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가] 내일을 꿈꾸는 비주류들 (26)"히트 작품 뒤에는꼭우리 손길이 있답니다"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돈독한 선후배 관계 "우리 사이 세자매 같아요"

문화를 향유하는 안목이 다양해진 요즘 주류문화의 식상함에 반발하는 대중이 늘고 있다. 그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주류문화보다 비주류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는 추세다. 문화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기엔 이미 둘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하여, 비주류는 이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비주류는 아웃사이더나 이단아가 아니라 '비전'이 있고, 예술세계에 '비주얼'이 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비상'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미래가 밝은 문화인들이다. 뚜렷한 주관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나가는 '내일을 꿈꾸는 비(飛)주류'. 그들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제작감독 김민정, 좋은 제작감독은 냉정과 열정을 함께 가져야만 돼
음악감독 양주인, 뮤지컬 '컨페션' 쇼케이스 무대로 데뷔한 팔방미인
음악 조감독 박재현, 잘 나가는 음악감독 4인방에게 배운 기본기 탄탄


(왼쪽부터) 김민정 쇼틱 제작감독 박재현 음악조감독 양주인 음악감독


뮤지컬계에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선후배의 우정을 과시하는 젊은 스태프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쇼틱의 제작감독 김민정(30, 99학번), 뮤지컬 '돈주앙', '김종욱 찾기'의 음악감독 양주인(29, 00학번), 뮤지컬 '드림걸즈'의 음악 조감독이자 라이브 세션을 담당하는 박재현(28, 01학번) 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해외 유학파도 소위 명문대 출신도 아니다. 셋은 경원대학교 작곡과 출신이다.

이들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공연계, 그것도 가장 인기 있는 장르인 뮤지컬계에서 자리를 잡은 비결은 무얼까. "패기와 열정! 재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노력"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만 사실 한 가지 비결이 더 있다. 그건, 어려울 때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 붙은 별명도 '세자매'다. 수시로 통화하며 정보교류는 물론 힘들 때 'SOS 긴급구조대' 못지않은 순발력을 발휘하는 셋은 서로의 '꿈 지원자'이자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봄 햇살처럼 명랑한 김민정, 양주인, 박재현 씨가 바쁜 스케줄을 쪼개 만났다. 유쾌한 수다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 셋은 실제 자매처럼 외모도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민정 언니와 주인 언니가 없었다면 제가 뮤지컬계에서 활동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

현재 뮤지컬 '드림걸즈'음악 조감독과 라이브 세션을 담당하는 박재현 씨는 연신 언니들 자랑이다. 앳되어 보이는 박씨는 셋 중 가장 막내다. 박씨가 처음 뮤지컬계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양주인 씨 때문이다. 작곡과를 졸업하자마자 '대교 쇼빅스'에 취업해 아이들 음악 가르치는 일을 주업무로 삼았던 박씨는 당시 채울 수 없는 공허함과 싸웠다. 그러던 중 우연히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공연하는 뮤지컬을 보게 되었다. 박씨는 벅차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 제가 진정 하고 싶은 건 바로 뮤지컬인데 지금 여기서 뭐하나 싶었죠."

박씨가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된 건 바로 양주인 씨의 "일단, 저지르고 수습하라"는 조언 때문이었다.

"당시 3년 계약하고 들어간 회사에 600만 원이 넘는 위약금을 물어야만 했어요. 그만큼 제겐 너무도 절실했거든요."

비싼 인생의 수업료를 치른다고 생각했다. 선배들의 조언은 소심했던 그녀에게 난데없는 용기까지 심어주었다. "어떻게든 잘 될 거란 막연한 희망이 있었어요. 선배들이란 존재가 그 중 가장 큰 힘이었죠. 후회는 없어요. 빨리 결단을 내리도록 도와준 주인 언니에게 지금도 고마울 따름이에요.(웃음)"

박씨는 뮤지컬 '첫사랑'의 음악 조감독으로 뮤지컬계에 입문했다. '첫사랑'은 김민정 씨가 속해 있는 쇼틱이 제작한 뮤지컬이기도 하다. "주인 선배가 책임졌냐고요? 물론이죠. '나인'이란 뮤지컬 음악 조감독도 주인 언니 소개로 시작했는걸요.(웃음)"

"제 첫 데뷔는 놀라시겠지만 '컨페션'뮤지컬 무대랍니다.(웃음)"

외모부터 배우가 아닐까 생각될 만큼 서글서글한 눈매가 매력적인 양주인 씨는 독특하게도 뮤지컬 쇼케이스로 뮤지컬계에 입문했다. 학창시절부터 가창 실력으로 인정을 받았던 양씨는 소녀시대나 슈퍼주니어, 박화요비, 백지영, 엄정화 등이 노래한 40여 장의 앨범에서 보컬 트레이너와 건반, 코러스, 편곡 등 다방면의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뮤지컬 '컨페션'쇼케이스의 주인공인 '태연' 역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여덟 곡이나 되는 곡을 사흘 만에 외워서 부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죠. 그때 뮤지컬 제작사 대표들이 거의 다 모인 자리였는데, 가끔 '태연'(배우 윤공주) 역할이 주인 씨였냐'고 놀라시는 분들도 계세요.(웃음)"

쇼케이스 무대를 인상 깊게 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음악감독 원미솔 씨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어요. 뮤지컬 '그리스'공연을 할 예정인데 스케줄이 되면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었죠."

양씨는 그 후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브루클린', '넌센스', '찬스', '천사의 발톱', '대장금', '나인', '스펠링 비'등에서 원미솔 감독의 든든한 파트너이자 조감독으로 활동했다.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음악감독인걸요. 이른 나이에 현장에서 일해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기회가 온 거죠. 참, 올 연말에 저를 뮤지컬계로 데뷔시킨 작품 '컨페션'의 음악감독을 맡게 되었어요. 저랑 인연이 깊은 작품이지요?(웃음)"

양주인 씨는 2008년 어린이 뮤지컬 '브레맨 음악대'로 음악감독 신고식을 치렀다. 사실 조금 더 일찍 데뷔할 기회도 있었지만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훨씬 컸다. 그건 오랫동안 함께 해온 원미솔 감독에 대한 그녀만의 '의리'이기도 했다.

"저는 뮤지컬 '컨페션'관객으로 시작해 시즌2 때는 제작감독이 되었지요."

작곡과를 나왔지만 셋 중 유일하게 전공을 살리지 않은 김민정 씨의 꿈은 프로듀서가 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줄곧 반장을 도맡아 해온 김씨는 자신의 적성은 혼자 작곡하는 일보다 전체를 보고 관리하는 일에 더 잘 맞다고 생각했다.

"작곡이 싫었다기보다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재미가 무언지 알았죠. 작곡이란 작업은 지극히 개인적이라 외롭다고 느낄 때가 많았거든요."

김씨는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 방송국 입사 시험을 준비했지만 최종 단계에서 떨어지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공연예술학을 전공한다. 연극보다 음악이 중심이 되는 뮤지컬이란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된 후 김씨의 '미친 듯이 뮤지컬 관람' 하기가 시작되었다.

"레슨을 해서 번 돈으로 무조건 공연을 봤어요. 그때부터 뮤지컬 배우, 스태프에 대한 동경이 생겼죠."

서울예술단 사업개발팀에서 1년 동안 인턴으로 일한 김씨는 뮤지컬 제작사가 아니면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공연 제작사 '쇼틱'을 발견했다.

"대학원 논문을 준비할 때부터 워낙 관심을 갖던 회사였죠. 무엇보다 창작진과 콘텐츠 개발에 관심이 있던 터라 라이센스 작품보다는 창작뮤지컬을 제작하는 쇼틱에서 꼭 일하고 싶었어요."

김씨는 쇼틱의 대표 김종헌 씨를 '사수'로 두며 프로덕션 실무를 익혔다. 대형 제작사에서 2~3년 동안 배울 노하우를 1년 만에 익혔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1:1의 빡센 수업'을 받았다.

제작감독이 하는 일은 한마디로 프로덕션의 모든 실무 즉, 콘텐츠 개발부터 공연이 올려지기까지 전 과정을 담당한다. 배우와 스태프 캐스팅, 각종 업체 계약과 오디션 진행, 각 파트간의 이견을 조율하기도 하고 예산을 짜고 집행하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사회경험이 많지 않았던 '초짜'로 입사해 지금은 베테랑 급으로 성장한 셈이다.

그 결과 쇼틱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제작감독이란 직함을 달 수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뮤지컬 '컨페션', '소리도둑', '내 마음의 풍금'은 이제 그녀의 당당한 커리어가 된 셈이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제작감독은 저희 대표님처럼 냉정과 열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저에겐 열정은 있지만 냉정은 차차 배워가는 시기인 것 같아요."

현장 스태프로서 사회생활의 첫 출발을 하며 왜 힘든 일이 없었겠는가? 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박재현 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그만둘까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음악감독이 지닌 에너지 넘치는 매력 때문에 달려들긴 했지만 처음엔 많이 울어야 했어요. 작품 '첫사랑'을 할 때 변희석 감독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일할 때 무섭게 냉정해지는 오늘의 제가 없었겠지요. 그때 강하게 단련된 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아요.(웃음)"

양주인 씨가 원미솔 음악감독과 오랫동안 파트너로 활동했다면 박씨는 변희석(첫사랑, 씨스터 소울), 구소영(소리도둑), 김문정(내 마음의 풍금), 원미솔(나인, 지킬앤하이드, 드림걸즈) 등 뮤지컬계 음악감독 파워 4인방이라 할 수 있는 감독들을 두루 경험한 케이스다.

"재현이는 성격이 동글동글해서 많은 배우, 스태프들과 원만하게 생활하죠. 게다가 배우를 가르치고 밴드 마스터하는 실력이 탁월해요. 물론 피아노 실력도 좋죠. 제작사 입장에서는 여러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재현이 같은 스태프를 탐낼 수밖에 없는 거죠."

'자기 자랑'을 쑥스러워 하는 박 씨 대신 선배 김민정 씨가 내린 평가다. 하지만 맹목적인 칭찬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음악감독이나 작곡가들은 창작인으로 인정받으며 한 작품씩 쌓아나갈 때 위상이 생기죠. 그런 걸 꼭 부러워하는 건 아니지만 뒤에서 백업하는 제작감독은 때론 스태프 축에도 못 낄 때가 있어 가끔씩 기분이 처지곤 해요. 그럴 때는 잠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련함을 느끼지만 제작감독으로서 전체 프로덕션을 총괄하며 일하는 걸 지금은 즐기고 있어요.(웃음)"

팀에서 가장 큰언니인 김민정 씨의 소견이다. 양주인 씨도 처음 시작할 때 경험했던 난항을 생각하며 잔잔한 미소를 띤다.

"음반회사에서 보컬 트레이너로 활동했기에 가르치는 것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어요. 하지만 가요, 팝과 뮤지컬은 서로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죠. 지금요? 어떤 음악감독들보다 보컬 지도에는 자신감이 있답니다.(웃음)"

양씨는 새벽 2~3시까지 배우들과 원 없이 노래 연습하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함께 작품 고민하는 '노래하는 음악감독'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면서 양씨도 함께 배워가는 것이다.

"중학교 때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저에게 내린 음악에 대한 열정이 떠올라요. 작곡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할 만큼 밤을 새워가며 무섭게 작곡을 하던 시절이었죠. 곡을 쓰다가 피아노 의자에 쭈그리고 쪽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너무 행복했었던 그때의 불씨가 요즘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았어요. 올해는 아마도 음악감독으로서 '점' 하나를 찍고 작곡을 통해 불을 붙이는 한 해가 되지 않을까 해요.(웃음)"

그렇다면 김민정 씨는? "요즘 제 머릿속에는 4월에 올려질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생각뿐이에요. 재연 공연이다 보니 자칫 느슨해질 수 있어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끊임없이 힘을 주려고 노력하죠. 최종적인 꿈요? 물론 세계가 인정하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거죠. 개인적인 꿈 하나가 더 있어요. 일생에 딱 한편이라도 제 이름 석자를 걸고 뮤지컬 작곡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그 작품을 프로듀싱하는 거죠."

박재현 씨도 꿈 이야기에서는 질세라 "'드림걸즈'를 하면서 외국 스태프들과 처음 일해본 게 제 인생에서 잊지 못할 교훈이었던 것 같아요. 영어 공부 열심히 해서 브로드웨이에 가려고 해요. '드림걸즈'의 미국인 음악감독이 자꾸 같이 브로드웨이에 가자고 하시네요.(웃음) 이거 자랑 맞죠?"라며 아직 자랑이 익숙치 않다는 듯 부끄럽게 웃는다.

셋은 서로가 담당한 작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다. 때론 격려도 때론 냉정한 비평도 서슴지 않는다. 서로의 건강한 성장을 기대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쾌한 수다로 이루어진 이들의 이야기는 몇 년 후 분명 현실이 되어 있을 것이다. 충분히 노력하고 쉬지 않고 꿈을 향해 달린다면 말이다.



류희 문화전문라이터 chironyou@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