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봉황도' 자수로는 처음으로 유니세프 크리스마스 카드에 선정맥끊긴 궁중자수 복원과 현대적 재창조에도 힘쓸

10여년 전쯤부터 유럽식 생활수예인 십자수가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어쩐지 한국의 자수는 낯설다. 이따금씩 사극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수놓는 양가집 규수’도, 매일 덮고 자던 자수이불도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궁중자수’라는 단어도 새삼 생경해질 즈음, 한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가 날아들었다. 유니세프에서 발행한 것으로 금빛 봉황 두 마리가 단정하면서도 화려하게 수놓아진 궁중자수가 전면에 프린트 되어 있었다.

<연꽃 봉황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작품은 궁중자수 작가 이병숙 씨의 작품이다.

그동안 샤갈, 피카소 등 전 세계 내로라 하는 3천 여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크리스마스 카드에 실어온 유니세프는 올해 유일한 한국인의 작품으로 이 작가의 궁중자수를 선정했다. 대중적이지 않다고 여겨졌던 궁중자수 카드는 의외로 인기가 좋아 재인쇄를 했을 정도란다.

24살, 인간문화재인 한상수 선생의 작품을 보고 궁중자수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병숙 작가. 그녀는 잊혀져가는 궁중자수의 파수꾼 같은 존재로 35년간 외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고 작업하는 탓에 그동안 해온 작업량이나 작품의 가치만큼 자신은 빛을 보지 못했다.

이순(耳順)이 머지 않은 나이, 창덕궁 부근에 자리한 한옥을 자택겸 작업실 삼아 한 땀 한 땀 예술을 수놓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유니세프 크리스마스카드로 채택된 것이 ‘인간문화재가 된 것마냥 기쁘다’는 그녀의 한옥집 한쪽 벽면에는 가로, 세로 38센티미터의 <연꽃 봉황도>의 진품이 액자에 걸려 있다. 화평(和平)을 뜻하는 연꽃과 어질고 현명한 성인과 함께 세상에 나타난다는 전설의 새, 봉황이 그려진 <연꽃 봉황도>.

생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이 작품은 사실 인생의 가장 깊은 슬픔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혼의 아픔과 교수부임건 마저 무산되었던 20여년 전, 부여에서 홀로 10개월을 살면서 눈물 속에서 한 땀 한 땀 떠올린 작품이다. “예술가들에겐 인생에서 평생 가지고 갈 작품이 하나쯤 있다는 얘길 하는데, 제겐 아픔도, 기쁨도 모두 알고 있는 이 작품인거 같아요.”

35년 세월을 지나온 궁중자수 작가의 작업실엔 생각보다 작품이 많지 않았다. <연꽃 봉황도>외에 두 작품, 그리고 중앙에 디자인 도안과 작품이 찍힌 사진이 표구된 것이 전부였다.

판매되거나 어딘가에서 전시 중인 탓이다. 도리없이 사진으로 작품의 규모와 전체적인 분위기를 짐작해볼 뿐이다. 벽면 중앙에 있던 사진 속 이병숙 작가의 작품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각각 해외 고관과 가진 만찬자리의 배경이 되고 있다. 1991년 청와대 신관신축 당시에 제작했던 <진연도 병풍>과 <농악도>다.

<진연도 병풍>은 개관시 ‘이번에 병풍 하나는 물건이다’라는 찬사를 들었던 가로 270센티미터, 세로 720센티미터 규모의 대형작으로 당시 제작된 작품 중에서는 유일하게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진연도 병풍>은 의궤도 중 하나에요.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하려고 전말, 경과, 경비 등을 기록한 책을 의궤라고 하는데, 그 행사의 그림을 의궤도라고 하지요. 이 ‘진연도’는 헌종의 왕후인 명헌태후의 70세 생일 기념 잔치 모습(1901년)을 그린 겁니다.”

당초 청와대에서 시안을 넘겨주었지만 수를 놓을 수 있는 문양이 아니어서 그녀가 완전히 새로 그려야 했다. 연회가 열리니 남녀가 어울리고 음악, 춤, 악기, 음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당시의 궁중생활상, 관제, 음악, 음식, 복식, 춤사위를 담아냈다.

농악의 춤사위가 역동적으로 표현된 <농악도>는 ‘유화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로 풍성한 색감을 가지고 있다. 두 작품 제작 전, 그녀는 천연염색실을 사기 위해 교토를 왕복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일본에만 천연염색의 비단실이 있어요. 우리나라 실에는 목면이 섞여있고 중국은 털실이 섞여있죠. 직접 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애석하지만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임진왜란때 너희가 가져간 것 다시 가지러 간다’는 생각으로 위로를 했지요.” 그때 쓰고 남은 실은 고스란히 그녀의 방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잠시 꺼내본 실의 빛깔은 천연염색인 탓에 부분적으로 변색이 되기도 했지만 인공염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색을 가지고 있었다.

실의 선택부터가 까다로운건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그녀의 성품 탓이기도 한데, 이런 성향이 결국 궁중자수로 그녀를 이끌었다고도 볼 수 있다.

“궁중자수가 가진 질서와 견고함, 그 완벽함 속에서 나오는 가치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궁중자수의 기법은 많지 않지만 엄격하게 지켜지죠. 직선으로 놓는 자리수, 매듭을 한번 맺어 씨앗처럼 탄탄하다 하여 씨앗수라고도 하는 매듭수, 땀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도록 놓는 이음수, 부채살 모양으로 겹쳐가며 하는 솔잎수, 금종이로 실을 감싼 금사가 다치지 않게 가는 실로 징금하는 징금수 등 다섯 가지 기법이 있습니다.”

기법과 함께 도화서 화원들이 자연을 소재로 그려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문양은 생명력과 조화로움을 전한다.

중국자수와도 닮은 듯하지만 또 다른 멋이 있다는 것이 이병숙 작가의 말이다.

“중국자수는 사실적인 문양과 색감에 치밀한 완벽성을 바탕으로 한 화려함이 있어요. 반면에 우리의 자수는 여유로움과 풍성함이 있고 품위와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지요. 물론 궁중자수는 중국과의 궁중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영향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점진적으로 우리 민족의 성정으로 표현되고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전통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현대적인 표현에도 이 작가는 관심이 많다. 일제 강점기로 맥이 끊긴 궁중자수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유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그를 답습하고 재현하는 것을 넘어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수적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기도 하다.

그런 작업의 일환을 그녀의 작업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용 두 마리가 대결할 듯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작품이 그것이다. 천 위에 가느다란 실로만 짜여진 자수는 납작하기 마련인데, 그 작품은 용의 몸체가 도톰하게 불러 올랐다. 입체적으로 살아있어 역동성이 더욱 도드라지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저 작품은 좀 다른 느낌인데, 어떤 기법을 사용하신건가요?”(기자) “조각보 기법을 자수에 들여온 거에요. 천을 이용해서 주요 부위를 덮고 자수로 그 위를 덮는 방식이죠. 조각보의 입체감이 살아나요. 아무래도 한 땀의 공이 덜 들어가서 접하기 쉽기도 하고 보기에도 시원스러워보여 젊은 분들이 좋아합니다.” 이 작가는 이 기법을 의장특허(‘디자인권’이라고도 한다) 내고 가구에도 적용해 최근 약 1년여간 작업해왔다.

“한 업체에 의뢰를 받고 지난해 4월부터 침상, 반다지, 서랍장, 화장대 등에 자수를 넣었어요.”

그에 관한 정식 오픈행사를 할 예정이라지만 가구와 자수의 결합이 궁금해 부평으로 자리를 옮겨 이 작가의 가구 작업을 둘러봤다. 부평 공단 부근 한 가구업체에 잠시 머물고 있는 가구 위에는 천연염색한 천 위에 고운 비단실 물결이 일렁였다.

조각보 기법을 활용해 부분적인 입체감이 살아나 세련미도 흐렀다. 한국자수박물관의 허동화 관장은 자수가 살아날 길은 산업체와의 연계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하는데, 이런 작업 속에서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자수에 다시금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게 아닐까 싶었다.

작업하는 동안에는 열 두 번 넘게 손을 씻고 손에 흙이 묻을가봐 물건이 떨어져도 줍지 못할 정도의 결벽증이 생긴다는 이병숙 작가는 35년 함께 한 자수인생의 본격적인 시작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한다. 자수로 인한 인생역정이 소설못지 않지만 ‘자수에 일생을 매료당해도 억울하지 않다’니 자수에 대한 이 작가의 사랑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 궁중자수 작가 이병숙은…

1951년생. 1974년부터 궁중자수를 시작해 ‘한국전승공예대전’에서 장려상(1980년, 1982년, 1983년) 수상. 1989년 ‘한국전승공예대전’에서 <연꽃 자수장>으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았다. 1991년 청와대 본관 신축 당시, 만찬회장에 <진연도 병풍>과 대기실에 <농악도>를 제작해 대통령 감사패 받았다.

연세대 교육대학원에서 역사교육 연구과정 수료(1995), 동 대학원 윤리교육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1999)했으며 연세대와 한양대 사회교육원에서 궁중자수공예 과정에 출강한 바 있다. 2008년 UN아동기금 유니세프의 크리스마스 카드로 <연꽃 봉황도>가 채택되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