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대석] '황진이' 이후 10년만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연출 창작 의지 '활활'즉흥적 연출이 공연의 매력 딱 내 스타일… 뮤지컬·영화 준비도

1970~80년대 한국 영화에 뚜렷한 궤적을 새긴 이장호(64) 감독. 당시 영화계 블루 칩으로 흥행작을 쏟아냈던 그는 동시에 시대를 초월하는 수작을 남겨왔다. 한동안 후학 양성으로 메가폰 잡는 일이 뜸했던 그가 내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다시금 창작의지를 다지고 있다.

오페라 '내 잔이 넘치나이다'(3월 24일-27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극장)가 그의 예술인생 제2막의 개막을 알린다. 어느새 백발이 성성해진, 그러나 여전히 건장한 풍채를 가진 이장호 감독을 24일 볕 좋은 오후에 만났다.

"정년을 앞두고 새로운 희망에 가슴이 벅찹니다. 나이도 실감이 안 나고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할 때보다 더 떨리네요." 공연 연출이란 낯설지만 흥미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그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최근 연극을 연출했던 한지승 감독은 한번 기록을 남기면 불변한 영화와 달리 연습과 때마다 바뀌는 공연에 당황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장호 감독은 바로 이런 점에서 공연의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유기적인 생명력이 좋아요. 영화를 할 때도 난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아쉬울 때가 많았는데, 공연은 제 스타일과 잘 맞는 것 같아요." 이 때문에 공연 연출자를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그에게 오페라 연출이 처음은 아니다. 10여 년 전, 창작오페라 '황진이'를 한국, 일본, 중국, LA에서 일 년에 한 번 꼴로 무대에 올렸던 그다. 오페라는 서양에서 받아들인 장르지만 한국의 정서를 담아낸 창작오페라의 연출자를 논의하면서 제작진이 이장호 감독을 거론한 이유였다.

창작 오페라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피폐한 전쟁 통을 사랑으로 살다간 휴머니스트의 이야기다. 전도사 맹의순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오인받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끌려갔지만 그곳에서 병든 포로들을 돌보며 생을 마쳤다.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동명 소설이 원작. 80년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일 년 앞두고 재조명되는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인 것이다.

"전쟁이 없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감사를 하고 사는가를 묻고 싶었어요. 사람이 죽고 감금당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의 감사의 가치는 지금 이상이겠지요." 후에 맹의순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 수용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끝까지 남아 포로들을 치료하다가 27세에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 감독이 붙인 '퍼펙트 27'이라는 부제에는 스물일곱 생애를 완벽하게 살다 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10여년 만에 두 번째 오페라를 맡았지만 오페라 제작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무대 위 화려한 오페라에서 그 이면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영화 '낮은 데로 임하소서' '어둠의 자식들' 등 어둡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해왔던 이장호 감독. 그는 한국 오페라의 이 같은 환경을 '달동네에서 밍크코트 입은 젊은 여자를 보는 것 같다'고 비유했다.

연출가인 그로서는 연습을 주역, 오케스트라, 합창단이 따로 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공연이 올라가기 전, 드레스 리허설(의상부터 노래까지 공연과 똑같이 하는 리허설)에서 앙상블을 최종적으로 맞춰보는 시간은 그만큼 분주할 수밖에 없다. 제작환경에는 아쉬움이 많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아쉬움도 남기고 싶지 않은 눈치다.

무용이 따로 없지만 그는 안무가를 초빙해 합창단에서 음악에 맞춘 동작을 해줄 것을 주문했다. 그가 꼽는 공연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맹의순이 신앙에 대한 회의에 빠졌을 때, 중공군 소년병이 부르는 찬송가를 듣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다. '평범하지만 감동적인 장면을 만들고 싶다'는 그는 두 편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란 영화에서 보면 목회자가 풍랑에 배가 전복되었을 때 사람들을 탈출 시키는 장면이 나와요. 그 난리통에 목사가 하느님한테 외치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나 하지 마십시오!'라고요. 그 장면이 아주 짠해요."

그는 이어 차인표가 주연했던 한국 영화 '크로싱'의 장면을 떠올렸다. 북한에 살던 그가 아내의 결핵 약을 구하려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남한에 와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살아갈 이유를 잃어 힘들어 할 때 교회의 한 장로가 신앙적인 위로를 한다.

그때 울부짖으며 장로에게 하는 말이다. '왜 하느님은 북조선에는 없고 남조선에만 계시나요!' 이 감독은 이처럼 가슴 먹먹한 장면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올해로 예술인생 35년. 그동안 걸어온 길에 만족한다는 이장호 감독은 어릴 적 꿈도 '예술가'였다. 그가 영화감독이 된 데는 예술 애호가이던 아버지의 그늘이 짙다. 중앙청 공보처에서 영화 검열관으로 일하셨던 아버지는 그를 무릎에 앉혀 놓고 함께 영화를 보곤 했다.

흑백 SF영화나 찰리 채플린의 영화 등 '시네마 파라디소'를 연상시키는 단편적인 기억들이 그에겐 수도 없이 많다. "당시엔 에로틱한 영화가 아니라 사상적인 문제 때문에 검열을 했었대요. 찰리 채플린이 한 때 공산주의자로 오인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상영이 금지됐었거든요. 그림을 그리든, 노래를 하든 아버지는 항상 칭찬을 하셨어요."

7살 꼬마시절, 클래식 마니아셨던 아버지 손을 잡고 본 생애 첫 오페라가 '라 트라비아타'였다. 이탈리아어가 아닌, 한국어로 번역한 가사로 노래했던 시절이다. '사랑의 이중창'의 가사가 어린 나이에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다. 공연장을 나서자마자 따라 불렀더니, 아버지는 '예술 해야겠다'고 하셨단다.

이 감독은 인터뷰 도중 매끄러운 목소리로 그 노래를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딜레땅뜨셨다면 어머니는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분이었다. 형과 자신에게 커플 룩을 지어 입히셨던 어머니는 후에 양장점을 운영하기도 하셨다. "이렇게 된 데는 아버지의 세뇌를 받았다고 볼 수 있죠.(웃음). 그리고 조용히 실천하는 기질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옅은 미소를 띄고 추억에 잠긴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공연 연출이 즐겁다는 그는 뮤지컬도 준비 중이다. 본격적인 공연계 진출 의지를 다지며 사무실도 오픈 했다. 궁극적으로 꾸는 꿈은 영화와 뮤지컬로 선순환 하는 '원 소스 멀티유즈'의 제작방식. 올해 6월 말에 포크 가수 이장희 씨의 곡을 제목으로 붙인 주크박스 뮤지컬 '그건 너'를 먼저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이장희 씨의 '그건 너(부제: Good Old Days)'는 가요계에서도 기념비적인 노래다. 그를 통해 '그들만의 리그'였던 포크가 가요계 주류로 올라서며 한 세대를 풍미했다. 영화 '별들의 고향'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던 이장희 씨와 이장호 감독, 그리고 최인호 작가는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뮤지컬에 이어 영화도 작업할 예정이다. 백제를 시대배경으로, 음식을 소재로 한 역사 판타지 물이다. 현재는 시나리오 작업이 한창이다. "'왕의 남자' 이후 새로운 소재에 놀랄 겁니다"고 말투에서 자신감이 읽힌다. 이 영화로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는 그는 "옛날에 가장 떨어진 분야가 영화와 정치라고 했는데, 그 사이 정치와 달리 영화는 많이 발전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장호 감독은...

홍익대 건축미술학과 중퇴. 신상옥 감독의 권유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으로 감독데뷔 이후 '바람불어 좋은 날'(1980년),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 '바보선언'(1983), '무릎과 무릎 사이'(1984년), '어우동'(1985년),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 등을 감독했다. 19회 대종상 감독상, 38회 베를린영화제 칼리가리상 등을 수상. 이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장 등으로 활동. 현재 전주대학교 영상예술학부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