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 마음 담은 구세군 모금액 15% 증가… 32억 목표 청신호

“경기불황에도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액은 오히려 늘고 있다.”

임영식(59) 구세군 대한본영 기획국장의 말이다.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18일까지 구세군 모금액수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1억 9,400여만원 더 늘었다. 15% 이상 증가한 것이다.

올해 모금 목표 액수는 작년 모금액수인 31억원을 뛰어넘는 32억원이다. 구세군 모금액은 매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임영식 참령은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은 경기와 반대되는 현상을 흔히 보인다”며 “어려운 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국민의 아름다운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18일 오후 서울 정동 구세군 중앙회관에서 만난 임영식 국장은 매우 분주한 모습이었다. 구세군이 전국각지에 설치한 자선냄비 모금 활동이 종료 일주일을 남긴 시점이다.

원래 회의 때문에 인터뷰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던 그는 인터뷰가 시작되기 직전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는 포마드로 반듯하게 빗어 넘기고 있었고, 정복은 정갈해 보였다. 인터뷰 중간중간 농담을 섞어가며 밝게 웃는 모습에 가식이 없다.

■ "나는 내일 또 구걸하면 된다"던 기부자 가장 기억에 남아

“나는 내일 또 구걸하면 되지만, 구걸할 힘도 없는 사람도 있을 것 아니냐.”

지난 1998년 대전 목천교 부근에서 자신이 하루종일 구걸한 돈을 임 국장이 운영하는 자선냄비에 넣고 간 사람이 했다는 말이다. 임 국장은 “대부분의 자선냄비 기부자들은 표 안나게 슬쩍 봉투를 넣고 간다”며 “나중에 은행에서 봉투를 열어보면 수표도 나오고 하지만, 1~2천원을 기부하더라도 봉투에 정성스럽게 넣어 기부하는 많은 기부자들의 모습이 뜻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매년 1천만원 이상의 고액기부자가 수명 씩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올해의 고액 기부자는 1천만원을 봉투에 넣어 기부한 한 사람 뿐이다.

‘기부자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세상적(?)’으로 물었다. 임 국장은 “대가 없이 주고 나서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 봤냐”며 “남에게 뭔가를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은 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와 만족을 느낄 수 있고, 남이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직자이니만큼 종교적 해석을 달라 하자 그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성경구절 얘기를 꺼냈다. 임 국장은 “행복을 달성하는 데 있어 인간의 노력은 한계가 있다”며 “선한 일을 했을 때 받은 사람이 감사한 만큼 자신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바랄 수 있다”고 답했다.

■ 세자녀 모두 구세군 사관학교에

그에게 기부란 어떤 의미일까. 임 국장은 “거져 주는 것”, “조건 없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가를 바라거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돕는 것이 기부의 참 의미”이며 “주는 자체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란 설명이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임 국장이 말한 취지에 잘 들어맞는 기부 방법의 하나다. 보통 길거리의 자선냄비에 봉투로 넣는 방식인 구세군 모금은 무기명으로 신분을 완전히 노출시키지 않고 기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는 길이다.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임 국장이지만, 사실 그가 성직을 택하까지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전북 정읍의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 슬하의 7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정직’과 ‘성실’을 강조하는 학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임 국장은 부모의 손을 따라 구세군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으며 중학교 때 ‘성령 체험’을 한 이후 구세군의 성직자로 사는 것이 자신이 배워왔고 뜻하는, 바르고 좋은 삶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여느 부모와 같이 세상의 일로 성공하기를 바랐던 그의 부모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그가 구세군 사관학교 입학 자격을 갖추려고 고교 졸업 후 공군 입대를 자원하는 등 신앙생활에 전력하는 모습을 보고 뜻을 굽혔다.

임 국장은 제대 후 바로 구세군 특무(타 개신교의 전도사에 해당)생활을 1년여 동안 하면서 결혼했고 75년 구세군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사관(타 개신교의 목사에 해당)으로 20여년간 설교를 하고, 사회복지 시설 총무로 2년여를 재직한 뒤 구세군 행정관으로 10여년을 살았다. 33년째 성직생활이다. 임 국장의 세 자녀 모두 한국과 미국의 구세군 사관학교에 들어가 아버지의 길을 따르고 있다.

■ "변신한 빨간 냄비 선보일 터"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이면 올해의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은 끝난다. 하지만, 구세군의 자선활동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구세군은 12월에 모은 자금으로 연중 고아원, 양로원, 여성, 노숙자 쉼터 등을 운영하며 봉사활동을 계속한다.

최근에는 에이즈 예방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고 교도소, 군대, 경찰서 같은 곳에서 음악회 등 위문공연 한다. 심장병에 걸린 500여명의 가난한 환자들의 수술비를 대기도 했다. 화재를 입은 사람들을 후원하는 것 역시 구세군의 사회사업 가운데 하나다.

임 국장은 이런 구세군 사업의 기획을 총괄한다. 임 국장은 “구세군은 무기명으로 기부한 많은 분들의 순수한 뜻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하는 사회 구제와 봉사활동을 계속할 것”이라며 “1년 365일, 시민과 이웃을 적극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사랑의 방법을 계속 찾을 것”이라고 말한다.

구세군은 버스카드를 대면 기부가 이뤄지는 모금방식을 개발했으며 올해부터는 29군데의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자선냄비를 설치했다. 연중 은행 지로 용지,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한 모금을 계속한다.

“기부는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특별한 방법”이라며 웃는 임 국장 주위에 있는 빨간 냄비의 색감이 뜨겁다.

◇ 우리가 잘 몰랐던 구세군

▦ 구세군은 군대(?)

‘군(軍)’이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구세군은 통념상의 군대와는 다르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에서 월리엄 부스가 창시한 개신교의 한 종파다. 구세군은 ‘하나님의 군대’와 같이 일원화된 조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 구제사업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라고 이름 붙였다. 모든 구세군 세례교인은 교리상 ‘병사’다. ‘부교’는 여타 기독교 종파의 집사에 해당한다. ‘특무’는 타 기독교 교단의 전도사, ‘정교’는 장로, ‘사관’은 목사에 해당한다.

▦ 구세군은 자원봉사만(?)

구세군은 사회봉사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타 개신교 종파들처럼 자신들의 교회를 운영하고 예배를 드린다. 구세군 교회는 전세계 117개국 1만 4,000여개에 이른다. 한국 구세군 교회는 전국 634개에 이르며 신도수 12만여명, 성직자는 800여명이 있다.

구세군은 1908년 한국에 들어왔고 자선냄비 사업은 1928년 일제 때 시작했다. 한국 전쟁 때에 종을 울리며 전후의 고아들과 어려운 이웃을 도와 자선사업의 대명사가 됐다.

▦ 구세군은 모두 신도(?)

구세군 종을 울리는 사람들 중에는 신도 외에 일반인 자원봉사자도 있다. 스님이 자원봉사를 신청해 종을 울리기도 했다. 대학생이 봉사 실습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세군 모금활동을 하는 사람의 90%이상은 구세군 평신도나 성직자들이다. 한 지역의 자선냄비는 보통 2~3팀이 조를 짜 교대로 운영한다. 구세군 교인들은 1년에 최소 24일의 자원봉사 활동을 한다.

교인들은 모두 무보수로 일하며, 특별 모금 행사가 때는 예외적으로 자원봉사자에게 교통비를 지급하기도 한다. 한국 구세군은 올해 3만여명을 동원해 전국 227여개 지역에 모금통을 설치했다.

▦ 자금 집행은 어떻게(?)

모금액은 경비를 제외한 전액을 사회구제 사업에 쓴다. 한국 구세군은 모금 경비인 10~15% 제외한 전액을 구제사업에 쓰고 있으며, 교회 운영비로 쓰지는 않는다. 한국 구세군은 고아원, 양로원, 장애인 시설 등 전문복지 시설과 교회 병설 복지시설 등을 운영하며 총 숫자는 199개에 달한다.

한국 구세군은 정부의 예산 감사를 거쳐 집행 승인을 받으며 매년 일간지에 예, 결산 내역을 공개한다. 자선냄비 모금 중에 포교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구세군 자선냄비 운영기간은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까지다. 작년에는 예외적으로 크리스마스 당일인 25일까지 자선냄비를 운영했으며, 정부가 승인한 자선냄비 운영기간은 12월 한달간이다.

▦ 구세군의 유래

구세군 자선냄비는 1891년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그 첫 종소리를 울렸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샌프란시스코 록키 연안에서 배가 좌초해 천여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들을 먹여살릴 궁리를 하던 당시 구세군 사관, 조셉 맥피 정위는 오클랜드 부두로 나가 주방에서 사용하던 큰 쇠솥에 다리를 놓고 거리에 내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란 글귀를 써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탄절에 불우한 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을 마련하게 됐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