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가] 내일을 꿈꾸는 비주류들 (24)대안 공간 '충정각' 큐레이터

문화를 향유하는 안목이 다양해진 요즘 주류문화의 식상함에 반발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그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주류문화보다 비주류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는 추세다. 문화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기엔 이미 둘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하여, 비주류는 이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주류는 아웃사이더나 이단아가 아니라 '비전'이 있고, 예술세계에 '비주얼'이 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미래가 밝은 문화인들이다. 뚜렷한 주관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나가는 '내일을 꿈꾸는 비(飛)주류'. 그들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100년역사 유럽식 건축물 개조한 복합문화공간서 '생활 속 미술' 실현
'흙 속의 진주' 찾아 수시로 전국 출장… 위축된 미술시장 활기 불어넣어
"늘 새로움을 추구하며 발로 뛰는 큐레이터로 활동하고파"


"자장면 배달 되냐고요? 죄송합니다. 충정각은 대안공간과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입니다."

서울 종로구 충정로 3가.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룬 도심 한복판에 고풍스런 자태를 뽐내는 이층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2007년 9월 문을 연 '충정각'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름 때문에 개관 당시 중국집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 충정각은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서울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유럽식 건축물 중 하나다.

충정각의 뾰족한 지붕 아래 바랠 대로 바랜 붉은 벽돌과 넝쿨진 담쟁이는 언뜻 보아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돌층계를 따라 오르면 눈부신 하얀색 현관과 유럽풍의 창문, 볕 좋은 날 마당을 바라보며 즐기기 좋은 간이 테이블, 자연 그대로의 운치를 최대한 살린 안마당과 과거 누군가의 가정집이었다는 걸 짐작케 하는 장독대,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나무들, 충정각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제가 처음 충정각을 발견했을 때 느낀 '포스'(force)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지요. 붉은 벽돌, 유럽식 창틀, 빨간머리 앤의 방을 떠올리게 하는 2층 다락방까지, 충정각은 10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죠."

대안공간 충정각의 운영자인 이은화(32) 큐레이터가 이 건물을 발견한 건 2007년 여름경이다. 1910년대에 독일인 건축가가 지은 후 줄곧 누군가의 가정집이었던 건물은 2006년 주인이 바뀌면서 갑작스런 재개발 위기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근대건축물로서 문화재 등록이 가능한 공간이라는 점 때문에 주변의 반대로 개발은 잠시 중지된 상태. 마침 비어 있던 건물을 지금의 충정각 레스토랑 사장 문동수 씨가 임대했다.

화랑과 레스토랑의 절묘한 공존

"사장님은 '그림이 있는 레스토랑' 운영에 뜻을 두고 계셨죠. 건물을 보고 첫눈에 반한 저는 이곳이 상업공간으로만 사용되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갤러리를 겸한 대안공간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했어요.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장님이 흔쾌히 승낙했고요."

뜻이 잘 맞자 충정각은 곧바로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갔다. 건물 외관은 그대로 보존하고 내부는 갤러리와 레스토랑이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드느라 여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미술인회의 대표인 성완경 씨가 이름을 짓고 전각가 고암 정병례 선생이 솜씨 좋게 글자를 새겨 오늘의 충정각이 탄생했다.

"보통 화랑과 레스토랑을 겸하면 그림을 좋아하는 레스토랑 사장이 공간을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충정각은 달라요. 대안공간과 레스토랑은 엄연히 독립된 영업장이죠. 사장님은 전시나 작품 판매로 인한 수익이 전혀 없고, 저 또한 레스토랑 소속 큐레이터가 아니니까 월급을 받지 않죠."

이은화 씨는 대안공간 충정각 운영자이자 동시에 독립 큐레이터다. 충정각이 개관하고 지금까지 14개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이 씨는 큐레이터 생활을 하며 모토로 삼았던 '미술관 문턱 낮추기'와 '생활 속 미술'을 절로 실현할 수 있었다. 특히 충정로 일대의 30, 40대 회사원들에게 충정각이 점차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잡는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직장생활을 하느라 미술과 등 돌리고 살 수밖에 없었던 분들이 우연히 이곳에서 점심을 드시다가 미술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죠. 업무 관련 미팅으로 왔다가 관람하는 분도 계시고, 미술에 관심은 있었지만 가격이 비쌀까봐 구입하기 망설이던 분들도 여기서는 스스럼없이 지갑을 열지요."

충정각이 작가들의 작품을 구매한 후 전시, 판매하는 상업화랑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충정각은 작품을 구입하지 않는다. 대신,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기 위한 기획전을 연다. 그래서 작품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5만 원 대부터 시작해 천차만별인 것이다. 스파게티와 와인을 마시러 왔다가 벽에 걸린 작품에 관심을 갖고 가격을 문의하다 괜찮으면 구매하는 관람객도 최근 늘어났다.

사실 충정각에 처음 온 손님들은 건물 외관의 고풍스런 분위기에 이내 기가 눌릴지도 모른다. 바닥을 디딜 때마다 마룻바닥에서 나는 '삐걱' 소리 때문에 하이힐 뒤꿈치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하지만 이런 곳에서 20대 위주의 젊고 발랄한 신진작가 기획전이 열린다는 건 일종의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내일을 향해 쏴라! 2'는 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열린 기획전이었다. 불황 속에서 충정각의 신진작가 전은 "영 아티스트 발굴과 함께 위축된 미술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훈훈한 평가를 받았다.

신진 작가들에게 중앙무대 진출 기회 줘

"고풍스런 공간에 고가의 작품이 걸려 있다면 숨통이 막힐 것 같지 않나요? 오히려 이런 곳에서의 톡톡 튀는 발칙한 작품들은 방문객에게 '휴식'이지요. 100년의 역사를 품은 충정각이 젊은 작가들의 에너지까지 감싸주니, 이곳은 그들에게 고마운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답니다.(웃음)"

이 씨에게 '내일을 향해 쏴라! 2'가 열리는 동안은 무모하지만 열정적으로 세상과 맞서려는 젊은 작가들에게서 오히려 에너지를 수혈받는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최근 미술 시장은 고가의 작품보다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투자 대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젊은 작가를 발굴하는 데 의미를 둔 충정각의 전시는 상업화랑에겐 관심의 대상이다.

"최근 상업화랑들이 20대 젊은 작가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애초 다른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대안공간들의 태도가 애매모호해졌지요. 하지만 신진작가전을 제외한 충정각의 '젊은 작가' 기획전은 '나이의 젊음'이 아니라, '생각의 젊음'이라는 차별성이 있어요. 20대부터 60대까지 젊은 생각으로 무장한 작가들을 찾고 있지요. 그러다 보니 때에 따라 나이도 젊어지는 경향도 있는 것 같네요.(웃음)"

이 씨가 젊은 작가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다. 그래서 이 씨는 스스로 '발로 뛰는 큐레이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젊은 작가, 특히 지역 작가들에게 안테나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발로 뛰는 큐레이터로 사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고된 일이다.

오늘은 부산, 내일은 광주로 출장 다니는 일 또한 허다하다 보니, 때론 체력이 바닥날 때도 있다고. 밤 늦게까지 미팅을 하거나 심지어 혼자와의 싸움에 길들여진 작가들의 푸념을 들어주느라 밤을 새기도 한다.

"그렇게 힘들게 만난 작가의 작품이 생각보다 좋다면 그들에게서 바로 에너지를 얻어요. 또, 작가가 좋은 평가를 받을 때 보람은 백배고요!"

직접 '발굴'하고 돌아다니다 충청권에서 활동하는 실력 있는 작가 6명을 만났을 때 이 씨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현재 진행 중인 '섬과 맞서는 전술'(2.25~3.20)전은 이 씨가 지역 출신 작가들의 기를 팍팍 살려주기 위해 기획한 전시나 다름없다. '섬'은 지역 작가들에게 소통을 막는 벽이자 동시에 연결망이라는 뜻.

이번 전시가 의미 있는 이유는 참여한 작가 6명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첫 번째 데뷔 무대라는 것이다. 혼자와의 싸움에 길들여진 작가들이 그들 안의 '섬'을 넘어 새로운 기회를 잡기를 바라는 이 씨의 마음이 어느 정도 느껴지는 전시이기도 하다.

"서울을 제외한 타 지역은 늘 중심에서 제외되곤 하잖아요. 미술판도 마찬가지죠. 인맥 없이 중앙에서 인정받기는 어려워요. 서울권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았더라도 좋은 작가들이 참 많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다만 그들이 알려지지 않은 건 중앙에 소개될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는 것을요."

과거 부산, 제주서도 큐레이터로 활동

이은화 씨는 부산여대 서양화과를 나왔다. 부산에 있는 화랑에서 3년 동안 큐레이터로 경력을 쌓고 2년 동안은 인테리어 일을 했다. 1년을 계획하고 떠난 제주도에서 '대안공간 제주'를 운영했지만 공간이 없어지는 바람에 잠시 방황의 시간도 보냈다.

"분업이 잘 되어 있는 대규모 화랑에서 큐레이터는 그야말로 꽃일 수도 있죠. 하지만 전시기획부터 작가미팅, 설치, 전시자금까지 걱정해야 하는 저에게 큐레이터는 결코 만만치 않은 직업입니다."

대안공간 충정각을 처음 이끌어나갈 때였다. 작가를 섭외하러 지방에 갈 교통비가 다 떨어지고 만 것이다. 벌어놓은 돈을 모두 전시자금에 쏟아 부은 탓이었다. 그때는 하는 수 없이 서울 작가 위주로 기획전을 열어야만 했다. 하지만 작년에 서울시 공공미술에 참여하면서 '러브하트 프로젝트'로 지원금 1억 원을 받았을 때는 그나마 숨통이 트이고 자신감이 붙었던 시기다.

어려운 시기를 거쳐서인지 지금은 한 평짜리 운영사무실에 어시스턴트를 둘 정도로 안정된 상태다. 그러니까 이 씨에게 '섬과 맞서는 전술'전은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씨는 독립 큐레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 공간에서만 전시를 하다 보면 타성에 젖게 될까봐 될 수 있으면 다른 전시 기획도 마다하지 않는 편이다.

"작가가 자신에게 맞는 전시장을 찾기 위해 고민하듯 큐레이터도 자신의 기획에 어울리는 공간을 찾게 되지요. 충정각에서 공간의 제약으로 해보지 못했던 나만의 전시를 할 수 있다는 게 독립 큐레이터의 또 다른 매력인 것 같아요.(웃음)"

2월 27일에는 독립 큐레이터 류병학 씨와 공동 기획한 '이것이 명품이다'전이 서울 신림동의 포도몰이란 쇼핑몰에서 열린다. 충정각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셈이다.

"개인 작업이요? 큐레이터 일이 너무 재밌는 걸요. 전시가 바로 제 작품이에요."

가볍고 정체된 기존의 미술을 뒤엎는 큐레이터가 되는 게 바로 이은화 씨의 꿈.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원로 큐레이터로 남고 싶어요. 미술판에서 오랫동안 큐레이터로 살아남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두려움 없이 새로움을 추구하고 시도하는 큐레이터가 되었으면 해요."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