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그리움이' 앨범 감명 伊 성악가… '별지기' 한국어로 불러 환호가곡 활성화와 정가 판소리 새롭게 해석 세계 무대 노크

12월 8일은 이탈리아의 대규모 축제 중 하나인 성모수태축일이다. 각 도시에서는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는데, 베네치아 북쪽에 위치한 트레비소의 작은 도시 ‘피에베 디 솔리고(Pieve di Soligo)’에서는 이 날 특별한 음악회가 열렸다.

베네치아 콘서바토리의 성악과 교수인 소프라노 ‘실비아 다 로스’가 한국의 가곡 ‘그토록 그리움이’와 ‘별지기’를, 한국의 테너 이영화가 벨리니의 가곡 ‘회상’을 한 무대에서 선보인 것.

실비아는 특히 ‘별지기’를 한국어로 완벽히 소화해내 환호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가곡이 국내 무대에 올려지는 경우는 흔하지만 한국의 가곡이 이탈리아 성악가의 자발적인 의사로 불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반할만한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를 지은 동양의 작곡가는 영상을 통해 관객들과 인사를 나눴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당시 소프라노 조수미가 불렀던 ‘아! 동방의 아침나라’를 작곡했던 임준희 씨다.

“기쁘고 고맙죠. 음악이 국적, 인종을 초월해 세계인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어요.” 이번공연이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불과 한달 전. 그러나 훨씬 전부터 깜짝 놀랄 일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임준희 작곡, 테너 이영화 노래로 지난해 국내에 발매된 앨범 ‘그토록 그리움이’는 이탈리아에서 피아노와 연출을 공부하는 한국인에 의해 이탈리아에 이르렀다. 그 음반을 들은 소프라노 실비아는 노래를 자청했고 앨범의 첫 곡 ‘그토록 그리움이’의 번역에만 6개월이 소요됐다.

“이태리어에는 ‘그토록 그리움이’라는 애달픈 표현이 없대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니까 가사에 나오는 애절한 단어를 찾는데 한참 걸렸다고 하네요. 또 ‘별지기’에 나오는 ‘자장자장’이 이탈리아어로는 ‘닌나닌나’라고 해요. 이 말이 재밌어서 연습이 끝날 때마다 성악가들이 ‘닌나닌나’를 외쳤다는 얘길 들었어요. 노래를 통해 서로의 문화까지 알아가게 되는 과정이 즐거웠어요.” 공연을 마친 이탈리아 성악가들은 ‘그토록 그리움이’ 앨범에서 다섯 곡을 선정해 음반을 발표하고 그 과정을 책으로도 엮어낸다는 소식도 전해왔다.

‘별지기’를 작사한 음악평론가 탁계석 씨는 “우리가 산타루치아 부르면서 이태리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노래의 전파력은 핵무기보다 강합니다. 모차르트는 아름다운 선율로 세계를 정복하지 않았나요.”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내년에는 그들을 초대해 교류를 이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각별한 인연은 또다시 새로운 실타래를 풀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임준희 씨는 지금은 작고하신 어머니(김경희 시인) 덕에 어릴 때부터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왔다. 그녀의 멜로디 속엔 ‘아! 동방의 아침나라’와 ‘애수’ 등 어머니의 시어가 살아 숨쉬고 있다. 시를 음악으로 변환하는 작업은 그녀에겐 고되면서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시와 음악의 만남은 완결된 두 개의 이질적인 대상이 섞이는 과정이 아니다.

그녀는 시어가 선율 속에서 운율과 호흡으로 피어나는 것에 주목한다. “작사가와 의견을 많이 나누는 편이에요. 노랫말에 어울리게 시어를 바꾸거나 줄이거나 혹은 반복해도 되는지 의견을 묻죠.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가사와 음악이 어우러져서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태어난 것 같아요. 또 제 곡을 잘 소화하는 연주자와도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특히 테너 이영화 씨가 정확한 딕션과 감성으로 제 음악을 잘 표현해줍니다.”

그녀는 최근에도 KBS 라디오 FM신작가곡으로부터 가곡을 위촉받아 새로운 노래를 완성해냈다. 그녀가 그동안 주로 작업하던 시간은 새벽 5시부터 정오까지였다. 잠들기 전까지 그녀는 시를 반복해서 외우는데, 그 시어는 잠자는 사이 정리가 돼 새벽 즈음 음표가 되어 춤을 춘다.

이제 고3이 된 큰아들 덕에 작업시간은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로 옮겨져 예전 생활패턴과는 달라졌다. 그러나 ‘곡을 쓰는 것도, 가족을 챙기는 것도 정성이 필요하다’는 그녀는 아쉬운 내색도 없이 여전히 오선지 위에서 부지런히 펜을 움직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기는 목소리라는 생각에 6년 전쯤부터 가곡에 힘을 쏟고 있는 그녀가 또 하나 무게를 싣는 부분은 양악과 국악이 더해진 음악이다.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있지만 특히 국악과의 만남은 두드러진다. 정가(正歌)와 테너의 이중창이 아름다운 ‘천년애가’와 2006년 독일에서 초연한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천생연분>이 대표적이다.

“마음에 따스함을 전하는 음악 치유의 힘을 국악에서 발견했어요. 특히 ‘정가’를 듣고 제가 그동안 찾아왔던 음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백의 느낌엔 높은 미학이 담겨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지요. 일상에서도 옛 것과 오늘의 것이 공존하고 늘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음악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오페라 <천생연분>은 ‘시집가는 날’(오영진 작)을 원작을 한 작품으로 ‘양악과 국악이 결합해 한국의 미를 현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독일 초연에 이어 서울공연과 2008올림픽을 기념한 베이징 공연을 이어온 <천생연분>은 내년에는 필라델피아와 프랑스에서도 한국의 미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 날 인터뷰 자리에 함께 한 음악평론가 탁계석 씨는 현재 임준희 작곡가의 음악 동료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2002년 가평 가일 미술관에서 열린 가곡음악회의 해설자로 나섰던 그는 임준희 작곡가의 가곡 ‘겨울강’을 처음 듣고 작곡가로서 그녀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기존의 가곡은 기악적 아름다움이 저평가 되었지만 그 곡은 달랐어요. 반주부와 노래가 동시에 살아 있어서 성악과 피아노의 어울림이 조화롭거든요. 우리 가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봤습니다.”

이후 그녀의 곡에 ‘별지기’와 ‘천년애가’라는 시를 담아내기도 했던 그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획득하는 그녀의 작법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꺼져가는 한국 가곡의 불씨를 살리는데도 큰 역할을 해낼거라는 믿음이다.

교향곡을 작곡하는데는 2~3달, 오페라는 2~3년, 가곡 2~3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지금까지 100여 곡을 작곡해온 그녀는 올해 10~20편의 작품을 위촉받으면서 짧은 한 해를 보냈다.

그 중에는 생애 처음 도전한 뮤지컬 도 있었다. 내년에는 또다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그녀는 소극장 오페라, 코믹 오페라, 뮤지컬과 결합한 오페라 등 다양한 형태의 오페라 음악에 관심이 많다. 아마도 내년 한 해의 흐름은 그녀에게 더 빠르게 느껴지지 않을가 싶다.

“가곡의 활성화와 정가와 판소리를 새롭게 해석해 세계로 나가는 작업에 힘을 쓰려고 해요. 오페라에 중점을 두고 싶지만 워낙 작곡 욕심이 많아요. 영화, 드라마, 뮤지컬 음악에도 관심이 많고요.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네요.”라는 바람을 전한다.

그녀의 의지와 부지런함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KBS 클래식FM(93.1MHz)에서 그녀의 곡에 대한 청취자들의 리퀘스트도 높은 횟수를 차지하고 있다. 딱딱하고 남성적으로 여겨지던 가곡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그녀의 작법과 행보에 가만히 눈길이 모아지고 있다.

◇ 작곡가 임준희는…

1959년 서울생. 연세대에서 작곡을 전공,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작곡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오페라 <천생연분>, 국악관현악곡 <혼불>시리즈, 실내악 <춤추는 붓>, 국악실내악 <달하>, <여백>시리즈, 전자음악과 사물놀이를 위한 <두드리> 등을 통해 서양음악, 전통음악, 현대음악, 대중음악의 경계를 허물며 참신한 작품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MBC대학 가곡제 금상, 안익태 작곡상 대상, KBS 겨레의 노래대상 등의 수상경력과 ISCM세계음악제 등 세계 음악제에서 발표한 작품도 호평을 받아왔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