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우 위한 도서녹음 봉사 5년째… 오디오북 제작 새 도전

“목소리와 마음 하나로 저희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려고 해요. 성우들이 무슨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목소리로 기쁨을 드리고 마음을 전하는 거죠. 다른 분들은 남다른 끼와 톡톡 튀는 개성으로 어려운 분들을 많이 도와주시는데 저희는 아무래도 뒤에서 일을 하다 보니 나서서 장기를 보여드리는 게 굉장히 어색하더라고요. 도서 녹음 봉사야말로 저희 성우들의 마음을 모으고 또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벌써 5년이 훌쩍 지났네요.”

목소리 변주를 통해 남녀노소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리의 달인들이 모인 KBS 한국방송 성우극회는 ‘목소리’라는 그들만의 특별한 재능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최근 시각 장애우들을 위해 22종, 140여 권의 도서를 음성으로 녹음하고 전국의 복지관과 학교, 장애우 시설 등에 무료 배포했다.

성우극회 안경진 회장은 “2004년에 맺은 한국시각장애인협회와의 자매 결연을 인연으로 시각장애우를 위한 녹음 도서 봉사를 시작한 지도 벌써 5년째 접어들었다”며 “시각장애우를 위한 화면해설방송까지 더하면 3,000여 권의 도서가 성우극회 회원들의 음성으로 녹음됐다”고 말했다.

성우극회 소속 성우들 중에는 훨씬 전부터 남모르게 녹음 봉사뿐만 아니라 신문을 읽어주거나 좋은 문학 작품을 낭독하는 봉사를 해 온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어떤 청취자들보다도 귀 기울여 자신들의 음성을 들어주고 또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각 장애우들이 있어서 오히려 더 행복하다고 전한다.

“한국방송 성우극회가 1948년 특별 기수 이혜경, 이춘사 선생님을 시작으로 2008년까지 이어졌으니 회원 수가 엄청나죠. 해마다 봉사에 참여하는 회원들도 다른데 올해 12월 녹음 봉사에 참여한 인원은 80여 명 정도예요. 봉사를 하다 생기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 때문에도 중독처럼 그만두지 못하는 회원들이 많아요. 이번 봉사 때 한 후배는 <식탁 밑의 경제학>이라는 다소 딱딱한 내용의 책을 녹음 하는데 계속 조는 바람에 책 한 권을 나흘에 걸쳐 녹음을 했대요. 성우들이 무언가를 읽어 내려갈 때는 굉장히 기계적이 돼서 장시간 녹음할 경우는 종종 졸기도 하거든요.”

녹음 봉사를 하며 즐거운 경험담도 있었다. 안 회장은 “확실히 시각 장애우들은 청각이 예민하게 발달돼 있어서 성우들에게 관심이 많고 또 대다수가 우리 팬들이다”라면서 “일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녹음에 참여를 못한 적이 있었는데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걱정이 됐는지 한 장애우가 편지로 안부를 물어오기도 했다”고 성우들과 시각 장애우들 사이의 돈독한 애정을 과시했다. 안 회장은 또 “특별히 이번 녹음 도서에는 외화 시리즈 ‘X-파일’의 스컬리 요원으로 유명한 성우 서혜정의 목소리도 담겨 있어 흥미를 더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에 진행한 도서 녹음 봉사는 성우들의 따뜻한 마음과 더불어 기존의 단순한 녹음 도서와는 달리 전문성을 띤 ‘오디오 북’을 제작해 장애우들에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최근 들어 방송문화의 다변화로 내레이션, 더빙 등과 같이 성우들의 고유한 영역으로 간주되던 분야의 경계마저 허물어지면서 성우들이 설 자리를 위협 받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성우들의 오디오 북 제작 시도는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그들의 새로운 영역 구축과 또 다른 가능성에의 도전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아무래도 방송은 광고효과나 시청률, 청취율 문제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성우들의 역할을 인기 있는 연예인이나 가수, 배우들로 대신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거죠. 봉사활동을 하면서 오디오 북이라는 매체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려하고 현란한 영상이 넘쳐 나는 요즘 또 다른 매체에 대한 욕구나 예전 매체에 대한 그리움이 늘고 있음을 느껴요. 70~80년대를 풍미했던 오디오, 라디오 분야가 다시금 조명을 받을 날이 머지 않은 거죠. 오디오 북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단순한 녹음도서의 개념이 아니라 영상과 음악 등의 다양한 효과들을 첨가한다면 새로운 매체로의 발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녹음 봉사에서 만나는 시각 장애우들을 중심으로 오디오 북을 배포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장애우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성우들이 녹음한 오디오 북을 가지고 다니며 즐길 수 있도록 목소리의 열정을 더하겠다는 것이 안경진 회장의 바람이다.

“다른 건 필요가 없죠. 목소리와 마이크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사랑을 전할 수 있으니까요. 저희 성우들의 목소리로 행복을 느끼신다는 분들인데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계속해서 더 많은 분들의 행복과 사랑을 위한 희망의 목소리 전령사가 되고 싶습니다.”



윤선희 기자 leonelga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