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봉사 꿈꾸는 '키다리 아저씨'10년째 '사랑의 보일러 교실' 운영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 저녁 서울 성수동의 한 소규모 공단 밀집지역의 좁은 교실. 10여 명의 나이든(?) 학생들이 모여 앉아 있다. 대부분 50~60대인 이들은 IMF보다 더하다는 불황을 맞아 실직하거나 퇴직한 사람들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한 개인에 의해 거의 무료로 교육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영수(54) 보일러 명장은 올해로 10년째 사재를 털어가며 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실직자, 이웃을 데우는 보일러공

이영수 명장의 10년 투혼이 실직자를 변화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22기를 배출한 '사랑의 보일러 교실' 졸업생들은 평균 2.3개의 보일러 관련 국가 자격증을 따냈다.

실직과 퇴직의 설움을 딛고 기능인으로 사회에 복귀한 이들만 500여 명에 이른다. 일부는 이 씨를 만나면서 노숙생활을 접고 당당한 직업인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한 사람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이 씨의 사랑은 이웃과 주변까지 변화시켰다. 이 명장은 졸업요건에 사회봉사 50시간을 넣어 학생들이 독거노인을 비롯한 저소득층을 돕게 한다. 졸업생은 무조건 쌀 한가마니를 기부해야 한다. 이 쌀은 보일러 수리를 받은 저소득층에게 준다.

'보일러 교실' 주변의 이웃들 역시 한 시름 덜었다. 주택가 한 가운데 있는 보일러 교실 자리는 원래 불량청소년들의 집합소였다. 이들이 피우고 간 담배꽁초, 본드와 검정 비닐을 비롯한 쓰레기가 가득했다. 그런 자리가 따뜻한 배움의 자리로 변한 것이다.

"IMF 때 받은 포상금 그냥 쓰기 아까워 시작"

이 씨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학생들과 혼자 사는 노인의 보일러를 고쳐줬을 때다. "할머니가 따뜻하게 잘 생각을 하면 나도 따뜻해진다"는 게 그의 말이다.

가장 가슴 아팠던 때를 묻자 그는 '갈아준 보일러를 얼마 못 쓰고 다시 연탄을 설치해달라고 했던 할머니'를 떠올렸다. 이 명장은 "얼마나 형편이 어려웠길래 다시 연탄을 설치해달라고 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고 말한다.

이 명장이 이런 일을 시작한 이유는 뭘까. "명장 돼서 포상금 1000만원 받은 때가 98년이에요. IMF 때라 사회가 어두워 혼자 쓰기 미안한 마음에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죠."

이 명장은 "계속들 찾아오니까 손을 못 떼요"라며 "그러면 저 사람들은 어쩝니까"라고 말한다. 그는 "고학력자들이 많이 몰려오는 걸 보니 경기가 어렵기는 어려운가 봐요"라고도 했다.

이 명장이 보일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계기 역시 독특하다. 20대에 음악다방 디제이(DJ)로 일하던 그는 '디제이는 여자들이 너무 따르니, 직업을 바꾸라'는 아내의 부탁을 받고 보일러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보일러공으로 직업을 바꿨고 30여 년을 매진한 결과 명장에 이르렀다.

나를 울린 '키다리 아저씨'

그의 봉사에는 역할 모델이 있다. 서울 행당동에 살았던 9살 '국민학교' 시절. 지체장애를 앓고 있던 친구 '거북이'를 도와줬던 '키다리 아저씨'다.

휠체어는 커녕 목발조차 살 형편이 안됐던 그 친구는 다리에 검정 고무를 댄 채 배에 밀대를 깔고 기어 다녔다. 친구들은 그를 '거북이'라 놀렸다.

기침을 심하게 하며 피까지 토하던 그 아이를 철없던 또래들은 병원으로 밀어넣으며 키득대기 일쑤였다. 간호사는 '재수 없다'며 아이들을 매몰차게 내쫓았다.

그때 이 씨는 하얀 가운을 입고 석양을 등진 '키다리 아저씨'를 만난다. 그 병원의 의사였던 '키다리 아저씨'는 친구에게 '폐병' 진단을 내리고 약을 무료로 줬다. '키다리 아저씨'는 형편이 어렵던 그 친구의 집에 쌀까지 대줬다.

어느날, 그 친구의 집 앞에는 거적데기가 하나 놓여있었다. 그 친구의 여동생은 '오빠'를 부르며 흐느끼고 있었다. 관을 짤 형편이 안돼 폐병으로 죽은 그 친구를 놓았던 것이다. 어른들은 병이 옮는다며 그 근처에 가지 못하게 했고 이 씨는 친구에게 작별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씨가 지금도 '거북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 이유다.

이 씨는 그때 '의사가 돼서 아픈 아이들을 고쳐줘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는 의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보일러공으로서 '키다리 아저씨' 같은 삶을 산다.

"10년 후에는 본업인 음악으로 돌아갈 것"

"10년쯤 후에는 다시 본업인 음악디제이를 겸한 봉사를 해볼 생각이에요."

이 명장은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돌아온 길을 마무리 하고 다시 본업(?)인 음악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그는 집에 1만여 장 이상의 음악 콘서트 현장실황 CD를 갖고 있다. '사랑의 보일러 교실'을 운영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록그룹인 '디퍼플'의 앨범까지 엘피(LP)판은 모두 팔아치웠다. 그는 "음악을 틀어주면서 괴롭고 슬픈 이 시대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며 "힘들고 괴롭고 슬플 때 음악 이상의 약은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명장은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다. 임대료, 실습재료비를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2005년까지는 성동구가 지금의 '서울 숲' 자리에 교육장소를 제공했지만 이후 이 씨는 혼자서 임대료와 재료비를 감당하고 있다. 수강생에게 받는 하루 수강료 900원으로는 강의실 전기요금, 전화비, 수도요금 내기도 벅차다.

때마침 시에서 전화가 왔다. 이 명장은 "그러니까 세가지 다 법적으로 적용되기 힘들다는 거죠. 그럼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 명장은 "도와주려고 시나 구에 민원을 넣어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법을 잘 몰라서인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명장의 아내가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이 씨의 봉사활동을 뒷받침 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이유다. 이 명장의 첫째 딸은 숙명여대 음악치료대학원에 재학중이다. 그는 매주 주말에 청계천에 나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음악봉사를 한다. 이 명장의 가족들 모두 '키다리'인 셈이다.

"대통령과의 약속"

이 씨는 지난 2004년 4월 7일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을 '서울숲' 개발이 예정돼 있던 '사랑의 보일러 교실' 인근에서 우연히 만나 도움을 구하려 했으나, 비서진의 제지를 받았다. 그는 '언제든 만나주겠다는 증명을 해달라'고 부탁했고, 대통령의 확인(사진)을 받았다. 이후 서울시청을 찾아가봤지만 공무원들의 제지로 번번이 시장을 만나지 못했다.

이 명장은 지금도 매달 180여 만원에 이르는 임대료와 실습 재료비를 사비로 감당하며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다. '일자리 나누기', '일자리 만들기'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