 오게 되었다. ‘상업적인 연극에서 벗어나자’, ‘연극의 고정관념을 탈피한 개성 강한 실험극을 무대에 올리자’는 결의로 만들어져 14년째 혜화동 1번지는 아직도 실험 중이다.

연출가 집단이 10년 넘게 동인제 전통을 이어오는 것은 국내에서 혜화동 1번지가 유일하다. 게다가 혜화동 1번지 동인은 연출뿐 아니라 작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혜화동 1번지 소극장’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극단을 이끌며 작품을 제작하는 연출가들이기도 하다. 선배들이 가능성 있는 후배 연출가를 추첨을 통해 만장일치로 뽑기 때문에 혜화동 1번지 동인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자부심이다. 소극장 대관료가 저렴한 것도 있지만 실험극에 관심이 많은 젊은 연출가들에게 혜화동 1번지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는 인큐베이터 같은 곳이기도 하다.

혜화동 1번지의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실험극이다. 4기 동인 페스티벌 ‘극.장.전’이 한창 열리는 혜화동에 실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4기 동인들이 모였다.

두 달 동안 펼쳐지는 동인 페스티벌에서 자기 색이 분명한 연극을 릴레이로 올리고 있는 4기 동인들은 극단을 이끌어가는 대표이자 작품을 제작하는 연출가이며 혜화동 1번지 소극장을 운영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페스티벌 때마다 실험극을 올리며 관객에게 시험 받는 기분이 아직도 즐겁기만 한 4기 동인 5명이 혜화동 1번지 동인으로 사는 3년 동안 느낀 감정을 이야기 보따리로 풀어놓았다.

■ 선배들의 유산 후배들에 물려줄 책임감 느껴

‘혜화동 1번지’는 국내 유일의 연출가 동인집단이다. 동인으로 있을 동안 극장 운영과 동시에 작품을 제작하는 연출가 역할을 해내야 한다. 자부심이 대단할 것도 같지만, 반면 ‘혜화동 1번지’라는 이름값 때문에 공연 때마다 부담도 만만찮을 것 같은데 실제로 어떤가?

김혜영(극단 ‘유정’ 연출): 맞다. 자부심보다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크다. 그만큼 우리를 지켜봐 주는 사람들이 많아서라고 생각한다. ‘혜화동 1번지’만은 뭔가 달라야 한다는 것, 그래서 기대감에 어긋나지 않게 ‘혜화동 1번지’의 연극 정신을 우리가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현종(극단 ‘추파’ 대표): 지금은 좀 덤덤해졌지만, 기존 선배들이 워낙 잘해오셨고 현재도 작업을 꾸준히 하시기 때문에 후배 된 입장에서 부담감이나 책임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부담감은 오히려 4기만의 무언가를 창출하려고 고민하고 작품을 만들 때는 좀 더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작업에 임하게 되는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해 왔던 것 같다.

김한길(극단 ‘청국장’ 대표): 동인제이기 때문에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어 자부심은 배가되고 부담은 절감된다고 할까.

박정석(극단 ‘바람풀’ 상임연출, 연출가 그룹 ‘자유항해’ 동인): 어느 곳에서나 잘 해야겠다는 부담이 있듯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작품을 할 때마다 최고로 만들어야 한다고 늘 다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창작자로서 기쁨이나 자부심이 줄어들 것 아닌가?

김재엽(극단 ‘드림플레이’ 대표): ‘혜화동 1번지’는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저력 있는 공간을 빌려 쓰고 또 좋은 후배들에게 넘겨줄 의무가 있는 공간이다.

동인으로 있는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연극과 또 대학로에서 꼭 필요한 연극을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하지 않고 남들이 보지 않으려는 세상과 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열쇠 아닐까.

3- '행복탕' 공연 장면
4-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공연 장면

■ 대중 무시하는 상업주의는 잘못된 것

2006년 1월 4기 동인으로 선발된 후 동인으로 활동한 지 어느덧 만 3년이 되었다. 동인이 되기 이전과 비교할 때 어떤 점이 달라졌는가? 지금이 연출가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김한길: 그 동안 여러 가지를 모색해 왔는데, 3년째 접어드는 현재는 2막 1장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현종: 솔직히, 아직 이도 저도 아닌 것 같다. 주위에서 봤을 땐 “넌 어떤 스타일이고 어느 부분이 장점이고 무엇에 얽매여 있다”라는 지적을 하기도 하지만 점점 더 숙제가 더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김재엽: 혜화동 동인으로 지내는 동안 개인적인 모색을 꼽는다면 지금 2008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이 거세된 관념과 낭만은 참 뿌리가 얕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로에 오는 무수한 관객들이 너나 없이 한 시간이 넘게 남의 연애 얘기를 보고 들으려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린 그들이 전부 다 그런 것만 좋아할 거라고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대중을 무시하는 상업주의는 올바른 대중연극이 아니다.

김혜영: 쉬지 않고 작업하면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런데 쉽게 쉬지 못하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면 문제다. 동인이 되어 했던 작업은 나의 색깔을 찾게끔 해준 시간이다. 지금은 그 색깔 안에서 또 다른 연극적 실험을 시도하려 한다.

박정석: 여러 사람의 마음과 뜻을 모아야 앙상블이 이루어지는 연극의 속성상 동인을 하면서 만들게 된 극단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더 단단해지길 바라고 있다. 다른 극단과 달리 배우보다 연출가들이 더 주목받다 보니 배우들이 뒤늦은 조명을 받게 된 감이 없지 않다. 이제 배우들도 주목을 받았으면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시시때때로 나의 현재를 들여다보고 싶다.

■ '혜화동 1번지'는 실험공간의 대명사

혜화동 1번지의 정체성은 실험극이다. 하지만 페스티벌 때마다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실험정신이 설렐 때도 있지만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일반 관객들은 혜화동에 부쩍 늘어난 소극장에서 올려지는 뮤지컬을 더 선호하는 경향도 있는데,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다.

우현종: 내게 실험이란 동시대의 정서와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 내용과 형식에 대한 적절한 조화와 표현이다. 어떤 면에서 실험이란 완성되지 않은 시도에 의미를 둘 수도 있지만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하거나 그때그때 맞게 조율하고 변형시키는 작업도 또 다른 실험의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한길: 중요한 것은 작업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다. 작업하면서 즐거움과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겐 작업이 우선이고 그 이후는 배웠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인다.

김혜영: 실험극을 하면 연출은 재미가 있다. ‘누구를 위해 연극을 하는가’를 생각하면 객석을 보면 답이 나온다. 하지만 관객과 소통이 잘 안 된다 생각하면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이것만(실험) 고집해야 하나? 아님 어느 정도 타협해야 하나? 지금도 이 문제는 나에게 계속 숙제일 것이다.

박정석: ‘실험’에 방점이 찍히느냐, ‘정신’에 방점이 찍히느냐? 되물어보고 싶다. 어차피 공연물은 관객을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연출은 관객의 마음을 읽고 관객의 욕구를 해소해 주어야 한다. 여러 사정상 다른 곳에서 감히 할 수 없는 것을 ‘혜화동 1번지’에서는 천연덕스럽게 펼쳐놓을 수 있다. ‘혜화동 1번지’는 실험공간의 대명사가 된 셈이다.

김재엽: 절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창작극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실험 아닐까? 지금 대학로는 해외에서 유명한 작품을 사 와서, 영화와 공중파의 위력을 빌리거나 스타 마케팅을 동원하고, 자금력으로 홍보 광고를 일삼고, 빛 좋은 개살구 같이 그럴 듯한 포장으로, 세련된 대중극을 고급스런 레퍼토리로 포장하려는 프로듀서들과 기획자들의 전성시대다.

그들이 하는 것은 이미 길들여진 관객들을 ‘유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새로운 관객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실험은 관객을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공연에서 던진 화두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따로 또 같이' 배우는 시간 소중해

‘연극 실험실 혜화동 1번지’라는 극장을 운영하는 동인으로서, 극단을 이끌어가는 연출가로서, 서로에게 자극받고 배워가는 것들은 무엇인가? 다섯 분의 스타일이 서로 달라 서로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도 궁금하다.

박정석: 당연히 다르다. 그리고 달라야 한다. 그 색깔들이 세상을, 연극을 풍성하게 한다고 믿는다. 기회가 된다면 서로의 작품을 서로 바꾸어서 연출해 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김재엽: 우리 4기 동인들은 창작의 힘겨움에 대해서 서로 토로하는 경우들이 많다. 작품에 대해서는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분명히 받고 있다. 고립된 개인이 아닌 연대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집단으로 서로에게 충분히 힘이 되고 있다.

김한길: 그러게 말이다. 난 4기 동인들의 존재 자체가 지원이라 생각한다.

우현종: 연출가 동인으로서 좀 더 활발한 토론과 자극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오히려 각자 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페스티벌의 주제를 정하고 공연을 보면서 느끼는 시각 차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각자 느껴가는 것들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김혜영: 4기 동인들과 술자리만 같이 해도 서로의 대화 속에서 배울 점이 참 많다. 우리 5명은 연출 스타일이 정말 다르다. 특히, 내가 많이 다른 거 같다.(웃음) 네 분은 언어(이야기)를 중요시하지만 난 몸(이미지)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다양해서 더 재미있고 다른 동인들의 작품을 보고 매번 내가 소홀히 하는 부분에 대해 배워 나가는 중이다.

■ 동인 작업은 외부 무대 확장의 토양

혜화동 1번지 동인 안에서의 연출과 밖에서의 연출의 차이는 무엇인가?

김혜영: 동인 안에서 하는 작품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밖에서는 그러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데 오히려 나는 동인 안에서 하는 작품을 더 고민하는 편이다. 한마디로 밖에서 하는 작품과 큰 차이는 없다.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을 한 작품을 다른 공간에서 확장시켜 시도하기 때문이다.

김한길: 외부 작업에서는 제작 기획에 있어서 의견이, 혜화동 1번지의 공연은 배우들과의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

박정석: 관객의 폭을 좀 더 넓게 잡느냐, 아니면 특정 관객을 의식하느냐의 차이다.

우현종: 혜화동 1번지 소극장에서의 작업은 공간의 제약상 일반 관객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하는 것에 우선을 둔다. 하지만 외부에서의 작업은 미리 희곡이 선택된 경우도 많고 배우들도 정해진 경우가 있어 연출가의 욕심보다는 기획 쪽과 관객의 시각에서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

김재엽: 안에서 하는 작업은 넓은 의미에서 테마를 공유하고 담론을 사유하는 방식을 고민하면서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더 섬세하고 더 긴장하게 된다. 혜화동 1번지라는 의미의 차별성과 창조성을 더 고민하게 된다. 밖에서라고 특별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래도 혜화동에서 창작극 초연을 해왔기 때문에 애착이 더 큰 편이다.

■ 한겨울의 실험극 페스티벌 "놓치면 아까워요"

‘혜화동 1번지’의 동인 페스티벌이 지난 11월12일 시작해 내년 1월11일까지 대학로 혜화동 1번지 소극장에서 열리고 있다. 페스티벌의 타이틀은 ‘극.장.전’. ‘혜화동 1번지’ 4기 동인 5명의 연출가들이 직접 쓰고 연출한 작품을 릴레이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지난 23일에는 극단 드림플레이 대표인 연출가 김재엽 씨가 우리 시대 20대의 초상을 담은 ‘과연, 누가 20대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를, 12월1일에는 극단 추파 대표인 우현종 씨의 1950년대 낭만과 예술의 거리 명동을 무대로 그 시절 예술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세월이 가면’을 마쳤다.

극단 청국장 대표인 김한길 씨의 ‘귀로’(12월 5~14일)와 극단 유정 대표 김혜영 씨의 ‘행복탕’(12월18~28일), 박상륭의 소설을 각색, 연출한 극단 바람풀 박정석 씨의 ‘남도1’(12월31일~2009년 1월11일) 등 젊고 가능성 있는 연출가들의 개성과 실험정신으로 반짝이는 작품들이 올 겨울 대학로 ‘혜화동 1번지’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