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묘법' 화가 박서보독창적 작품 세계가 주목… 21세기 미술은 디지털 시대 병 치유해야

“여깁니다. 이리로 올라오세요.”

우렁찬 목소리를 따라가니 계단 위 2층에 박서보(78) 화백이 미소를 짓고 있다. 서울 홍익대 앞 박 화백의 스튜디오. 지난달 18일 부산에서 열린 화랑미술제에 동행한 후 10여일 만이다.

“전엔 살림까지 했는데 이젠 사무실로만 쓰고, 작업실은 옆 1층에 있어.”

책으로 둘러싸인 작은 사무실 너머 아래 널찍한 작업실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작업 중이던 ‘묘법’ 작품이 군데군데 놓여 있고, 둘레엔 작품이 엄청나다.

“와 보고는 모두 놀라지. 우선 작품량에, 그리고 작품에.”

스튜디오에만 1000점 가량 된다고 한다. 미술에 들어선 이래 요즘도 거의 매일 12시간 이상 작품에 몰두하고, 좀처럼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수신(修身)의 도구예요. 그저 매일 작품을 하는 게 일상이죠.”

지금 작업 중인 ‘묘법’ 연작은 1개월째 진행 중이다. 완성되기까지는 몇 개월이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팔순을 앞둔 노화가의 정열과 진지함이 경탄스럽다.

박서보 화백은 한국의 현대미술 1세대 화가이자 추상미술의 대표격이다. 1954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1950~60년대 한국적 추상화(엥포르멜)를 이끌었고, 70년대엔 모노크롬(단색) 회화, 80년대 이후 ‘묘법 시리즈’ 로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에 있었다. 1956년에는 고답적인 제도미술을 지적하는 ‘반(反)국전 선언’을 하는 등 우리 미술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미술출판사 애슐린(ASSOULINE)은 올해 그의 작품집(‘Empty the mind’)을 낸다.

“요즘 국내뿐 아니라 세계 여기저기서 전시를 요청해 와 더 바빠졌어.”

그럴만도 하다. 지난해 5월 뉴욕 전시에 이어 지난 연말 싱가포르 현대미술전, 올해 3월 중국 상하이 전시, 4월 하이난섬 전시에다 국내 화랑의 러브콜도 끊임이 없다.

특히 4월 중국 초대전은 주목할 만하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지도자, 경제장관 등이 참석하는 국제회의 기간에 열리는 전시로 중국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를 엄선했다. 중국의 장샤오강, 팡리쥔 등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4인과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인도미술의 대표작가 2인, 그리고 한국의 박서보 화백만이 초청됐다.

이번 미술제를 주관한 판디안 중국미술관 관장은 ‘세계 미술계의 영향력 있는 50인’에 포함될 정도로 중국을 대표하는 미술기획자이자 평론가, 미술행정가이다. 그는 박 화백에 대해 “가장 현대적인 작업을 하면서 동양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작가”라고 초청 이유를 밝혔다.

판디안이 ‘가장 현대적인 작업을 하는’, 그리고 ‘동양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작가라는 표현의 의미는 무엇일까?

박 화백은 ‘현대적인 작업’과 ‘동양인이 할 수 있는 일’을 ‘같은 맥락’이라고 해석했다. 즉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문제를 동양이 중시하는 정신적 가치로 해결할 수 있고, 자신의 작품세계의 핵심, 메타포도 ‘동양 정신’이라는 주장이다.

“21세기 디지털 시대는 스트레스 때문에 세계가 정신병동으로 병들어가고 있는 ‘스트레스 병동시대’예요. 묻지마 살인, 방화를 봐요. 정보 전환의 속도를 못 따라가니 낙오자가 되고 그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해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아날로그 시대는 정년이 보장되고 변화의 속도에 적응할 수 있어 스트레스가 적었지만, 모든 게 가속화되는 디지털 시대엔 30대 과장이 머잖아 직장을 떠나야 하는 불안한 미래와 직면, 스트레스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이란 작게는 개인 경험의 전달이지만 크게는 시대의 산물인 만큼 21세기의 예술은 스트레스라는 새로운 문제를 치유하는 기능도 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70여년을 아날로그 시대에 살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불행스럽게도, 디지털 시대의 고민을 안고 삽니다. 변환의 속도는 충격적이죠. 미술도 그래요. 21세기는 그래서 1회용 천재의 시대라고 봐요. 비엔날레 어디를 가도 그 놈이 그 놈이고. 진정한 예술의 시대는 끝났어요.”

아날로그 시대의 미술은 작가가 그림 위에 군림해서 자신의 강렬한 메시지를 캔버스에 쏟아냈고, 감상자들은 그 표현으로부터의 폭력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는 달라져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지금까지(아날로그 시대)의 미술은 평면에 어떤 이미지나 개념을 그리는, 손이나 종이(캔버스)는 도구, 또는 보조적인 역할밖에 못했어요. 이제는 이들을 주격으로 회복하자는 거예요. 이미지나 개념으로 사람을 설득하려하지 않고 그들(손, 종이)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도록 하는 겁니다.”

그가 1960년대 말부터 모노크롬의 마티에르(바르는 일)와 연필의 반복되는 스트로크(선을 긋는 일)로 자신과 물질을 일체화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나 1980년대 이후 ‘묘법 시리즈’에서 종이(한지)의 특성을 두드러지게 한 것은 동일한 맥락이다.

연필의 반복되는 스트로크는 그가 말한 수신의 과정이고 그림은 결과물이다. 1982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국제종이회의’에서 한국 대표로 참가한 그는 “종이가 단지 그림을 뒷받침하는 도구가 아닌, 종이 스스로 물성(物性)을 드러내는 주격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새로운 문화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 격찬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자기해체’가 ‘묘법’에 은밀히 숨겨진 동기”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무명성화(無名性化)’해 자연과 더불어 살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일본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는 “이 새로운 전체성(全體性)은 지각할 수 있는 사실로서 현재하기보다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서, 마음을 움직여서, 그 자신을 복원하고자 한다”고 분석했다.

세계가 박 화백을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양이 간과한 정신세계가 작품에 담겨 있고,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공용의 대학 미술교재에 아시아 현대 작가 중 백남준과 더불어 그가 유일하게 등재된 것이나, 애슐린 출판사의 작품집 출간, 세계 유수의 박물관, 갤러리가 그의 작품을 소장하려는 것 등은 박 화백의 위상을 말해준다.

그는 본래 홍익대 동양화과에 입학했으나 그해 한국전쟁이 터져 학교가 부산으로 옮겨가면서 스승인 청전 이상범 선생이나 고암 이응로 선생과 재회할 수 없었다. 결국 서양화를 전공하게 됐는데 당대 화가인 김환기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1967년 홍익대 교수 시절 학생이 교수를 선택하는 ‘담임제’를 실시한 게 파장을 불러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 동양사상을 연구, 심취하게 됐는데 이것이 그의 미술의 근간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는 자연과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따라 완전히 달라요. 미술도 마찬가지죠. 서양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해 봤는데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나뉘죠. 르네상스 시대가 인간중심주의라며 위대하다고 하는데 그건 서양애들 생각이고 난 달리 봐요.”

서양은 자연을 정복 대상, 인간을 위한 도구로 봤으며, 이러한 세계관이 미술에도 그대로 반영됐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경우 모나리자를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해 자연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이다. 반면 동양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고 더불어 공존하는, 나아가 자연속 에 인간이 귀의하는 세계관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동양의 산수화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또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에 묻혀 있는 형상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서양은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 작가가 중심이죠. 대상이나 재료, 심지어 감상자는 관심 밖이예요. 아날로그 시대는 물론, 현재 디지털 시대 현대인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근본적인 이유가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 때문이라고 봐요.”

사람들은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안정감과 행복감을 찾게 된다고 한다. 일부 평론가는 '20세기 최고의 조각가 브랑쿠시, 미국의 일본계 2세 조각가 노부치 이사모 이후의 존재가 출현했다‘며 새롭게 조명하기도 한다..

“동양은 근대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전통적 가치관을 파괴했어요. 가치관의 공백과 상실에 따라 정치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중심이 상실됐죠. 그 정신의 복원을 위해 일관된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박 화백이 한지를 쓰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에게 있어 한지는 단순한 표현 재료가 아니다. 한지가 자기 신체를 드러내도록 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한지는 결국 물감과 합일을 이뤄 작품이 된다.

그는 세계 미술의 흐름을 언급하며 유럽과 미국에 희망이 안 보인다고 했다. 세계도 아시아의 미술을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테크닉이나 작가 중심에서 정신을 중시하고 21세기 문화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아시아 미술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시아 미술의 장래를 기대하면서도 일부 세태에 우려를 나타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요즘 작가들은 패셔니스타 같아. 유행에 민감하고 추종하고. 내가 늘 하는 말이 있지.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변하면 추락한다. ”

박 화백은 50여 년의 미술인생에서 추락하지 않고 한국 미술의 중심에 있어 왔다. 뿐만 아니라 세계 미술에서도 독창적인 아이덴디티로 주목을 받고 있다. 미네무라 도시아키 평론가가 “당신은 천재냐. 추락하지 않은 비결이 뭐냐”고 물었을 때 박 화백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가 변할 때까지 4~5년 병행한다”고 답했다. 좋은 술이 나오려면 ‘숙성’ 단계가 필요하듯 계속 변해도 추락하지 않는 숙성기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빨리 영웅이 되고 싶어 변하다 보면 추락하고, 변하면 추락하니까 자기가 만든 캡슐 속에 자기가 갇히지. 왜 변하지 않냐고 물으면 ‘심화한다’고 둘러대.”

후학을 위한 한마디를 부탁하자 대학 때 교실에 써 놨다는 글귀로 대신했다. “반드시 경계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했지. 첫째 네 스승을 닮지 말라. 둘째 역사에 부채를 지지 마라. 역사 속의 선배들이 해낸 것에 영향받지 말고 스스로를 차별화하라는 뜻이지. 셋째 너희들끼리 닮지 마라. 뛰어난 놈 흉내내지 말라는 거야.”

박 화백은 4시간 여 동안 쉼없이 얘기를 했다. 떡 두 조각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다시 작업실로 내려갔다. 인사에 갈음하는 미소가 부처를 닮았다. 그 옆 미완성의 ‘묘법’은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수신 그대로였다.

박서보 화백은 …


1931년 경북 예천 출생으로 1954년 홍익대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50, 60년대의 앵포르멜, 70년대의 모노크롬,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는 한지 작업 '묘법'은 한국 현대미술, 특히 추상미술의 역사 자체다.

평론가들은 박서보를 빼고는 한국 현대미술의 연표 작성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평한다. . 홍익대 회화과 교수(1962∼97), 홍익대 미술대학장(1986∼90), 한국미술협회 이사장(1977∼80) 등을 역임했다.

서울특별시 문화상(1996), 문화훈장(1994 옥관), 국민훈장(1984 석류장),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9 미술부문:대통령상), 세계청년화가의 파리대회 제1위상(1961) 등을 수상했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