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가-내일을 꿈꾸는 비주류들 (21) 공연 연출가 김동연

문화를 향유하는 안목이 다양해진 요즘 주류문화의 식상함에 반발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그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주류문화보다 비주류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는 추세다. 문화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기엔 이미 둘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하여, 비주류는 이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주류는 아웃사이더나 이단아가 아니라 '비전'이 있고, 예술세계에 '비주얼'이 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미래가 밝은 문화인들이다. 뚜렷한 주관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나가는 '내일을 꿈꾸는 비(飛)주류'. 그들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미국서 인기 끈 흥행작 <마이 퍼스트 타임> 각색·연출로 성공작 만들어
서울변방연극제서 <환상동화>로 데뷔해 연극, 뮤지컬 오가며 실력 쌓아
극단'시인과 무사'직접 꾸리며 프리랜서 연출가로도 인기 상종가
치밀한 대본, 배우·스태프와 끈끈한 팀워크로 관객 공감 이끌어내


당신은 몇 살에 '첫경험'을 했는가? 장소는? 상대 이름은? 아직까지 연락하고 지내는가? 초면에,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연극 <마이 퍼스트 타임>은 너무 은밀해서 꽁꽁 감춰두었던 첫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풀어놓게 하는 '묘한' 공연이다.

시작 전부터 객석에 울려 퍼지는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이나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섹시 백' 같은 팝송은 연극이 어떤 내용일 것이란 걸 미리 짐작하게 만든다.

'섹시한' 음악을 듣다 보면 어느덧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다. 관객은 첫경험에 대한 11개의 질문이 적힌 파란색 설문지를 받는다. 솔직하거나 무덤덤한 혹은 톡톡 튀는 관객들의 다양한 경험담은 연극이 무르익을 무렵 배우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관객 자신의 이야기가 언제 공개될지 몰라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도 이 연극이 지닌 짜릿함 중 하나다.

"첫경험 장소는?"이란 질문에 관객이 적은 답변은 '청량리 588', '모텔 **', '놀이터', '내 방' 등 의외로 제각각이고 다양하다. "첫경험 상대는?"이란 질문에도 '아는 누나', '과학 선생님', '원빈', '신랑', '이름 모름' 등 다소 엉뚱한 대답이 쏟아져 나와 시종일관 배꼽을 잡게 만든다. '내 이야기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거 부끄러워!' 이런 생각을 한다면 걱정 마시라! 관객은 익명의 자유를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까.

특별한 무대 장치 없이 사다리 의자에 앉은 배우 4명은 자신들의 경험인 듯, 또한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비밀스런 이야기인 듯, 관객에게 은밀하게 첫경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기한 건, 두 시간 내내 성과 섹스 이야기를 해도 야하거나 불쾌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우들의 사적인 이야기도 내용 중에 섞여 있기 때문에 유추하는 재미는 덤이다. 배우들은 첫경험 상대 이름까지 공개하는 대범함을 보인다. 배우와 관객이 서로의 경험담을 털어놓았기에 소극장은 이미 끈끈한 유대관계로 이뤄진 셈이다. '첫경험'이란 단어가 지닌 떨리고, 설레고, 사랑스럽고, 한편으론 가슴 아프고 허탈한 이야기는 결국 관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죽을 병에 걸린 동생을 위해 순결을 내어준 친누나의 이야기나 성불구인 애인과의 첫경험 이야기는 가슴을 짠하게 만든다. 외국인, 동성과의 첫경험 이야기에서는 관객의 눈이 반짝 빛난다. 또한 칠순이 넘은 노인이나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첫경험 이야기는 <마이 퍼스트 타임>이 성과 섹스를 소재로 하지만 결국 우리네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어, 훈훈하고 따뜻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왼쪽)연극 '마이 퍼스트 타임'
(오른쪽)연극 '햄릿-슬픈 광대의 이야기'



"당신의 첫경험 상대는 누군가요?"라며 관객에게 '세게' 말을 거는 <마이 퍼스트 타임>을 각색, 연출한 김동연(35) 씨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되는 섹스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음란하지 않게 건강하고 솔직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원작 대본을 읽고 난 후 어느 정도 풀렸다고. 국내의 정서로는 눈이 휘둥그레질 장면들을 어떻게 한국식으로 풀어낼지 대략 '감'을 잡은 셈이다. 그 비결에 대해 김 씨는 "첫경험은 누구나 다 겪는 통과의례잖아요.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면 관객이 호기심을 갖고 신선하게 바라볼 거란 확신이 들었지요."

'최소한의 소품과 심플한 무대 연출. 좌담회 분위기로 갈 것. 배우들은 모노 연극(독백극)을 하듯, 설문조사와 자막으로 관객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끌어낼 것. 국내 최초의 스탠딩 코미디류의 연극을 만들 것.' 당시 그가 떠올린 영감들이었다.

하지만 김동연 씨가 <마이 퍼스트 타임>의 각색과 연출을 의뢰받았을 때 부담감을 가졌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연극 <마이 퍼스트 타임>은 2007년 7월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을 한 후 지금까지 매진을 기록하고 있는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흥행성이나 작품성에서 두루 인정을 받은 작품이라 남은 건 오로지 연출과 각색을 맡은 자신의 몫이기도 했다.

"이 연극의 원작자이자 연출가는 국내에서 뮤지컬 <알타보이즈>로 소개된 켄다벤포트(이하 켄)란 젊은 연출가죠. 오프브로드웨이에서 2년 동안 매진이란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의 작품을 제가 맡았는데 그에 대한 부담이 컸어요. 뉴욕에서 직접 연극을 보고 켄을 만났어요. 그와 많은 대화를 했죠. <마이 퍼스트 타임>에서 당신은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냐고 제가 물었어요."

켄의 대답은 바로 '리얼'이었다. 배우들이 실제 자신의 경험담을 관객에게 이야기하듯 '리얼'하게 해줄 것을 그는 강조했던 셈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설득력 있고 맛깔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할 줄 아는 배우 캐스팅이 관건이었다. 퍼포먼스도 없었고, 배우의 대사가 전부였다. 돌발적인 상황극을 즐길 줄 아는 배우라면 합격이었다. 연기를 너무 잘해도 탈이었다. 너무 극적으로 보일지 몰라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4명의 캐릭터를 두 팀으로 이끌어가자고 제안했죠. 저의 선택을 처음엔 모두 아이러니하게 생각했죠. 배우가 많으면 연출이 고생할 게 뻔하거든요. 저는 20대 중후반, 30대 초반의 배우들이 자기 경험을 토대로 성에 대한 담론을 나누게 했죠. 그들의 이야기를 대본에 반영할 생각이었거든요.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배우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관객에게 털어놓는 셈이 되죠. 이만한 리얼이 또 어디 있겠어요."

한국에서 첫경험 평균 나이는 19.8세였다. 생각보다 빠른 나이여서 그도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연극을 보러 오는 관객의 첫경험 나이는 22세가 조금 넘었다. 너무 앞서가도 안됐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청춘남녀의 보편적인 첫경험 이야기로 극의 내용을 수정하기까지 그는 인터넷 지식인 검색을 통해 충분한 자료조사를 해야만 했고, 지인이나 가족,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세대의 첫경험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얻어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첫경험'이란 화두 때문에 배우와 연출가, 제작진이 단체 MT를 가서 서로의 첫경험을 진실게임 하듯 허심탄회하게 풀어낸 것이다.

"술 한잔 하지 않고선 남자들끼리도 잘 하지 않는 이야기가 첫경험에 대한 이야기죠. 조금 부풀려 이야기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요. 그런데, 배우나 제작진까지 한마음으로 뭉쳐 실제 연극에서 이야기하듯 첫경험을 논했죠(웃음). 한번은 연습실에 모여, 그때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첫경험 이야기만 하다가 집에 간 적도 있고요.(웃음)"

<마이 퍼스트 타임>이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서서히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적인 비밀'을 공개한 배우, 스태프 간의 최고의 팀워크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엔 세련된 연출 감각을 지닌 김동연 씨의 역량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 씨에게 <마이 퍼스트 타임>이란 연극은 그의 연출 인생을 살펴보면 거의 모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나와 <난타> 연출부로 처음 공연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서울변방연극제에서 <환상동화>란 작품으로 데뷔했다.

첫 시작부터 그는 눈에 띄는 연출가였다. '변방'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자유로운 창작정신과 실험정신'이란 화두의 작품이 주로 올려지는 연극제에서 그의 데뷔작 <환상동화>는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란 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변방', '비주류'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각종 문화지원금과 쇼케이스 공연 등에서 탈락하며 고배의 잔을 마셔야만 했다. <환상동화>는 오랜 시간 수정, 보완의 과정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의 기금을 받아 드디어 대학로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3년 만이었다.

그 후 김 씨는 연극 <70분간의 연애>, <닥터 이라부>, <햄릿-슬픈 광대의 이야기>, 뮤지컬 <김종욱 찾기>, <노트르담드파리> 등 다양한 작품의 연출을 맡으며 함께 성장해 왔다.

성적인 담론을 무대화한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성경 문구들을 인용해 만들었던 연극 <환상동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다른 장르에 도전했다는 것을 금세 짐작할 것이다. 극과 극을 오가는 작품에서도 그는 빛을 발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조율하는 연출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마이 퍼스트 타임>이 무대에 올려지는 동안 그는 자신이 직접 이끄는 극단 '시인과 무사'의 작품 <햄릿-슬픈 광대의 이야기>(1/27~31)도 성공적으로 마치는 저력을 보였다. 자신이 직접 쓰고, 연출한 순수 창작극이다.

"햄릿은 '대학로 순수예술작품 제작지원사업' 선정작이기도 하죠. 두 작품을 동시에 무대에 올리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시간을 보냈죠.(웃음) 그래도 창작극에 대한 욕심이 있어선지 몸은 고달팠지만, 공연이 잘 끝나고 나니 마음만은 즐겁네요."

<마이 퍼스트 타임>은 3월말까지 공연할 계획이다. 국내 관객들의 반응이 무척 긍정적인 편이라 시즌2도 기획하고 있다. 시즌2는 미국처럼 <마이 퍼스트 타임>이란 사이트를 만들어 불특정 다수의 한국 관객의 첫경험 사례를 대본에 반영할 계획이다.

그는 2월13일 대구 계명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노트르담드파리> 연출로도 활약해야 한다. 또 3월부터는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김종욱 찾기>의 '버전 업' 작업에 들어갈 계획이다.

홀로 극단 '시인과 무사'를 이끌어 나가며 프리랜서 연출가로 살아가는 김동연 씨에게 아마도 기축년은 소처럼 열심히 일해야 하는 운명의 해가 아닐까? 2006년에 만든 극단 이름을 '시인과 무사'로 정한 건 어쩌면 그가 살고 있는 인생을 반영하는 듯했다. 낭만적인 예술가 '시인'의 모습과 자신이 선 인생이란 무대에서 기필코 살아 남겠다는 '무사'의 의지가 김동연 씨에게 빛과 그림자처럼 공존하기 때문이다.

공연계에서 러브콜을 받는 인기 연출가이자 틈틈이 그리고 치열하게 창작품을 쏟아내는 젊은 연출가, 김동연 씨가 꿈꾸는 공연계의 모습은 어떨까?

"공연문화가 일반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해졌으면 좋겠어요. 아버지와 딸이,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이 공연장에 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풍토가 조성되길 바래요. 사회 전반적인 문화 수준의 향상을 기대하는 거죠. 그렇게 되려면 경제도 좋아져야 하고 사람들에게 여유도 생겨야 하고 문화 교육도 이뤄져야 하고…. 꿈꾸는 건 자유인데 가는 길은 험난하네요."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