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화백 소재 신간… 가부장제 분노 지나 선함·진실의 새 작품세계 열어

작가 이경자 만큼 독자 반응이 첨예하게 갈린 문인이 또 있을까. 20대 젊은 세대에게 낯선 이름이지만, 그는 1980년대 여성의 삶을 전면에 다룬 연작 '절반의 실패'로 줄곧 여성주의 작가로 불려왔다.

파격적인 소재와 직설적인 화법으로 내놓은 작품마다 화제로 떠올랐고, 몇몇 작품은 드라마가 되기도 했다. 이후 '혼자 눈뜨는 아침', '사랑과 상처', '계화' 등 이십 여 년 간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 역시 '여성'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남성 위주의 지식인 사회에서 독특한 위치를 만들었다. 작가 이경자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지만, 한편으로 문학 세계를 틀지우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화가 박수근을 소재로 한 '따뜻한 소설'로 돌아왔다. 세월은 작가의 시선을 바꾸는 걸까? 여성의 삶에 집중했던 작가는 이제 시야를 넓혀 인간의 삶에 관심을 보인다.

제목이 빨래터인 까닭

"경자, 그 얘기 들었지? 박수근 한번 써봐. 잘 쓸 수 있을 거야."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 위작 논란이 보도되던 때, 신경림 시인이 이경자 작가에게 말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됐노라고, 이경자 작가는 '작가의 말'에 적고 있다.

"거기 적힌 그대로에요. 소설을 준비하면서 박완서 선생의 '나목'을 다시 읽었죠. 박 선생님은 '잘 할 수 있을 거다' 격려해 주셨어요."

명동에서 만난 그는 이순(耳順)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전 어느 지면을 통해 '이 소설을 쓰면서 행복했다'고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박수근이라는 걸출한 예술인의 삶을 그린 신간 '빨래터'는 위작 시비란 불편한 '팩트'에서 시작한다. 박수근의 아들이자 화가인 박성남은 어느 날 아버지의 대표작 빨래터가 위작이라는 신문사 기자의 전화를 받고 작품의 소장자 존 릭스가 있는 미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박수근과 그의 삶이 이어진다. 가난에 찌들린 박수근의 삶과 평생을 아버지와 불화한 아들의 사연, 헌신적인 부인 김복순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다. 빨래터란 제목과 달리 소설은 예술가와 예술가 아들의 삶이 주를 이룬다.

"처음에 '아버지와 아들', '그 남자 박수근' 이런 식으로 제목을 지으려고 했어요. 빨래터란 제목이 오해를 불러일으킬까봐. 그런데 작품을 끝내면서 제목이 어떠해도 상관이 없다는 자신감을 가졌어요. 작품을 읽으면 제가 위작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거니까."

소설에서 빨래터, 정확하게 빨래터의 위작 시비는 아들 성남이 아버지 박수근과 화해하는 시발점이 된다. 위작 시비는 소설적 완결성을 위해서 배치했을 뿐 위작 여부 자체는 작가에게 관심거리가 아니란 말이다. 이를 테면, 빨래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셈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달이 아닌 손가락을 제목으로 삼았을까?

"빨래터는 박수근에게 특별한 작품이에요. 박수근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았어요. 그냥 사람이었죠. 이 사람은 자기한테 빨래하는 일이 닥치면 빨래를 하고, 밥하는 일이 닥치면 밥을 해요. 빨래터는 그런 박수근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이죠."

또 하나, 작품을 통해 꼭 말하고 싶은 점은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였노라고 작가는 말했다. 아들 박성남 씨를 일곱 번 인터뷰하면서 예술가 아버지와 그 큰 그늘에 가린 아들의 갈등을 읽었다고. 이 감정은 소설가인 자신과 소설가 엄마를 둔 자신의 딸의 관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박 씨를 인터뷰 하는 내내 작가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단다. 소설 집필 중 심각한 자신의 표정을 보고 어린 딸들은 "엄마, 얼굴이 이상해, 무서워"라며 울먹였다. 그 딸들은 조용히 숨죽이며 엄마의 집필을 도왔다. 여전히 집필을 하거나 인터뷰를 하러 기자들이 작가의 집을 찾을 때면 딸들은 방안에서 꼼짝하지 않는다고.

이경자의 마티에르

이번 작품이 전작들과 비교해 한층 부드러워진 것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스스로 "예전에는 미움이 저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면, 이제는 화해가 소설을 쓰게 한다"고 말했다. "이 책에 쓴 언어들은 파스텔 톤"이란 말도 덧붙였다.

"박수근이 지향하는 예술세계는 선함과 진실함이에요. '선함'이야말로 아름다움이며 어떤 환경에서도 끝까지 놓을 수 없는 인간성의 궁극적 가치죠. 그래서 발견한 기법이 박수근의 마티에르(화면의 재질감)에요."

작가는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글로 써내는 사람이다. 이 말은 지난 시절 이 씨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여성의 삶이었으며, 최근 가장 절실한 문제는 선함과 진실함이라는 말과 등식을 이룬다.

대화는 화가 박수근에서 작가 이경자로 옮겨 왔다. 파격적인 소재와 직설적 화법으로 화제를 모았던 작가는 "이 소설로 독자에게 즐거움과 따뜻함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지향점은 박수근의 작품 세계와 맞닿아 있다. 박수근의 마티에르는 작가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궁극의 경지가 아닐까.

"진정한 예술은 교육 받지 않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박수근의 작품이 그렇죠. 전 우리말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문학작품이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시인 백무산은 시집 '거대한 일상'에서 '긍정은 부정의 저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안고 넘어 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작가 이경자에게 투영한다면, 그는 가부장제에 대한 분노를 지나 선함과 진실이란 새로운 작품세계를 연 듯했다.

"새로 구상하는 작품이에요."

'순희의 천국'이라고 적힌 취재 노트에는 수십 개의 작은 제목이 빼곡히 적혀 있다. 새로 쓸 장편소설이란다. 작가 앞에 다시 지난한 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 긴 여정의 시작에서 작가에게 인사한다.

'당신의 마티에르를 기대합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