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째 듣는 책 녹음… 마음과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하상장애인복지관 낭독 봉사자 정재용씨

"특별한 목소리나 화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봉사하겠다는 마음과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올해로 11년째 시각장애인에게 듣는 책 녹음을 해주는 낭독봉사를 하고 있는 정재용(56.여) 씨의 말이다. 12일 서울 개포동 하상장애인복지관에서 정 씨를 만났다.

정말 그럴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다. 하상장애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낭복봉사자 지원자격은 특별한 게 없다. 하지만, 매년 130여명이 지원하는 봉사자 중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10여명 뿐이다.

"문제는 본인의 의지다"라는 게 정 씨의 말이다. 봉사자는 일주일에 한번 시간을 정해 3~4시간씩 장애인들이 관심 있어하는 분야의 책을 스튜디오에서 녹음한다. 하상장애인복지관은 이를 시각장애인들에게 무료로 빌려준다.

서울 개포동에 있는 하상장애인복지관의 낭독봉사자는 대부분 강남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 씨와 같이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들이다. 말 그대로 '이대 나온 여자'인 정 씨 역시 통념을 깨는 사례다.

▦"나의 기쁨 50, 그의 기쁨 50"


"전체 봉사를 100으로 친다면 50은 시각장애인에게 주지만 50은 나에게 돌아온다." 정 씨가 10년 넘게 자기 시간을 쪼개 남을 위해 쓸 수 있었던 비결이다.

정 씨는 낭독봉사자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안대로 눈을 가리고 지하도를 걷는 등의 체험을 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그는 "시각장애 체험을 한 이후 전철 같은 곳에서 시각장애인들을 마주쳤을 때 다르게 보였다"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가서고 싶었다"고 말한다.

시각장애인에게 책 읽어주는 사람은 일종의 연예인이고 탤런트다. 팬레터를 보내 응원하는 이들이 있다. 읽어주는 책 내용을 즐겨 듣던 한 시각장애인이 지방에서 낭독봉사자를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그는 낭독자의 얼굴이 궁금하다며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기도 했다. 정 씨는 "시각장애인은 보통 늘 목소리만 들어왔던 낭독자들을 직접 만나면 신기해하기도 한다"면서도 "일반인과 똑같이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안부를 묻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시각장애인은 거의 모든 면에서 일반인들과 다를 게 없다"는 게 정 씨의 이해다.

▦'이대녀'의 재능기부


정 씨는 원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출신으로 교내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해 읽기에 일가견이 있었다. 언론사와 대기업에 다니는 아들 둘을 모두 출가시킨 후 자영업을 하는 남편과 등산도 하며 소일을 하던 그는 1997년 지인의 소개로 하상장애인복지관에서 낭독봉사를 시작했다. "나에게 원래 있는 재능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는 게 정 씨의 말이다.

마냥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녹음실 기계를 다루는 데 익숙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복지관에 나가는 일이 '스트레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의료서적이나 법전을 비롯해 전문용어가 들어간 책을 녹음할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소설책에 있는 아름다운 그림이나 사진을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곤란함도 있다.

하지만 그는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이런 봉사를 하기가 힘들다"며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말한다.

▦"단 한권이라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 씨는 "시각장애인에게 단 한권이라도 충분한 희망과 상상의 나래를 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다른 세계를 접하고 스튜디오에서 홀로 책을 읽으며 자기성찰의 시간을 보내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게 정 씨의 말이다.

정 씨는 원래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으나 낭독봉사를 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낭독봉사 동료들과 나누는 친교가 주는 힘 역시 봉사의 원동력이다.

"광복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1995년 8월 15일. 그날 산조(김좌진 장군의 딸)도 해외 독립유공자로 초청 받아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산조의 기쁨은 곧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바뀌고 말았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정 씨는 다시 스튜디오로 들어가 낭랑한 목소리로 시각장애인에게 들려줄 책, <만주를 가다>를 읽기 시작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